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연(昊然) 스님이 엮은 회옹혜경(晦翁惠耕) 스님의 새로운 법화경 해석 [5] 법화경은 최대의 공덕경(功德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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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연(昊然) 스님이 엮은 회옹혜경(晦翁惠耕) 스님의 새로운 법화경 해석 [5] 법화경은 최대의 공덕경(功德經)이다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21.06.08 1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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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경전의 금자탑인 법화경에 대한 혜경 스님의 해석법문을 연재합니다. 혜경스님은 서울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출가한 후 평생을 경전연구와 집필활동에 매진하였습니다. 혜경 스님의 법화경에 대한 새로운 주석에 대하여 이 분야에서 뛰어난 법문을 전하신 호연 스님이 편역하여 독자들에게 새롭게 선보이게 되었습니다. 법화경에서 최고의 권위가인 두 스님의 소중한 강설을 소개하게 되어 큰 기쁨이 아닐 수 없습니다.
호연(昊然) 스님은 동국대 불교대학원 석사, 중앙승가대 대학원 박사 및 문학박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재단법인호연 이사장. 서울정혜선원·도봉사 주지이며 중앙승가대학교 교수로 있습니다. 현재 BTN불교TV에서 호연스님의“행복나무에 핀 법화경”방송을 강의중에 있습니다. (매주화요일 오전8시30분/오후5시,일요일오후8시방영)
회옹 혜경 스님
회옹 혜경 스님

불교에서는 보살의 생활, 즉 참다운 인간생활의 이상을 네 개의 카테고리(形式)에 의해 이것을 표시하고 있는데, 이를 4섭법[四攝法]이라 한다. 섭(攝)이란 섭수(攝受)의 의미로서 화광동진(和光同塵), 빛을 부드럽게 하여 티끌과 같이 하는 것, 즉 일체의 사람들을 거두어서 보살의 대도(大道)에 들게 하는 훌륭한 네 가지의 방편이 4섭법이다. 네 가지의 방편이란, 보시(布施)와 애어(愛語)와 이행(利行)과 동사(同事)를 말한다. 보시(布施)란, 베푸는 것으로서 일체의 공덕을 아낌없이 모두 주어서 남을 구제하는 것을 말하며, 애어(愛語)란, 자애(慈

호연 스님
호연 스님

 

