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연(昊然) 스님이 엮은 회옹혜경(晦翁惠耕) 스님의 새로운 법화경 해석 [6] 법화경은 법공을 설하는 경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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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연(昊然) 스님이 엮은 회옹혜경(晦翁惠耕) 스님의 새로운 법화경 해석 [6] 법화경은 법공을 설하는 경전이다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21.06.15 1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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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경전의 금자탑인 법화경에 대한 혜경 스님의 해석법문을 연재합니다. 혜경스님은 평생을 경전연구와 집필활동에 매진하였습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지난 5월 혜경 스님께서 입적하셔서 혜경 스님의 법화경에 대한 새로운 주석에 대하여 이 분야에서 뛰어난 법문을 전하신 호연 스님이 편역하여 독자들에게 새롭게 선보이게 되었습니다. 법화경에서 최고의 권위가인 두 스님의 소중한 강설을 소개하게 되어 큰 기쁨이 아닐 수 없습니다.
호연(昊然) 스님은 동국대 불교대학원 석사, 중앙승가대 대학원 박사 및 문학박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재단법인호연 이사장. 서울정혜선원·도봉사 주지이며 중앙승가대학교 교수로 있습니다. 현재 BTN불교TV에서 호연스님의“행복나무에 핀 법화경”방송을 강의중에 있습니다. (매주화요일 오전8시30분/오후5시,일요일오후8시방영)
회옹 혜경 스님
회옹 혜경 스님

「법사품 제십」에「홍경(弘經)의 삼궤(三軌)」라고 하여 법사가 법을 넓히는 데에 있어서 지켜야할 세 가지의 법칙이 있다고 설하고 있다. 즉「만일 사람이 이 경을 설하려고 한다면, 여래의 방에 들어가, 여래의 옷을 입고, 그리고 여래의 자리에 앉아서, 사람들 가운데서 두려움 없이, 널리 분별해서 설해야만 한다. 큰 자비심을 방으로 하고, 유화와 인내(柔和忍辱)로 옷으로 하고, 일체존재의 공(法空)을 자리로 한다. 이 <자리>에 머물러서 법을 설하라. 라고 한다. 이것은 왜 그런가하면, 법화경이 편집될 무렵 즉 당시에 큰 세력을 가진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가 삼세실유(三世實有) 법체항유(法體恒有)를 주장한데 대해, 이에 부정하는 대승(大乘) 편에서는 일체의 존재(法)에는 실체(實體)가 없는 무아(無我)의 상태라는 것을 주장하게 되었기 때문에 대승 초기 경전인『금강경(金剛經)』을 비롯하여『법화경(法華經)』도 역시 이 관점에서 설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호연 스님
호연 스님

공(空)이란, 원래 śūnya, 즉 팽창(膨脹), 다시 말해 부풀어진 것이라는 의미인데 이를 한역(漢譯)에서는 공(空), 공무(空無), 무(無), 공성(空性), 공상(空相), 허공(虛空), 성공(性空), 공법(空法), 공적(空寂), 공법성(空法性) 등으로 번역하고 있다.     
이리하여 수냐(śūnya,)의 본뜻인 팽창은 중요시 되지 않고, 무(無)로 해석해졌기 때문에 공에 대한 이해가 잘못되어 왔다고 본다.   
아무튼 이 우주에 존재하고 있는 것은 인연에 의해 조작된 것이므로 우리 인간을 비롯하여 만물만상은 모두 부풀어져서 실체가 없는 것이다. 이것이 곧 제법실상(諸法實相)이다. 이 제법실상인 공은 인(因)과 연(緣)이 서로 만나서 행(行)이라는 형성력(形成力)에 의해 자성(自性)을 지키지 못하고 전혀 다른 것으로 변이(變異)되었으므로『화엄경(華嚴經)』에서는 불수자성수연성(不守自性隨緣性)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렇듯 대승경전은 모두 이 공(空)이라는 진리를 밑에 깔고 설해져 있기 때문에, 『법화경』도 예외는 아닌 것이다.
