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전】
1. 이것은 참으로 세존께서 말씀하신 것이니 아라한께서 말씀하신 것을 이처럼 저는 들었습니다.
“비구들이여, 세 가지 눈이 있다. 무엇이 셋인가? 육체적인 눈[肉眼], 신성한 눈[天眼], 통찰지의 눈[慧眼]이다. 비구들이여, 이러한 세 가지 눈이 있다.”
이러한 뜻을 세존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2. 이 경에서 이것을 이렇게 ‘게송’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육체적인 눈과 신성한 눈과 위없는 통찰지의 눈, 이러한 세 가지 눈을 최고의 인간은 설하였노라. 육체적인 눈의 일어남은 신성한 눈의 길이 되고, 지혜가 일어날 때 위없는 통찰지의 눈이 있으며 이 눈을 먼저 얻으면 모든 괴로움에서 해탈하노라.”
이러한 뜻 또한 세존께서 말씀하셨으니 이처럼 저는 들었습니다.
【해설】
『이띠웃따까 주석서』에서는 두 가지 눈, 즉 ⑴ 지혜의 눈[智眼]과 ⑵ 육체적인 눈으로 요약하여 설명한다.
⑴ 지혜의 눈에는 신성한 눈[天眼], 통찰지의 눈[慧眼]의 두 가지가 있다. 천안은 광명이 넘쳐흘러서 생긴 지혜로 중생들의 죽고 다시 태어남을 아는 지혜이고, 혜안[慧眼]은 사성제를 철견하는 지혜를 말한다.
『맛지마 니까야 주석서』는 통찰지의 눈[慧眼]에 대하여 이렇게 설명한다. 그것은 통찰지이다. 보는 것을 성취한다는 뜻을 가진 눈이라는 통찰지로 꿰뚫어 안다는 말이다. 통찰지는 삼매의 통찰지와 위빠사나의 통찰지의 두 가지가 있다. 삼매의 통찰지에 의해서는 역할과 미혹하지 않음을 통해서 꿰뚫어 알고, 위빠사나의 통찰지에 의해서는 무상·고·무아의 세 가지 특상을 통찰하여 대상을 통해서 아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담마상가니 주석서』는 통찰지의 눈을 다섯 가지로 세분하여 설명하고 있다. ➀ 부처님의 눈[佛眼], ➁ 보편적인 눈[普眼], ➂ 지혜의 눈[智眼], ➃ 신성한 눈[天眼], ➄ 법의 눈[法眼]의 다섯이다. 여기서 ➀불안[佛眼]은 중생들의 성향과 잠재성향을 아는 지혜와 그들의 정신적인 기능의 성숙을 아는 지혜, ➁보안[普眼]은 부처님의 일체지의 지혜, ➄법의 눈[法眼]은 예류도부터 일래과까지의 도와 과에 대한 지혜를 말한다.
앞서 본 바와 같이 주석서에 따라서 지혜의 눈이라는 용어와 통찰지의 눈이라는 용어는 혼용되고 있다.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하면,『이띠웃따까 주석서』는 다섯 가지 지혜의 눈[智眼] 안에 통찰지의 눈이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
『담마상가니 주석서』는 통찰지의 눈 안에 지혜의 눈이 포함되어 있다고 하고, 다른 한편『상웃따 니까야 주석서』는 다섯 가지 눈[五眼] 가운데 통찰지의 눈을 포함시키고 있다고 한다.
⑵육안[肉眼]에 대하여『담마상가니 주석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여기에는 ➀ 감성의 눈과, ➁ 안구 등과 같이 물질들이 혼합된 눈의 두 가지가 있다고 한다.
이 혼합된 눈은 눈구멍에 놓여있으면서 아래로는 눈구멍의 뼈에, 위로는 눈썹의 뼈에, 양 옆으로는 눈꼬리에, 안쪽은 뇌에, 밖으로는 속눈썹에 에워싸여 있는 고깃덩이이라고 설명한다.
육안은 물질이다. 이 물질은 네 가지 근본물질, 색깔, 냄새, 맛, 영양분, 배열, 모양, 생명기능, 성질, 몸의 감성, 눈의 감성이라는 14가지 성분이 있다.
물질 가운데 네 가지 근본물질과 그것에 의지하는 색깔, 냄새, 맛, 영양분, 배열, 모양의 여섯 가지를 더한 열 가지는 각각 업과 마음과 온도와 음식이라는 네 가지 요인에서 생겼기 때문에 40가지가 된다.
그리고 생명기능, 성질, 몸의 감성, 눈의 감성이라는 네 가지는 전적으로 업에서 생긴 것이기 때문에 모두 합쳐서 44가지 물질을 통해서 44가지 성분이 된다.
천안[天眼]은 초기불전의 여러 곳에서 중생들의 죽음과 다시 태어남을 아는 지혜[天眼通]의 정형구로 나타난다.
『디가 니까야』의 「빠야시 경」(D23)에 이와 같이 쓰여 져 있다. “태수여, 저 세상은 그대가 생각하듯이 이런 육체적인 눈으로는 결코 볼 수 없습니다. 태수여, 숲이나 밀림 속에 있는 조용하고 소리가 없고 한적하고 사람들로부터 멀고 한거하기에 좋은 외딴 처소들을 의지하는 사문·바라문들은 거기서 방일하지 않고 근면하고 스스로 독려하며 머물면서 신성한 눈[天眼]을 청정하게 합니다. 그들은 인간의 능력을 넘어선 청정한 신성한 눈으로 이 세상도 보도 저 세상도 보고 화현하는 중생들도 봅니다.”
육안은 제한된 것이고, 천안은 고귀한 것이고, 혜안은 무량한 것이다. 육안은 욕계의 것이고, 천안은 색계의 것이지만 둘 다 세간적이고 번뇌의 대상이고 형색을 대상으로 취한다. 그 반면에 혜안은 출세간적이고 번뇌의 대상이 아니고 네 가지 진리를 대상으로 취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