愛)에 가득 찬 말을 가지고 남에게 말을 걸거나 대답을 해주는 등 상대방에게 이야기해 주는 것을 말한다. 이행(利行)이란, 훌륭한(善巧) 방편을 짜내서 남의 생명을 배양하는 행위이며, 동사(同事)란, 남이 원하는 일을 이해하여 그것을 도와서 유도하는 것을 말한다. 화복(禍福)을 분별하여 고락(苦樂)을 함께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보살의 길(道)로서 이 네 가지의 방법이 설해져 있지만, 그 네 가지 방법의 근본은 결국 자비의 마음이다. 탐내고 인색한 마음, 즉 탐욕의 마음을 떠난 자비의 마음을 따로 두고 어디에도「보살의 길」은 없다. 불쌍하고 가련함에 베푸는 자비의 마음이야말로 보살의 마음인 것이다. 아니 그것이 그대로 부처님의 마음이다. 그러므로「보살의 행」으로서 불교에서는 6도[六度], 즉 6바라밀이라는 것이 설해져 있다. 이 6바라밀의 최초의 행은 보시이다. 이 보시의 행위가 모태로 되어 다른 다섯 가지의 수승한 행이 생긴다. 그런데 바라밀이란 반야바라밀다의 바라밀로서 이미 말한 바와 같이 「피안에 건너간다」라는 것인데 이 언덕에서 저 언덕으로 건너는 데에는 여섯 가지의 행이 있다는 것이 6바라밀, 즉 6도이다. 보시와 지계와 인욕과 정진과 선정과 지혜가 그것이다. 보시란 탐욕의 마음을 버리고 남을 불쌍함에서 베풀어 주는 것이며 지계(持戒)란, 규칙 바른 생활의 의미로서 도덕적인 행위이다. 인욕(忍辱)이란, 참고 견디는 인내(忍耐)이며, 정진(精進)이란, 노력하는 것으로서 온 생명을 다하여 노력하는 것이다. 선정(禪定)이란, 침착함인데 마음을 가라앉게 하는 것이니「명경지수(明鏡止水)」라고 하는 경지이며, 지혜(智慧)란, 곧 반야(般若)의 지혜이니, 사물을 있는 그대로 뚜렷하게 인식하는 것으로서 분별을 떠난 무차별적인 마음가짐을 말한다. 반야바라밀을 지혜의 완성이라고도 하는데「너와 내가 그대로 하나임」을 아는 무분별적인 사랑을 완성하는 것이 바로 지혜이며, 이 지혜의 바탕 위에서 남에게 베푸는 것이 바로 자비이다. 예로부터 자비란「발고여락(拔苦與樂)」이라 하여 남의 괴로움을 뽑아서 그 자리에 사랑을 주는 것을 말한다.  
맨 처음에 내가 반야의 지혜야말로 피안에 건너가는 유일한 길이라고 말했으나 여기서는 또 보시가 6도의 모태라고 하며 보시야 말로 6바라밀의 근본이라고 말하니, 어느 것이 진실하냐고 의심을 가지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두 가지가 모두 진실이다. 불교에서는 지혜와 자비란 둘이면서도 하나이다. 하나를 두 가지 측면에서 본 것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보시는 자비를 뜻한다. 참 자비는 지혜의 눈이 열려있지 않으면 한낱 동정에 불과하다. 내가 쓰고 남는 것을 베풀어주어서는 진정한 의미로서의 자비는 아니다. 대비는 그렇다고 맹목적인 사랑은 아니다. 반드시 바른 비판과 엄정한 판단과 잘못 되지 않은 인식, 즉 지혜에 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6바라밀의 완성에 의하지 않고는 피안으로 건너갈 수 없다. 그래서 보시가 반야라고 한 것이다.  
그런데 한번 종교적 반성을 해 본 사람이면 거기에는 어떤 구애(拘碍)도 거치적거림도 장애도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보살의 길이야말로 무애(無礙)의 한 길[一道]이다. 어떤 거리낌도 없는 하얀 길[白道]이다. 「마음에 거리낌이 없다」라고 한 것은 바로 그것을 가리킨 말이다.
가(罣)라는 글자는 그물(網)을 말한다. 즉 물고기를 잡는 그물이며 애(礙)라는 글자는 장애물 등 방해, 걸림이라는 의미이다. 범어원전에는「가애(罣礙)가 없다」라는 곳이「걸림이 없이 움직인다.」라고 되어 있는데, 그 무엇에도 구속되지 않고 사로잡히지 않으며 스무스하게 자유롭게 움직이는 것이 즉「가애가 없다」라는 것이다. 돈을 구하고, 이름(名譽)을 구하고, 권세(權力)를 구하는 사람에게는 가애가 없다고 할 수 없다. 돈이라는 그물, 명예라는 그물, 권력이라는 그물에 걸려서 무애(無碍)하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러므로 구하지 않는 것이야(無願)말로「무애(無碍)의 사람」이라 할 수 있다.   

