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상 에세이 - 수심修心에는 왕도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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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 에세이 - 수심修心에는 왕도가 없다
  • 유현
  • 승인 2021.10.19 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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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현
유현

제주의 가을풍광 가운데서 첫손을 꼽으라면 구좌읍 송당리 오름 능선을 따라 흐드러지게 핀 억새들의 군무가 아닌가 싶다. 
억새가 갈바람에 무리 지어 흔들린다. 청명한 가을하늘 아래에서 은빛을 빤짝이며 간당거리는 억새꽃을 보노라면 내 마음도 왠지 하늘거리며 처량해진다.   
왜 그럴까? 억새의 모습에서 생긴 것도 아니고, 갈바람에 의해서 생긴 것도 아니고 그 사이에서 생긴 것도 아님에도 말이다. 
육조 혜능 스님이 서기 676년 중국 남해의 법성사에 머물 때의 일화이다. 바람이 불어 절의 깃발이 펄럭이는 것을 보고 두 스님이 서로 입씨름하고 있었다. 한 스님은 ‘깃발이 움직인다.’고 하고, 다른 스님은 ‘바람이 움직인다.’고 하면서 서로 우기기만 할 뿐 뜻을 모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혜능이 나서서 이렇게 말했다. “바람이 움직인 것도 아니며 깃발이 움직인 것도 아니다. 두 사람의 마음이 움직였을 뿐이다.” 
원효 스님이 당나라 유학길에 어느 동굴에서 잠을 자다가 어둠 속에서 물을 마시고 갈증을 해소하였는데, 아침에 깨어보니 자신이 마신 물그릇이 해골바가지임을 알고 속이 울렁거리고 구역질이 났다. 이 순간 원효는 “마음이 일어나므로 갖가지 현상들이 일어난다[心生故 種種法生].”라는 큰 깨달음을 얻고, 발길을 돌렸다.
원효 대사는 “마음 바깥에 일체법이 없는데 무엇을 밖에서 구할 것이 있겠는가[心外無法 胡用別求].”라고 그 자신에게 일갈한다.  
수행은 마음이 하는 일이다. 불교는 마음의 종교라 말하지만 사실은 잘 모르는 게 마음이다. 마음의 일어남은 연이생緣已生이다. 이를 인연소생법이라 부른다. 그 마음의 행로가 삶의 현장에서 오락가락한다. 
마음의 고삐를 잡기 위해 좀 더 쉬운 길, 확실한 길, 빨리 가는 길을 찾아 여기저기 기웃거렸다. 초기경전에서 염화시중拈華示衆을 찾아봐도 구하지 못하였다. 
돈오頓悟의 신화에 기울어져 간화선에 관심을 가진 적도 있었다. ‘돈오’란 깨달음의 혁명적 성격을 부각한 말로서 단박에 깨닫는다는 뜻을 함축한다. 깨닫기의 시차와 단계를 두고 우리 불교에서 돈오돈수와 돈오점수의 논쟁이 첨예하게 불붙었던 적이 있기도 하다.
지혜가 없으면 번뇌의 마음인 탐심·진심·치심에 가려서 세상을 있는 그대로 여실히 볼 수가 없다. 자아[我, atta], 중생(satta), 영혼[壽者, jivā] 등이 실재한다는 상(相, saňňā)을 세우고 반평생을 살았으니 그럴 만도 하다.  
이런 상相과 견見은 여실지견如實知見의 걸림돌이다. 수행해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마음 닦겠다면서 객진번뇌에 오염돼 바깥으로만 떠돌며 보낸 지난 세월의 덧없음이 불현듯 내 가슴을 때렸다. 
노년에 이르러 사성제와 팔정도와의 만남은 내 인생의 최대 선물이다. 속옷에 묻어 있던 케케묵은 때가 정견의 세제洗劑로 미세한 똥냄새까지 제거되면서 갓 삶아 말려 놓은 빨래처럼 때 묻지 않는 빳빳한 마음을 낼 수 있어서이다. 
유위제법有爲諸法은 원인을 조건하여 생긴다. 인연 따라 생긴 법은 실재하는 것이 아니다. 억새의 향연을 보고 일어난 마음도 이와 같다. 지금·여기 내 안에서 법들과 함께 일어난 마음을 해체하고 분석하여 직관할 때 번뇌를 부술 수 있는 지혜의 힘이 점진적으로 강력해지는 것이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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