위빠사나 길라잡이 [제7회 법문] 마음이란 무엇인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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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빠사나 길라잡이 [제7회 법문] 마음이란 무엇인가 (3)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21.06.08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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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문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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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는 말
2. 아비담마와 위빠사나의 관계
3. 위빠사나를 성취하기 위한 두 가지 길
4. 통찰지의 토양
5. 세 가지 관찰
6. 열 가지 위빠사나 지혜
7. 종성(種姓)의 마음
8. 도(道)의 마음
9. 반조의 지혜
10. 세 가지 해탈의 관문

일체 중생은 매 찰나 대상과의 연기적 관계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초기불교나 아비담마에서는 그 대상을 크게 물질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들로 분류합니다. 
밖의 물질적인 대상인 다섯 가지[형색·소리·냄새·맛·감촉]와의 접촉은 눈, 귀, 코, 혀, 몸을 통해서이고, 안의 정신적인 대상[法, dhamma]과의 접촉은 알음알이[mano, 마노]를 통해서입니다. 따라서 눈眼·귀耳·코鼻·혀舌·몸身·알음알이意 등의 여섯 감각장소[內六處]는 대상을 만나는 문門이 됩니다. 
부처님께서는 12처[內外六處]의 가르침을 통해서 세상, 또는 존재하는 모든 것[一切]은 안과 밖의 만나는 것, 즉 눈과 형색이, 귀와 소리가, 코와 냄새가, 혀와 맛이, 몸과 감촉이, 알음알이와 법이 만나는 것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섯 가지 밖의 감각장소[色·聲·香·味·觸·法]는 마음이 일어나는 바로 그 현장에서 함께 일어난다고 설명합니다. 마음의 일어남이라는 현장을 떠나서 여섯 대상이 독립해서 존재하는 실체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눈과 형상을 조건하여 눈의 알음알이가 일어난다.”는 명제에서 마음[識]이 연이생緣已生임을 알게 됩니다. 연기緣起라는 술어의 어원은 ‘빠띳짜-사뭅빠다’입니다. 여기서「빠띳짜paticca」는 ‘무엇을 의지하여’라는 뜻이고,「사뭅빠다samuppāda」는 ‘함께 위로 간다.’는 문자적인 뜻으로 일어남, 발생, 근원을 의미합니다. 중국에서는 연기로 한역하고 있고,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조건발생’으로 직역합니다. 
일어나는 법들은 조건의 화합을 의지하여 존재하기 때문에 빠띳짜[緣]라는 단어는 영원하다거나 원인 없이 생긴다거나 신이나 조물주 등의 거짓 원인으로부터 생긴다는 학설[常見]을 논파합니다. 조건이 화합할 때 법들이 일어나기 때문에 단멸이라거나 허무하다거나 지음이 없다(도덕적 행위의 과보)는 학설[斷見]까지 논파합니다.
부처님께서는『상윳따니까야』의「깟짜야나곳따의 경(S12:15)」에서 연기가 중도中道에 의한 원리임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습니다.  
“깟짜야나! ‘모든 것은 존재한다.’고 하는 것은 하나의 극단이다. ‘모든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도 또 하나의 극단이다. 여래는 그러한 양극단을 떠나서 중도로 가르침을 설한다.”
연기의 가르침은 자아·참나眞我·주인공 등의 존재론적 실체를 상정하는 것을 거부한다는 측면에서 제법무아諸法無我를 드러내는 강력한 수단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왜 존재 또는 세상을 12처로 해체해서 설하셨을까요? ‘나는 무엇인가’에 대한 부처님의 해답이 오온인 것과 마찬가지로 무상·고·무아를 극명하게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세상이라든지 일체라고 하면 고정불변하고 영원한 세상이나 절대적 존재로서의 일체가 존재하는 것처럼 착각해서 세상이나 일체에 집착하게 됩니다. 그러나 세상을 12처로 해체해서 보면 세상[諸法]의 무상·고·무아라는 세 가지 보편적 특성이 극명하게 드러나게 됩니다. 눈과 눈의 대상인 형색, 그리고 시각의식까지 무상함을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다른 감각 장소인 귀와 소리, 코와 냄새, 혀와 맛, 몸과 감촉, 그리고 청각의식, 후각의식, 미각의식, 촉각의식을 포함한 전前 오식五識까지 모두 다 무상합니다.
마노의 감각장소[意處]의 한 부분은 알음알이[意識]가 일어나는 문입니다. 그 문에서 89가지 마음[욕계54(=유익8+해로움12+과보23+작용11)+색계15+무색계12+출세간8]과 52가지[=受1+想1+行蘊50] 마음부수가 함께 일어난다고 아비담마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알음알이[意識]는 연이생, 즉 조건발생이므로 마음은 무상無常한 것이고, 또 실체가 없음[無我]이 여실하게 드러났습니다. 알음알이를 위시한 오온의 무상은 초기경의 여러 곳에서 강조되고 있는 진리의 말씀입니다. 
마음을 비롯한 오온을 절대화하는 것을 부처님께서 유신견[有身見]이라 하셨고, 이것은 중생을 중생이게끔 얽어매는 열 가지 족쇄 가운데 첫 번째로 이러한 유신견이 있는 한, 수행하여 신통력이 뛰어나거나 선정의 힘이 강하다고 하더라도 그런 수행자는 성자가 될 수 없습니다.
마음은 찰나와 상속으로 파악해야 합니다. 부처님께서는『앙굿따라 니까야』「하나의 모음(A1:5:8)』에서 “비구들이여, 이것과 다른 어떤 단 하나의 법도 이렇듯 빨리 변하는 것을 나는 보지 못하나니, 그것은 바로 마음이다. 비구들이여, 마음이 얼마나 빨리 변하는지 그 비유를 드는 것조차 쉽지 않다.”라고 강조하셨습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주석서와 아비담마에서 카나[khana, 刹那, 순간]으로 정착되었습니다. 마음을 비롯한 법들은 ‘찰나 생生 - 찰나 멸滅’하는 일어나고 사라짐의 문제일 뿐이고, 유무有無의 문제로 접근해서는 아니 됩니다. 불교사전에 의하면 현대의 시간관념으로 환산할 때 1찰나는 대략 75분의 1초에 해당한다고 말합니다. 
마음이 ‘찰나생· 찰나멸’이라 한다면 지금·여기에서 생생하게 유지되어 가는 우리의 마음은 이렇게 분명한데 어떻게 없다 할 수 있겠냐고 의문이 생깁니다. 초기불교와 주석서에서는 지금·여기에서 생생히 전개되는 이 마음을 흐름으로 설명합니다. 
이를 주석서에서는 심상속[心相續, citta-dhāra]이나 바왕가[bhavańga-sota]의 흐름 등으로 표현하고 있고, 남·북방 불교에서 모두 강조하고 있습니다. 마음은 그 마음을 일어나게 하는 근본 뿌리인 갈애와 무명으로 대표되는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다할 때까지 흐르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마음은 유위법으로 찰나적 존재입니다. 변하지 않고 고정돼 있으며 여러 가지 속성을 품고 있는 그런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물리학의 개념을 빌리자면 입자보다는 파장에 가깝다고 비유할 수 있습니다. 
찰나적으로 생멸하며 흘러가는 그 마음, 식識의 세계로부터 해탈하기 위한, 다이아몬드마저 절단할 수 있을 정도의 지혜를 세존께서 깨닫고 그 길을 우리에게 안내하고 있습니다.    
         
             ≪sati 행자의 복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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