그리고 불교, 즉 부처님의 가르침은 성불이라는 이상(理想)을 목표로 하여, 우선 번뇌의 억제(滅)를 가르치고 있다. 부처님의 입장에서는 번뇌즉보리(煩惱卽菩提)이지만, 우리들 범부에게는 번뇌는 번뇌이고 보리는 보리인 것이다. 번뇌를 말끔히 조복한 누진자(漏盡者)가 아니면 성불은 불가능한 것이다. 대승경전을 공부한다고 하여 모두가 보살이라고 생각하지만, 보살에는 3가지가 있음을 알아야만 한다. 첫 번째는 지혜의 보살, 두 번째는 믿음을 굳게 가진 보살, 세 번째가 정진하는 보살을 들 수 있는데, 지혜가 있는 보살이 믿음과 정진을 겸한다면, 성불할 수 있지만, 믿음만을 가진 보살은 지혜가 부족하고, 정진만 하는 보살은 지혜와 믿음이 약하기 때문에 성불이 어려운 것이다. 우리가 흔히 바라밀(波羅蜜)을 말하는데, 바라밀이란 범어의 파라미타를 음역한 것으로서, 옛날에는 도피안(度彼岸)으로 번역하였으나 요즘은 완성(完成)으로 번역하고 있다. 그러므로 지혜의 완성이 바로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인 것이다. 
그런데 조금 미안한 말이지만, 법화경을 믿는 사람들은 일본의 일련종(日蓮宗)의 지파(支派)인 법화종(法華宗)의 영향을 받아서 반야에 대해서 너무 모르는 실정이다. 절대평등(絶對平等)인 공을 모르고서 어찌 보살이 되고, 성불이 가능할 것인가. 그리고 이 지혜를 갖지 못하고서 인격이 완성될 수 있겠는가       
아래에 아공(我空)과 법공(法空)에 관해 간단히 설명해 둔다.

 (1) 자아(自我)는 공성(空性)이다.      
「아(我)」란, 원래 산스크리트어(語)에서는 「아트만 (atman)」이다. 그것만으로 독립하여, 언제까지라도 변하지 않고, 그 자신의 본질을 가지고, 존재하고 있는 것을 철학적 용어로「실체(實體)=서브스턴스(substance)」라고 말하는데, 그러한 것을 「아(我)」라고 한다. 그것이「아」의 첫 번째 의미이다. 그리고 실체시(實體視) 된 인간의 「자아(自我)」라는 의미가 또 하나 있다. 그러므로 이를 합해서 「실체로서의 자아」라는 의미라고 생각하면 좋다. 
조금 더 쉽고 평범하게 말을 바꾸면, 우리들 보통 인간은, 대체로 다음과 같이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라고 생각된다. 「어떠한 것의 은혜도 입지 않고, 누구의 보살핌도 받지 않고, 언제까지라도 살 수 있는 권리가 있는 것 같은 자기」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웬일인지 그러한 감각으로 나날을 살아가고 있지 않는가, 물론 잘 물어 보면, 그렇지 않다고는 알고 있지만, 그러나 평소에는 누군가의 보살핌을 받고 있다는 것, 어떠한 것의 은혜를 입고 있다는 것은, 거의 다 잊어버리고 오늘을 살고 있다. 내일도 살아 갈 것이며, 모레도 살아갈 것이고, 1년 후에도 살아 있을 것이다.…… 앞일은 계속 생각지 않는다는, 그러한 방법으로, 뭔가 언제까지라도 살아 있을 것 같은 기분으로 살고 있다. 그리고 자기 마음속에, 이렇게 되면 좋겠다. 이것이 욕심난다. 저것이 욕심난다. 하는 마음이 있고, 그것이 실현되어야 한다고 하는, 생각으로 우리는 보통 살아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한 남(他人)이나, 다른 것과 완전히 분리된 것 같은, 모습으로 「자기(自己)」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자기」라고 하는 말은 남과 나누어진, 자기의 몸과 마음을 가지고 있어서, 의지나, 행동이나, 소유(所有)의 주체(主體)로서 존재하고 있다. 잘 들을 수 있고, 잘 확인하면, 자기가 세계의 중심 등은 아니라는 것은, 납득되지 않을 수는 없지만, 아무래도 자기가 세계의 중심이야 하고, 그랬으면 좋겠다고 하는 생각으로, 또한 세계는 자기 생각대로 되어야 한다. 되면 좋겠다고 하는, 마음으로 우리는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평소에 그러한 자기라고 하는 것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여, 매일 생활하고 있으며, 그것으로서 일단은 좋은 형편이다. 라고 한다든가, 참으로 여러 가지 형편이 좋지 않은 것도 있지만, 뭔가 변통이 되기 때문에 형편이 좋은 것처럼 생각하고 있다. 다시 말해, 대단히 행운인 편은 제외하고 ― 그리고 행운인 사람도 실은 그렇지 않은가 하고 생각되는데 ― 인생에는 생각대로 되지 않는 일이 태산 같다. 잘 생각해 본다면, 세계가 나를 위해 존재하고 있지 않는 것쯤은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는 나를 위해, 나에게 유익하도록 있었으면 좋겠다. 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마음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잘 생각해 보면, 매우 많은 사람들에게 보살핌을 받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아무런 그 누구의 보살핌도 받고 있지 않고 있다고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참으로 여러 가지 것의 은혜를 입고 있지만, 그것을 잊어버리고 있다. 혹은 당연한 것처럼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언제까지라도 살고 있을 것 같은 마음으로 살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즐겁다든가, 슬프다든가, 화가 났다든가, 남과 다툰다든가, 여러 가지 것이 있다. 그리고 그것은 그 나름대로 형편이 좋지 않는 것도 있지만, 어떻게라도 적당히 변통이 될 수 있기 때문에, 그러한 자기의 존재 방식에 대해 크게 의심하는 일은 없다. 
