狂如 안재철 교수의 육조법보단경 읽기 [24] - 坐具를 한번 펼치시니, 曺溪의 사방경계를 모조리 덮거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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狂如 안재철 교수의 육조법보단경 읽기 [24] - 坐具를 한번 펼치시니, 曺溪의 사방경계를 모조리 덮거늘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21.07.07 1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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次年春에 師╷ 辭衆ᄒᆞ고 歸寶林커시ᄂᆞᆯ 印宗이 與緇白送者╷ 千餘人이 直至曺溪ᄒᆞ며 時예 荊州通應律師╷ 與學者數百人과 依師而住ᄒᆞ더니 師╷ 至曺溪寶林ᄒᆞ샤 覩堂宇╷ 湫隘ᄒᆞ야 不足容衆ᄒᆞ시고 欲廣之ᄒᆞ샤 遂謁里人陳亞仙ᄒᆞ야 曰ᄒᆞ샤ᄃᆡ 老僧이 欲就檀越ᄋᆞᆫ 求坐具地ᄒᆞ노니 得否아 仙이 曰호ᄃᆡ 和尙坐具ᄂᆞᆫ 幾許闊이ᅌᅵᆺ고 祖╷ 出坐具ᄒᆞ야 示之ᄒᆞ신대 亞仙이 唯然ᄒᆞᆫ대 祖╷ 以坐具ᄅᆞᆯ 一展ᄒᆞ시니 盡罩曺溪四境커ᄂᆞᆯ 四天王이 現身ᄒᆞ야 坐鎭四方ᄒᆞ니 今寺境에 有天王嶺ᄒᆞ니 因茲而名ᄒᆞ니라

【諺解】버근 ᄒᆡᆺ 보ᄆᆡ 師╷ 衆을 여희오 寶林에 가거시ᄂᆞᆯ 印宗이 緇와 白과로 【緇ᄂᆞᆫ 쥬ᇰ이오 白ᄋᆞᆫ 俗이라】 보낼 사ᄅᆞ미 千餘人이 바ᄅᆞ 曺溪예 가며 그ᄢᅴ 荊州╷ 通應律師╷ 學者 數百人과 師ᄅᆞᆯ 브터 住ᄒᆞ더니 師╷ 曺溪寶林에 가샤 堂宇╷ 조바 足히 衆을 容納디 몯호ᄆᆞᆯ 보시고 너피고져 ᄒᆞ샤 里人 陳亞仙을 보아 니ᄅᆞ샤ᄃᆡ 老僧이 檀越에 나ᅀᅡ오ᄆᆞᆫ 坐具만 ᄯᅡᄒᆞᆯ 求코져 ᄒᆞ노니 得ᄒᆞ려 몯ᄒᆞ려 仙ᅌᅵ 닐오ᄃᆡ 和尙ㅅ 坐具ᄂᆞᆫ 언매나 너르니ᅌᅵᆺ고 祖╷ 坐具ᄅᆞᆯ 내야뵈신대 亞仙이 그리호리ᅌᅵ다 ᄒᆞᆫ대 祖╷ 坐具ᄅᆞᆯ ᄒᆞᆫ 번 펴시니 曺溪四境을 다 ᄡᅡᄂᆞᆯ 四天王이 모ᄆᆞᆯ 現ᄒᆞᅌᅣ 四方애 안자 눌러시니 이제 寺ㅅ 境에 天王嶺이 잇ᄂᆞ니 이ᄅᆞᆯ 因ᄒᆞ야 일훔ᄒᆞ니라 (다음 해의 봄에 대사께서 大衆과 헤어져 寶林에 가시니 印宗이 緇ᅌᅪ 白으로 (더불어) 【緇는 중이고 白은 俗이다.】 보내는 사람이 千餘人이었다. 바로 曺溪ᅌᅦ 갔으며 그때에 荊州의 通應律師가 學者 수백인과 (함께) 대사를 의지하ᅌᅧ 住하였다. 대사께서 曺溪寶林에 가시어, 堂宇가 좁아 흡족히 대중을 收容하지 못함을 보시고 넓히고자 하여 마을사람[里人] 陣亞仙을 보고 말씀하셨다. “老僧이 檀越에 나옴은 坐具만큼의 땅을 구하고자 한 것이니 얻겠는가? 못 얻겠는가?” 陣亞仙이 이르되, “和尙의 좌구는 얼마나 넓습니까?” 祖師께서 좌구를 내어서 보이시니 진아선이 “그렇게 하겠습니다.”(라고)한즉 조사께서 좌구를 한번 펴시니 曺溪의 사방 경계를 다 둘러싸거늘, 四天王이 몸을 나타내어 四方에 앉아 누르셨다. 이제 절[寺] 경계에 天王嶺이 있느니 이것을 인하여 이름이 지어진 것이다.

【解說】⑴ ‘緇白’은 또 ‘緇素’라고도 한다. 出家衆은 通常 黑衣를 입고, 在家者는 白衣(素衣)를 입기 때문에 緇와 白(素)을 함께 써서 僧俗을 구분하였다.
