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종 선생과 함께 가는 중국불교유적 순례 (37) - 사천성 검각(劍閣) 각원사(覺苑寺) 석씨원류 벽화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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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종 선생과 함께 가는 중국불교유적 순례 (37) - 사천성 검각(劍閣) 각원사(覺苑寺) 석씨원류 벽화 (5)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21.08.24 1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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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1) 6년 고행 중에 두 명의 선인을 조복시키는 장면인 조복이선, 석씨원류 성화본
(사진 1) 6년 고행 중에 두 명의 선인을 조복시키는 장면인 조복이선, 석씨원류 성화본

 

석씨원류의 편찬자 보성(寶成)은 어떤 사람인가?

 『석씨원류』가 중국은 물론 우리나라와 일본의 불전도의 발전에 큰 영향이 있는 책임에도 불구하고 그 책의 편찬자 보성에 대해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그가 편찬한 『석씨원류』와 『석씨요람』에 실린 그의 발문 등을 통해 유추할 수 있을 뿐이다. 
 먼저 『석씨요람』 발문에는 책을 간행한 선덕(宣德) 8년(1433)이 그가 출가한 지 40년쯤 되었고, 어린 나이에 출가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를 통해 보면 그는 1390년 조금 지나 출가했음을 추정할 수 있다. 그가 출가할 당시는 주원장이 원나라를 몰아내고 한족 왕조인 명나라를 건국한 후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공신들을 숙청하던 시기로 정국이 혼란했던 때였다. 이런 혼란기에 백성들은 먹고사는 일이 쉽지 않았다. 가족의 입장에서는 입을 덜고, 보성 개인적으로는 먹고 사는 걱정을 않기 위해 어린 나이에 출가했을 것이다. 어린 나이를 10세 전후로 보면 그가 태어난 때는 주원장의 치세인 홍무(洪武)년간(1368-1398) 중반인 1380년 전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의 청장년기는 남경에서 주로 활동하였다. 『석씨원류』를 간행한 홍희(洪熙)원년(1425)과 정통(正統)원년(1436)에 보성은 황실사원이라 할 수 있는 대보은사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 기간 중에 『석씨원류』와 『석씨요람』을 간행하였다. 당시 그의 신분은 책의 발문에 적힌 ‘견밀실비구(堅密室比丘)’였다. 1436년에 간행된 『석씨원류』 정통본에도 자신의 신분을 ‘견밀실사문’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견밀실이 정확히 어떤 곳이었는지 알 수 없으나 대보은사가 남전 대장경을 소장하고 있던 곳임을 감안하면,      ‘밀실’이란 용어가 대장경 등을 보관하는 장경각 같은 곳으로 여겨진다. 『석씨원류』의 여러 장면에 인용된 많은 수의 경전을 감안하면 견밀실은 여러 경전을 쉽게 참고할 수 있는 도서관 역할을 하는 곳이 적격이다.   
 한편 하효영(何孝榮)이 쓴 『명대남경사원연구(明代南京寺院硏究)』(고궁출판사, 2013)에는 명나라 때 기록에 나타난 사원에서 생활하는 승려들의 직급을 20종으로 분류하고, 그들의 급여까지 밝혔는데, 대보은사에는 20종 중 마지막의 율승(律僧)을 제외한 19개 직급이 있었다. 이 19종의 직급에 ‘견밀실’이란 명칭은 없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견밀실비구’는 말 그대로 견밀실을 책임지는, 또는 견밀실 소속의 승려라는 의미로 볼 수 있다. 19종의 직급에 비추어 보면 이러한 의미로는 작은 전각을 담당하는 당사승(堂司僧, 12번째, 급여 미3석5두)이거나, 견밀실에서 공부하는 학승(學僧, 18번째, 급여 미3석5두)일 가능성이 있다. 실제로 8번째 관사승부터 20번째까지는 급여 차이가 없는 것으로 보아 사원에서 중요한 소임을 맡은 상위 7번째까지 직급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역할의 차이지 신분의 차이는 아닌 것 같다. 어쨌든 보성은 특별한 직책을 갖지 않은 일반 승려였거나 여러 서적을 두루 섭렵하며 공부하던 학승이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다만 그가 대보은사에서 주로 머물던 곳이 견밀실이었다.   