법화경은 최대의 공덕경(功德經)이다

공덕이란, 사전적 의미로는 “훌륭한 덕성, 선한 성질, 특별한 성질, 가치 있는 특질, 선을 쌓아 얻을 수 있는 것, 말하자면 덕을 말한다.”라는 것이다. 그리고 덕이란, 강희자전(康熙字典)에 의하면 “베푸는 것(施也)”을 말한다. 그러므로 법화경은 철저하게 남을 위해 법을 베푸는 것을 위주로 하는 경전이다. 다시 말해 법을 설해주는 것을 “자기의 목숨마저도 아끼지 말아야(不自惜身命)하는 것이다 
 이렇게 법시(法施)를 위해서는 우선 법화경을 보거나 듣거나 하면 이를 기억하여야 하는 것을 수지(受持)라고 하며, 기억을 단단히 하기 위해서는 읽고(讀) 외워야(誦) 하며 나아가 남에게 읽어주고, 외워서 들려주어야만 할 뿐만 아니라, 상대방이 잘 이해하도록 해설(解說)해주고, 멀리 있는 사람에게는 써서(書寫) 나누워 주어야만 비로소 공덕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공덕은 베푸는 것이지 받는 것이 아니다. 
이렇듯 법화경은 시혜(施惠)를 가지고 공덕을 쌓는 것이지, 사경을 해서 탑속에 넣어두는 것이 공덕은 아니다. 그리고 이 베품(布施)은 어떠한 바람을 가지고 하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 무주상(無住相) 보시를 원칙으로 한다.      
그러므로 수지(受持)할 때부터 남을 위한다는 정신으로 수지하고, 읽는 것(讀)이나, 외우는 것(誦)도 마찬가지로 남을 위한다는 이타(利他)의 마음으로 해야 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법화경』을 대승(大乘) 중에도 지극히 높은 경전이라고 한 것이며, 「제경(諸經) 중의 왕(王)」이라고 일컬어 온 것이다. 
그런 까닭에 공덕을 쌓기 위해서는「설한 바와 같이 수행(如說修行)하라」라고 한 것이다 
그런데 근자에 와서는 우리 주위에 법화경 사경(寫經)에 대한 큰 바람이 불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매우 좋은 현상이다. 애석한 것은 사경을 한 당사자들이 과연 법화경을 얼마나 알고 있으며, 다른 사람에게 얼마나 전해 주었는지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볼일이다. 다만 병이 낫는다든가, 원하는 바가 이루어진다든가, 행복해진다든가, 하는 막연한 희망아래 사경을 했다면 참으로 무슨 공덕이 있겠는가, 의문이 간다. 예를 들면 여기 많은 떡이 있다고 하자. 그런데 자기가 그 많은 떡을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주지 않고 자기 혼자 배불리 먹는 것도 공덕이 되는 것인가. 남에게 나누어주는 것이야말로 공덕이 되는 것이 아닌가, 옛날 말에 눈뜬 사람이 장님을 인도해 가야만 하지, 장님이 장님들을 인도해 사게 되면 애꿎은 사람마저 개을에 빠뜨리게 된다는 이야기가 있다.『법화경』「견보탑품제10」에「부처님 멸도 후에 능히 그 뜻을 이해하면, 이런 사람은 천신과 인간의 세간에서 <진리>에 눈뜬 사람이며 두려운 세상에서 짬깐 만이라도 <이 법화경> 설하면, 일체의 천신과 인간이 모두 다 공양을 할 것이다(…… 세간지안(世間之顔)……」그런데 아직 눈도 뜨지 않는 사람의 잘못된 지도에 의해서 공덕을 쌓는 것이 아니라, 욕심만 키운 것은 아닌지?. 그렇다고 그동안 사경한 것이 잘못한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글씨 공부를 한 것마저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 내용을 모두 알았는지? 지혜가 있다면 속히 반성해서 참회하고, 올바른 길로 가기를 간절히 바란다.
(다음 호에 계속)

(다음 호에 계속)

