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교육박물관 ‘한국 불교미술과 제주불교’ 강좌 <3> - 제주불교와 항일운동(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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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교육박물관 ‘한국 불교미술과 제주불교’ 강좌 <3> - 제주불교와 항일운동(中)
  • 강석훈 기자
  • 승인 2006.08.24 1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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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교육박물관이 주최한 ‘한국의 불교미술과 제주의 불교’ 한금순 연구원(제주불교사연구회)의 ‘제주불교와 항일운동’ 강의 내용 중 지난 호에 이어 법정사 항쟁의 주요 인물과 배경 등을 요약 정리해 싣는다. 다음 호에서는 법정사 항일운동의 조직·전개와 결과, 항일운동 이후 항일활동 등을 게재한다.

“법정사 항일운동, 불교계 주도한 국권회복운동”

‘국권회복’ 분명히 선언…승려신분 특성과 불교포교 목적도 드러내

일제, 주민 700여명 참여와 거사목적 등 독립운동 의미 축소시켜

   
 
   
 
# 법정사 주요 인물

법정사는 1911년 승려 안봉려관이 창건했다. 창건에는 김석윤과 방동화의 도움이 적지 않았다. 1908년 안봉려관이 관음사를 창건하면서 제주불교는 활동 기반을 마련하게 됐고 이후 안봉려관은 제주도 각처에 사찰을 창건해나갔다.

법정사는 이러한 맥락 속에서 한라산 남쪽지역을 포교하기 위한 사찰로 지어졌다. 안봉려관의 관음사 창건은 불교 활동의 구체화를 의미하는 것으로 억불의 시대를 깨고 제주불교의 근대시대를 열었다는 의의가 있다. 관음사에 이은 법정사 창건으로 제주불교는 왕성한 활동을 예고한다. 법정사는 창건부터 제주불교의 흐름 속에 자리하고 있다.

법정사 관련 주요 승려는 강창규·김석윤·방동화가 있다. 이들의 항일의식은 법정사의 성격을 결정짓는 주요 요인이 됐다.

강창규는 1892년 20세에, 2년 뒤 1894년에는 17세인 김석윤이 전라북도 위봉사에서 박만하의 제자로 출가했다. 방동화는 관음사에서 만난 강창규에게 감화를 받아 1913년 26세 나이로 경상북도 경주 기림사에서 출가했는데 기림사에서 같이 생활하던 승려 김연일과 다른 승려들을 제주도로 끌어들이는 매개가 됐다.

법정사 항일운동의 주도세력은 강창규와 방동화, 이들과의 인연으로 얽혀있는 김연일 중심의 기림사 승려들로 구성돼 있다.

김연일은 법정사 주지로 이들 주도세력간 관계의 중심이 된다.

김연일은 1914년경부터 법정사에 거주했고 육지부에서 내려온 승려들은 김연일과 강민수·정구용·김인수·김용충·장임호 등 6명으로 법정사에 함께 거주했다. 박주석과 최태유는 법정사에 거주하지 않았지만 법정사 항일운동에 주도세력으로 참여한 인물이다.

박주석은 「수형인 명부」에 진도군 동면 상리를 주소로 하고 있으나 실제로는 경상북도 안동 사람이다. 유족 이태수의 구술 증언에 의하면 박주석은 안동에서의 의병활동 전력 때문에 제주도로 도피해 왔으며 거짓 주소를 말한 연유도 이러한 전력을 숨기기 위한 것이었고 의병활동 행적과 연관돼 가혹한 고문을 받았기 때문에 옥사한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이에 대한 연구는 더 이뤄져야 하겠지만 유족 이태수는 어머니로부터 문태수 장군에 대한 얘기와 박주석이 금강산 사찰에서 병법을 익혔다는 얘기를 듣고 자랐는데 문태수는 호남의병단의 의병대장으로 금강산에서 박처사에게 병서를 받아 의병활동을 한 인물이다.

최태유의 출생지 주소도 거짓이다. 최태유는 선봉집사라는 직위에서 강창규를 도와 역할을 했다는 점과 1937년 위봉사 제주도 성산포 포교당을 창건하는 점 등으로 미뤄 강창규와 위봉사에서의 인연으로 내려왔을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이들이 거짓 주소를 말해야만 했던 이유는 당시 다른 항일운동 혹은 의병활동과의 연관 가능성을 시사하는 것일 수도 있어 앞으로 더 연구돼야 할 부분이다.

#법정사 항일운동 배경

법정사 항일운동은 국권회복이라는 목적을 분명히 선언했다. 여기에 승려라고 하는 주도세력의 신분 특성을 나타내 불교 포교라는 목적도 함께 드러냈다.

   
 
  법정사 항일운동이 불교계 주도로 주민들이 참여한 국권회복운동이었음이 속속 밝혀지고 있다. 사진은 법정사지 전경.  
 


1923년 자료인 「정구용 판결문」은 “제국정부의 통치에 반대하는 기세를 보여주고자 … 조선을 잘 통치해서 원래의 독립국으로 만드는 데 진력하기로 했음으로 … 지금부터 조선정치를 바꾸려고 하는데 우선 그 수단으로 내지인 관리를 이 섬에서 추방하지 않으면 안 된다 … 도내에서 일본인을 쫓아내 원래의 한국시대로 회복할 것이니 조력하시오”라는 등으로 거사를 일으키는 목적이 독립에 있음을 분명히 나타내고 있다.