‘緇’는 본래 검정색이다. 이외에도 색깔을 나타내는 글자들로, 紅(붉을 홍), 綠(초록빛 록), 紫(자줏빛 자), 素(흴 소), 絑(붉을 주), 紺(감색 감), 纁(분홍빛 훈) 등을 들 수 있는데, 이것들의 공통된 특징은 ‘糸’를 偏旁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색을 나타내는 글자가 대체로 ‘糸’를 偏旁으로 하고 있는 까닭은, 실에 물감을 들인 것에서 기인한다고 한다. 
이외에도 ‘糸’를 편방으로 쓴 글자는 대체로 실의 속성과 관련된 것이 많다. 즉 실은 가늘고 작기 때문에 細(가늘 세)라는 글자가 있고, 실은 길게 이어지는 특성이 있기 때문에 繼(이을 계), 續(이을 속), 綿(이어질 면), 孫(손자 손: 子를 이은 것이기 때문) 등이 있으며, 실로 묶기 때문에 繫(맬 계) 등이 있는 것이다.
실과 관련된 偏旁字로는 ‘糸   (/      와 幺    (*//)  ’가 있다. ‘糸’는 실의 묶음을 그린 것이라고 하고, ‘幺’는 혹자는 아이가 처음 태어날 때의 모습이라고도 하지만, 혹자는 작은 실 묶음의 모습이라고도 한다. 예를 들어 幼(어릴 유)는 미세하고 작은(幺) 힘(力)을 나타낸 글자로 本義는 ‘나이가 어리다’라는 뜻이다.
⑵ ‘湫(다할 추, 낮을 초)’는 ‘초’로 읽고 ‘낮다’라고 해석한다. 
⑶ ‘欲廣之’에서 ‘之’는 ‘堂宇’를 가리킨다. 그렇다면 ‘之’는 ‘廣’의 목적어가 된다. 사실 ‘廣’은 ‘넓다’라는 뜻의 형용사로 인식되기 때문에, 만약 그것이 형용사(자동사)라면 목적어가 올 수 없을 터인데, 이와 같이 목적어를 취하고 있으니, 그것은 자동사의 성격이 아니다. 이와 같이 자동사나 형용사로 인식되는 단어가 목적어를 취하면 대체로 ‘…를 시키다’라는 의미의 使動動詞로 해석하거나 ‘…라고 여기다’라는 의미의 意動動詞로 해석한다. 물론 예외는 있다. 가령 ‘走路’와 같은 단어에서 ‘走’는 자동사로 인식되지만 여기에서는 ‘路’라는 목적어를 취하는 他動詞라고 판단하여야 할 것이다. 비록 이와 같이 예외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동사나 형용사로 인식되는 단어가 목적어를 취하면 대체로 ‘…를 시키다’나 ‘…라고 여기다’라고 해석되어야 한다는 것은 규정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이와 같이 다른 품사로 轉成되는 것은 중국어의 특징이며, 이와 같기 때문에 중국어는 품사의 형태가 결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꼬 문장 속에서 품사가 결정된다고 하는 것이다.  
⑷ 檀越은 施主라고도 한다. 布施를 행하는 사람이다.
⑸ ‘得否’는 諺解가 “得ᄒᆞ려 몯ᄒᆞ려(얻겠는가? 못 얻겠는가?)”로 해석한 것과 같이 소위 오늘날 ‘得不得’과 같은 뜻으로 해석한다. 엄밀히 말하면 이것은 잘못이다. 왜냐하면 만약 ‘得否’을 “얻겠느냐 못 얻겠느냐?”라고 해석한다면, ‘否’은 부사이어야 하는데, 부사는 결코 이와 같이 동사나 형용사 등이 없이 홀로 쓰일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不’은 무엇일까? 오늘날은 의문어기사를 ‘嗎’를 쓰고 있으나, 당시에는 ‘嗎’가 아직 산생되지 않았으며, ‘嗎’ 대신 ‘不, 否, 摩, 未’ 등의 글자를 쓰는 문장을 찾을 수 있는데, 이것들의 공통점은 모두 脣音이다. 즉 이것은 부정을 의미하지 않고 의문의 어기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할 것이다.
⑹ ‘幾許’는 ① 代詞로 ‘얼마’ ② 代詞로 ‘약간, 얼마간, 다소.’ ③ 副詞로 ‘얼마나’ 등의 뜻이 있다.
[예문] ① 不知幾許. (얼마나 되는지 모르겠다.) 
③ 幾許可笑! (얼마나 우스운가!)
幾許不義! (얼마나 의롭지 못한가!)