 그러나 유식, 불교 전체가 그러한 생각이야 말로 미혹 · 망상이라고 한다. 자아는 공성(空性)이여서 실체(實體)가 없다. 거의 모든 사람 = 범부(凡夫)가 생각하고 있는 것 같은 그러한 것은 아니라는 의미이다. 
 간단히 복습을 하자면, 나는, 예를 들면 아버지, 어머니가, 계시지 않으면 태어나지 않았다. 그 아버지, 어머니는 제 각기 아버지, 어머니가, 계시지 않으면 태어나지 않았다. …… 그것을 생각해 보면, 그야말로 계산할 수도 없는 수의 조상의 은혜로, 그분들의 보살핌을 받고 살고 있다. 물의 은혜로 살고 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도 탄산가스를 품어내면서 산소를 마시며 살고 있다. 그러한 의미에서 여러 가지 것의 은혜나 보살핌을 받고, 어느 일정기간동안 살고 있는 존재, 「연기적인 존재이다.」그러한 의미에서 말하면, 물 없이는, 먹을거리 없이는, 부모 없이는, 그밖에 여러 가지 것 없이는 나는 없기 때문에, 그러한 의미에서 실체가 없는 「무아(無我)」이다.
나는 어떠한 사람에게는 좋은 사람이기도 하고, 어떤 사람에게는 나쁜 사람이기도 하며, 어떤 사람에게는 전혀 관심 · 관계가 없는 사람이기도 하는, 식으로 나라고 하는 인간이 좋은 사람이라든가, 나쁜 사람이라든가, 관계없는 사람이라고도 말한다. 나 자신은 변하지 않는 본질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고, 관계 가운데서 성격이 결정된다. 그러한 의미에서는 변하지 않는 성격이라고 하는 본질은 없다. 곧 「무자성(無自性)」이다. 
어느 때, 태어나서 그리고 길러져서, 길러진다고 하는 것은 마침내 늙는 것이다. 그리고 끝내는 누구라도 죽어간다. 곧 「무상(無常)」한 존재이다. 
무상한 존재이면서, 우리는 죽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고, 그리고 갖가지 연(緣) 가운데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연에 의해서 행복할 때도 있고, 불행할 때도 있는 것이 자연적인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을 자연이라고 받아들이지 않고, 매우 괴로워하기도 한다. 곧「고(苦)」의 존재이다. 그러한 식으로, 우리는 자기가 생각하고 있는 것 같은, 그러한 자기는 아니다. 그것을 「공성(空性)」이라 한다고 배워왔다. 
 (다음 호에 계속)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해야 할 것은, 이「아공(我空)」이라고 하는 생각은, 우리들이 평소에 가지고 있어, 세간에서도 통용되고 있는 상식, 특히, 내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상식과 정반대라는 것이다. 거기에 주목해 둘 필요가 있다. 「아공」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아무래도 자기들 평범한 사람 · 범부에게는 관계가 없다. 그러나 「매우 고상하고 좋은 이야기, 깊은 이야기의 내용」이라고 듣고 흘려버리고 말면, 거의 의미⋅효과가 없다. 그렇지 않고, 자기는 그것으로 좋다고 하는 생각은, 어떤 의미에서 전면적으로 틀린 것이라고 부정되고 있다. 라고 하는 것을 확실히 알아차리고, 공성이라고 하는 생각, 말하자면 직면 · 대결하여, 그 위에서 납득하든가, 혹은 역시 납득하지 않든가를, 결정하는 편이 유효 · 유의의(有意義)한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한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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