「강창규 가출옥 관계 서류」에는 강창규가 범죄를 저지른 이유가 “한일병합의 이치를 납득하지 못했기 때문 … 김연일이 일본인을 쫓아내고 선정을 펴기 위해 거사를 일으켰다”고 표현하고 있다.

또한 일제 고등경찰의 극비문서인 「폭도사 편집자료 고등경찰요사」에서도 “이전부터 계속하여 반일사상을 고취시키고 있었다”고 하고 목적은 ‘국권회복’이었다고 했다. 이들 문서들은 모두 일제 당국이 기록해 낸 것들이다. 이렇게 일제도 법정사 항일운동의 목적이 국권을 회복하고자 하는 데 있었음을 인정하고 있다.

주도세력이나 참여 주민들은 당시 외세의 폐해를 인식하고 항일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김연일은 일시적인 억압에 항의하는 거사를 의도했던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독립운동의 목적을 가지고 제주도로 왔다는 점에서 법정사 항일운동 주도세력의 성격을 다시 한번 새롭게 주목해야할 필요가 있다. 법정사 활동 이전부터 김석윤 등과 항일의식을 공유했던 강창규와 방동화는 제주도에서부터 독립운동의 기운을 끌어가겠다는 목적에 동의한 김연일로 대표되는 기림사 승려들을 제주도로 끌어들였던 것이다.

인근 마을의 700여 명 참여자들 또한 외세에 대한 인식과 항일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제주도의 사회 상황에서 그 배경을 찾아볼 수 있다.

제주도민들의 외세에 대한 의식 정도는 1898년 방성칠 난과 1901년 이재수의 난, 그리고 1909년 제주의병항쟁 등에서 이미 증명된 바이다. 제주도민은 이렇게 외세의 횡포에 대항해 뜻을 모았던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흐름으로 미뤄 1918년 경 제주도민들은 일제의 행정 장악과 경제적 수탈에 의한 피해를 직접적으로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항일운동이라는 취지에 동조한 것이라 할 수 있다.

# 일제의 의도된 항일운동 폄하

그러나 일제당국은 법정사 항일운동이 발발한 해로부터 멀어져갈수록 점차 독립운동이 목적이 아니라 사교도들의 불만의 표시였다고 의도적으로 폄하했다. 법정사 항일운동의 개요를 설명하고 있는 자료들을 연대순으로 비교 검토하면 법정사 항일운동에 대한 일제의 시각이 의도적으로 바뀌고 있음이 드러난다.

1918년 법정사 항일운동은 1920년 4월 12일 「매일신보」에 처음 기사화 됐는데 김연일이 ‘700명’을 거느리고 소요를 일으켰다는 내용을 싣고 있다. 1923년 「매일신보」 2월 20일자는 강창규 체포소식을 기사화하며 참여자들은 ‘400명’의 대폭동단이라고 표현했다. 다음으로 1923년 6월 29일 자료인 「정구용 판결문」에서는 ‘300∼400명’으로, 1934년 「폭도사 편집자료 고등경찰요사」에는 ‘약 400명’으로 표현됐다. 20년 뒤인 1938년 8월 13일자 「매일신보」에 와서는 ‘약 300명’으로 표현됐다.

거사 목적에 대한 표현도 시대에 따라 달리 묘사된다. 같은 자료 순서대로 요약하면 처음에는 ‘불무황제 김연일’이라고만 표현했다. 이어 “승려 여러 명과 부근의 주민 수십 명이 단결한 후에 일본인 관리를 체포한 후 독립을 계획할 터인데”, “제국정부의 조선통치에 대해 불평을 품어, 제국정부의 통치에 반대하는 기세를 보여주고자”, “한일합병의 이치를 납득하지 못했기 때문”, “언제나 교도에 대하여 반일사상을 고취시켰으며 국권회복을 위해 일본인을 쫓아내야 한다”, 그리고 “선도교에 대한 경찰의 단속이 엄중해서 일을 꾸몄다”고 표현했다.

그러나 20년이 지난 1938년 「매일신보」는 무극대도교 사건을 보도하면서 1918년의 김연일을 인용해 제주도의 종교상황을 묘사하고 있다. “제주도는 원래 미신사파가 많은 곳인데 1918년에 김연일이 사교도를 규합하여 제주도 대정면 산방산에서 불무황제 즉위식을 거행하고 300명의 민중을 선동하였다”고 했다. 그러나 장소도 잘못 인용하고 있다.

일제는 수많은 종교단체를 관리 감독하는 일환으로 1936년 유사종교해체령을 내려 종교 활동을 관리 통제하기에 이른다. 1938년 기사는 이 해체령의 실천 기간 중 나온 것으로 무극대도교의 항일활동 의미를 축소함은 물론 법정사 항일운동의 의미도 폄하하려는 시각을 분명히 드러내고 있다.

1920년 700명 참여에서 1938년 300명의 참여로, 독립운동을 위한 목적이 사교도의 민중 선동 사건으로 시각이 바뀜으로써 법정사 항일운동이 일어났던 시기로부터 멀어질수록 점차 독립운동의 의미를 희석시키려 하는 일제의 의도가 드러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조작된 법정사 항일운동의 성격은 이후 ‘보천교의 난’으로 폄하된 채 지속돼 왔던 것이다.

법정사 항일운동은 외세의 횡포에 대해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던 주민들과 주도세력들의 항일의지가 만들어낸 항일운동이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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