⑺ 四天王: 護世四天王이라고도 한다. 欲界六天의 최하위를 차지한다. 수미산 정상의 중앙부에 있는 帝釋天을 섬기며, 佛法뿐 아니라, 불법에 귀의하는 사람들을 수호하는 호법신이다. 동쪽의 持國天王, 남쪽의 增長天王, 서쪽의 廣目天王, 북쪽의 多聞天王(毘沙門天王)을 말한다. 그 부하로는 堅手·持鬘·恒憍가 있는데, 이들은 수미산의 아래쪽에 있다. 또한 사천왕은 이들 외에도 수미산을 둘러싸고 있는 지쌍산(持雙山) 등 일곱 겹의 산맥과 태양·달 등도 지배하고 있다. 
     예로부터 한국의 사찰에서는 一柱門과 본당 사이에 천왕문을 세워, 그림으로 또는 나무로 깎아 만든 사천왕의 彫像을 모시는 것이 일반적이다. 사천왕이 지니고 있는 물건은 일정하지 않으나 주로 비파, 용과 보주, 당, 탑 등 서로 다른 지물을 들고 있다.

⑻ “盡罩曺溪四境”과 “坐鎭四方”에서 ‘盡罩’와 ‘坐鎭’은 각각 ‘曺溪四境’과 ‘四方’을 목적어로 취하고 있다. 언해의 해석을 보면 각각 “曺溪의 사방 경계를 다 둘러싸다”와 “四方에 앉아 누르셨다.”라고 해석하고 있어서, ‘盡罩’에서 ‘盡’은 부사어로 술어 ‘罩’를 꾸미고, ‘坐鎭’에서는 坐’와 ‘鎭’을 모두 動詞述語로 간주하고 있다.
‘盡罩’의 경우는 흔히 쓰이는 것이고 언해의 해석도 옳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坐鎭’의 경우는 언해와 같이 각각을 動詞로 간주하여 連動詞라고 단언할 수 없다.
흔히 ‘放下著(放下着)’을 “[집착을] 내려놓아라”라고 해석하는데, 着은 집착이 아니고, 단지 명령의 어기를 나타내는 조사일 뿐이기 때문에, 實詞인 ‘放下’만을 써서 “我放下之”라는 문장을 만들어 해석하자면 “나는 그것을 내려놓는다.”라고 해석해야 한다. 이 때 放하는(내려놓는) 사람은 ‘我’이고, 下하게 되는(내려놓아지는) 대상은 ‘之’인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만약 諺解가 “坐鎭四方”을 “四方에 앉아 누르셨다.”라고 한 것을 따른다면, 비록 ‘四方’이 직접목적어가 아니고 간접목적어(국어에서는 補語)이기는 하지만, ‘坐’한 것도 ‘鎭’한 것도 주체가 되는 四天王의 마음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坐’한 것은 행동의 주체가 되는 四天王의 마음이며, ‘鎭’한 것은 행동의 대상이 되는 四天王의 몸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에 “앉아 누르셨다.”라는 해석은 잘못된 것이다.
물론 四天王 자신의 마음이 앉고 몸이 눌려진 것이라고는 하지만, 결국 마음이든 몸이든 모두 四天王이기 때문에 “눌러앉았다”라고 해석되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동사와 동사가 결합된 連動詞가 아니고, 동사와 보어가 결합된 動補構造의 詞(단어)나 詞組(단어조합)로 보어야 하며, 결국 “행동의 主動者가 ‘坐’한 결과 행동의 受動者가 ‘鎭’한 결과에 이르렀다.”라는 의미로 해석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古代漢語(文言文)에서 現代漢語로 변화하면서 白話(어록체 문장)에서 대대적으로 생겨난 용법이기 때문에, 이와 같이 동사와 동사가 연이어 있다고 생각되는 것은 혹시 第2動詞(뒤의 동사)가 虛化되어 動補구조의 詞(詞組)가 된 것인지 확인할 필요가 있다.
【飜譯】다음 해 봄 대사께서 대중과 헤어져 寶林寺로 돌아가시니, 印宗이 緇白(출가자와 재가자)과 더불어 보낸 사람이 千餘人이었다. 곧 바로 曺溪山에 가셨는데, 그 때 荊州의 通應律師가 학인 數百 명과 함께 大師에 의지하여 머물렀다. 대사께서 曺溪山의 寶林寺에 이르러, 堂宇가 낮고 좁아 대중을 收容하기가 不足한 것을 보시고, 넓히고자 하여, 마침내 마을 사람 陳亞仙을 만나 말씀하시기를, “老僧이 檀越에게 나아가 坐具[를 깔만한] 땅을 구하고자하는데 얻을 수 있습니까?” 陳亞仙이 말하기를, “和尙의 坐具는 얼마나 넓습니까?”하므로, 조사께서 坐具를 내어 보이시니, 陳亞仙이 “그렇게 하겠습니다.”하였다. 조사께서 坐具를 한 번 펼치시니, 曺溪의 사방경계를 모조리 덮거늘 四天王이 몸을 드러내어 사방에 눌러앉았다. 지금 사찰의 경계에 天王嶺이 있으니, 이것으로 말미암아 이름을 지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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