 선덕원년은 전대 홍희제(洪熙帝)가 재위 1년 만에 죽고 선덕제(宣德帝)가 1425년에 황위를 물려받아 맞은 첫 해이다. 『석씨요람』의 발문에서 보성은 ‘선덕원년이래 황제로부터 큰 은혜를 입어 처음 출가한 승려들을 제도하기 위해 이 책을 간행한다’고 했다. 이를 통해 다음과 같은 가능성을 추정해 볼 수 있다. 대보은사가 황실사원이다 보니 1425년에 보성이 간행한 『석씨원류』가 황실에 전해졌고, 황실로부터 이에 대한 치하를 받았고, 황실로부터 받은 치하는 보성 개인적으로는 큰 영광이었으므로 그 은총을 갚기 위해 새 책을 간행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게다가 영락제 때부터 계속 강화된 도첩제에 대해 황실에서 드는 원인 중 하나가 승려들이 불교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이런 상황으로 미루어 보면 당시 승려가 되려는 이유에는 불교를 공부하려는 이들보다 안정된 생활을 위해 택하는 이들이 많았고, 불교에 대한 지식도 그다지 좋지 않았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러한 사람들에게 불교를 알기 쉽게 풀이한 책은 긴요한 길잡이가 되었을 것이고, 수요가 많은 베스트셀러였을 것이다. 어쩌면 기록으로 확인되지는 않지만 황실의 요구로 만들어진 것일 가능성도 없지 않다. 
  보성이 살던 당시에 책을 만들려면 책의 내용을 쓴 사람, 그것을 좋은 서체로 옮겨 쓰는 사람, 마지막에 그 글을 나무판에 새기는 사람이 필요하다. 즉 한 권의 책이 만들어지는 데는 최소한 이러한 작업이 분업되어야 한다. 『석씨요람』의 발문을 통해 보성과 분업한 동업자에 대한 정보를 확인할 수 있다. 『석씨요람』의 내용은 보성이 경전에서 발췌하여 썼고, 그것을 옮겨 쓴 이는 고도진(顧道珍)이란 사람이다. 이 사람의 생애에 대해 알려진 바는 없으나 보성과 함께 이전부터 편찬 작업을 했던 동업자이다. 그는 1425년 간행된 영락본 『석씨원류』의 112,000여 자에 달하는 글을 썼고, 『석씨요람』이 간행된 3년 뒤에 만들어진 정통본(1436) 편찬에도 함께 작업했다. 그리고 언제 제작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하버드대학교 엔칭도서관에 있는 『교계신학비구행호율의(敎誡新學比丘行護律儀)』도 보성과 고도진 두 사람이 합작하여 간행하였다. 이러한 사실로 보면 고도진은 보성에게 가장 중요한 조력자 중 한 명이었음을 알 수 있다. 『석씨요람』의 발문에서 보성이 고도진을  ‘동지(同志)’라고 표현한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 비롯되었으며, 연배는 비슷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석씨원류』에 400여 항목이 넘는 판화가 그려졌는데, 그 그림을 그린 화가 중 이름이 알려진 사람은 왕공(王恭)이 유일하다. 정통본(1436)과 가정본에 실린 보성의 발문 말미에 ‘글은 고도진이 쓰고, 그림은 왕공이 그렸다’는 내용이 간략하게 언급되었다. 『석씨원류』의 수많은 판화를 그린 화가 왕공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안타깝게도 그의 다른 그림이 남아있지 않고, 기록도 거의 전하지 않는 실정으로 미루어 보면 왕공은 당대 유명한 화가라기보다는 남경 지역에서 활약했던 지역 화가였을 가능성이 많다. 다행히 『황명서화사(皇明書畵史)』와 『명화록(明畵錄)』에 그에 대한 단서가 남아있어서 단편적으로나마 그에 대한 정보를 파악할 수 있다. 즉 왕공은 마하파 화풍을 따랐다는 점과 출신지가 오늘날 항주라는 것이다. 항주가 절강성의 성도로 명나라 초기 유행한 화풍 중 하나인 절파화가들이 주로 활동했던 지역이다. 게다가 절파의 대표적인 화가인 대진(戴進, 1388-1462)이 영락년간에 보성과 왕공이 머문 대보은사가 중창될 때 벽화를 그렸다는 기록이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보성과 함께 작업한 왕공이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절파 화풍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많다. 한 예로 판화 〈조복이선(調伏二僊), 사진 1〉에는 근경, 중경, 원경을 구분하고 근경에는 바위를 배치하는 전통적인 방식을 따르고 있다. 원경의 산을 한쪽에 치우친 구도인 변각구도로 배치하고, 더 멀리 있는 산은 실루엣으로 처리하였는데, 마하파의 특징이다. 그림 우측에 그려진 번개모양으로 꺾이는 소나무 가지 모습과 바위 표현에서는 절파적 요소도 간취된다.    
 보성의 언제 사망했고, 정통본 『석씨원류』가 제작된 1436년 이후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았다. 따라서 향후 그가 간행한 다른 자료와 서문, 발문 등에 대한 지속적인 발굴이 필요하고, 그것을 통해 알려지지 않은 보성의 생애가 좀 더 규명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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