 불교에서는 보살의 생활, 즉 참다운 인간생활의 이상을 네 개의 카테고리(形式)에 의해 이것을 표시하고 있는데, 이를 4섭법[四攝法]이라 한다. 섭(攝)이란 섭수(攝受)의 의미로서 화광동진(和光同塵), 빛을 부드럽게 하여 티끌과 같이 하는 것, 즉 일체의 사람들을 거두어서 보살의 대도(大道)에 들게 하는 훌륭한 네 가지의 방편이 4섭법이다. 네 가지의 방편이란, 보시(布施)와 애어(愛語)와 이행(利行)과 동사(同事)를 말한다. 보시(布施)란, 베푸는 것으로서 일체의 공덕을 아낌없이 모두 주어서 남을 구제하는 것을 말하며, 애어(愛語)란, 자애(慈愛)에 가득 찬 말을 가지고 남에게 말을 걸거나 대답을 해주는 등 상대방에게 이야기해 주는 것을 말한다. 이행(利行)이란, 훌륭한(善巧) 방편을 짜내서 남의 생명을 배양하는 행위이며, 동사(同事)란, 남이 원하는 일을 이해하여 그것을 도와서 유도하는 것을 말한다. 화복(禍福)을 분별하여 고락(苦樂)을 함께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보살의 길(道)로서 이 네 가지의 방법이 설해져 있지만, 그 네 가지 방법의 근본은 결국 자비의 마음이다. 탐내고 인색한 마음, 즉 탐욕의 마음을 떠난 자비의 마음을 따로 두고 어디에도 「보살의 길」은 없다. 불쌍하고 가련함에 베푸는 자비의 마음이야말로 보살의 마음인 것이다. 아니 그것이 그대로 부처님의 마음이다. 그러므로 「보살의 행」으로서 불교에서는 6도[六度], 즉 6바라밀이라는 것이 설해져 있다. 이 6바라밀의 최초의 행은 보시이다. 이 보시의 행위가 모태로 되어 다른 다섯 가지의 수승한 행이 생긴다. 그런데 바라밀이란 반야바라밀다의 바라밀로서 이미 말한 바와 같이 「피안에 건너간다」라는 것인데 이 언덕에서 저 언덕으로 건너는 데에는 여섯 가지의 행이 있다는 것이 6바라밀, 즉 6도이다. 보시와 지계와 인욕과 전진과 선정과 지혜가 그것이다. 보시란 탐욕의 마음을 버리고 남을 불쌍함에서 베풀어 주는 것이며 지계(持戒)란, 규칙 바른 생활의 의미로서 도덕적인 행위이다. 인욕(忍辱)이란, 참고 견디는 인내(忍耐)이며, 정진(精進)이란, 노력하는 것으로서 온 생명을 다하여 노력하는 것이다. 선정(禪定)이란, 침착함인데 마음을 가라앉게 하는 것이니 「명경지수(明鏡止水)」라고 하는 경지이며, 지혜(智慧)란, 곧 반야(般若)의 지혜이니, 사물을 있는 그대로 뚜렷하게 인식하는 것으로서 분별을 떠난 무차별적인 마음가짐을 말한다. 반야바라밀을 지혜의 완성이라고도 하는데 「너와 내가 그대로 하나임」을 아는 무분별적인 사랑을 완성하는 것이 바로 지혜이며, 이 지혜의 바탕 위에서 남에게 베푸는 것이 바로 자비이다. 예로부터 자비란 「발고여락(拔苦與樂)」이라 하여 남의 괴로움을 뽑아서 그 자리에 사랑을 주는 것을 말한다.  
 맨 처음에 내가 반야의 지혜야말로 피안에 건너가는 유일한 길이라고 말했으나 여기서는 또 보시가 6도의 모태라고 하며 보시야 말로 6바라밀의 근본이라고 말하니, 어느 것이 진실하냐고 의심을 가지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두 가지가 모두 진실이다. 불교에서는 지혜와 자비란 둘이면서도 하나이다. 하나를 두 가지 측면에서 본 것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보시는 자비를 뜻한다. 참 자비는 지혜의 눈이 열려있지 않으면 한낱의 동정에 불과하다. 내가 쓰고 남는 것을 베풀어주어서는 진정한 의미로서의 자비는 아니다. 대비는 그렇다고 맹목적인 사랑은 아니다. 반드시 바른 비판과 엄정한 판단과 잘못 되지 않은 인식, 즉 지혜에 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6바라밀의 완성에 의하지 않고는 피안으로 건너갈 수 없다. 그래서 보시가 반야라고 한 것이다.  
 그런데 한번 종교적 반성을 해 본 사람이면 거기에는 어떤 구애(拘碍)도 거치적거림도 장애도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보살의 길이야말로 무애(無礙)의 한 길[一道]이다. 어떤 거리낌도 없는 하얀 길[白道]이다. 「마음에 거리낌이 없다」라고 한 것은 바로 그것을 가리킨 말이다.
 가(罣)라는 글자는 그물(網)을 말한다. 즉 물고기를 잡는 그물이며 애(礙)라는 글자는 장애물 등 방해, 걸림이라는 의미이다. 범어원전에는 「가애(罣礙)가 없다」라는 곳이 「걸림이 없이 움직인다.」라고 되어 있는데, 그 무엇에도 구속되지 않고 사로잡히지 않으며 스무스하게 자유롭게 움직이는 것이 즉 「가애가 없다」라는 것이다. 돈을 구하고, 이름(名譽)을 구하고, 권세(權力)를 구하는 사람에게는 가애가 없다고 할 수 없다. 돈이라는 그물, 명예라는 그물, 권력이라는 그물에 걸려서 무애(無碍)하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러므로 구하지 않는 것이야(無願)말로 「무애(無碍)의 사람」이라 할 수 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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