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종 선생과 함께 가는 중국불교유적 순례 (40) - 사천성 검각(劍閣) 각원사(覺苑寺) 석씨원류 벽화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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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종 선생과 함께 가는 중국불교유적 순례 (40) - 사천성 검각(劍閣) 각원사(覺苑寺) 석씨원류 벽화 (8)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21.11.09 1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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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1) 태자의 뛰어난 무예 실력을 보여주는 제왕각력 장면
(사진 1) 태자의 뛰어난 무예 실력을 보여주는 제왕각력 장면

각원사 대웅보전의 석씨원류 벽화는 동벽, 서벽, 북벽에 각각 네 칸과 남벽 양쪽 끝 한 칸에 그려졌다. 벽화가 그려진 벽은 모두 열네 칸으로 입구로 들어가 오른쪽인 남동벽에서 시작하여 시계 반대 방향으로 돌아 남서벽에서 끝난다. 지난 호에 살펴본 첫 번째 벽인 남동벽에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전생 인연담과 인간 세상에 나투기 전 도솔천에 태어난 이야기, 석가 씨족에 대한 이야기인 〈구담귀성(瞿曇貴姓)〉이 그려졌다. 이번에 볼 두 번째 칸인 동벽 첫째 칸에는 총 15장면의 불전도가 그려졌다. 벽화는 세 단으로 구성되었는데 각 단에는 위에서 아래로 5장면씩이 묘사되었다. 첫째 단에는 정반왕궁에서 마야부인이 태몽을 꾼 후 산달이 되어 룸비니원에서 거닐다 싯다르타 태자를 낳고 궁으로 돌아와 선인으로부터 점상을 받을 때까지의 이야기로 각 장면의 화제는 〈정반성왕(淨飯聖王)〉, 〈마야탁몽(摩耶託夢)〉, 〈수하탄생(樹下誕生)〉, 〈종원환성(從園還城)〉, 〈선인점상(仙人占相)〉이다. 두 번째 단에는 태자의 탄생을 축복하기 위해 나라의 죄인들을 풀어주는 〈대사수복(大赦修福)〉, 태자가 탄생한 지 7일 만에 돌아간 마야부인을 대신하여 이모가 양육했다는 〈이모양육(姨母養育)〉, 태자가 내내 길하기를 기원하기 위해 천묘에 배알하는 〈왕알천사(往謁天祠)〉, 태자가 어느 정도 자라자 또래 아이들과 공원에서 즐겁게 노는 〈원림희희(園林嬉戲)〉, 태자의 나이가 여덟 살이 되자 뛰어난 스승으로부터 글을 익히고 산수를 배우는 〈습학서수(習學書數)〉가 표현되었다. 세 번째 줄 맨 위에는 〈강연무예(講演武藝)〉 장면이 그려졌는데, 이는 신하들 중 가장 뛰어난 무장으로 하여금 태자에게 무예를 가르치게 했는데 무장의 시범을 한번 보고는 모두 통달하여 무예를 자유자재로 구사해 무장이 감탄하는 장면이다. 말 그대로 태자는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아는 문일지십의 천재였다는 이야기이다. 그 아래는 정수리에 물을 붓는 관정식을 통해 싯다르타를 가비라위국(伽毘羅衛國)의 태자로 세우는 〈태자관정(太子灌頂)〉이고, 다음은 신하들과 더불어 마을을 돌아보다 농부들이 땅을 갈아엎는데 땅속에서 벌레가 딸려 나오자 새들이 쏜살같이 내려야 잡아먹는 것을 보고 이 세상이 고통과 끊임없는 불안에 가득함을 알고 나무 아래서 깊은 선정에 드는 〈유관농무(遊觀農務)〉이다. 그 아래는 석가 종족의 아이들 중 누구의 무예 실력이 가장 뛰어난지 겨루는 장면으로 태자가 활을 쏘아 일곱 개의 무쇠 북과 무쇠 돼지를 꿰뚫고, 시기심이 많은 사촌 제바달다(提婆達多)가 코끼리 시체로 성문을 막아버리자 태자가 그 코끼리를 왼손으로 들어 올려 성 밖으로 집어던져 떨어진 곳에 큰 구덩이가 생겼다는 척상성갱(擲象成坑)의 이야기를 그린 〈제왕각력(諸王捔力)〉 장면(사진 1)이다. 이 두 번째 벽에 그려진 벽화의 마지막 장면은 〈실달납비(悉達納妃)〉이다. 태자의 나이가 장성하자 정반왕이 대신들을 모아 놓고 태자비를 간택하여 혼인시키는 게 어떠하겠냐고 하자 한 대신이 석가 종족 중 한 바라문 가문의 딸인 야수다라(耶輸多羅)가 어질고 총명하여 태자비로 삼을 만하다고 추천하자 사람을 보내 됨됨이를 살펴보게 한 후 청혼하고 길한 날을 잡아 태자와 혼인하는 장면이다. 『과거현재인과경』에는 야수다라와 혼인 후 태자는 구이(瞿夷)와 녹야(鹿野)라는 두 명의 비를 더 맞이하고 여러 채녀들과 함께 즐겁게 지냈다고 전한다. 태자비가 세 명이었기 때문에 함께 머물 전각인 삼시전(三時殿)을 짓고 항상 같이 생활하였으나 태자는 세속에는 뜻이 없고 고요한 밤중에는 선정에 들곤 하였다.

(사진 2) 통도사 팔상도 중 두 번째 장면인 비람강생상
(사진 2) 통도사 팔상도 중 두 번째 장면인 비람강생상
(사진 3) 석씨원류 수하탄생 판화
(사진 3) 석씨원류 수하탄생 판화
(사진 4) 각원사 수하탄생 장면 벽화
(사진 4) 각원사 수하탄생 장면 벽화

 이렇게 동벽 첫 번째 칸에는 석가모니의 탄생에서 유년기를 거쳐 혼인까지 이르는 시기의 이야기가 그려졌다. 각원사의 이 두 번째 벽의 벽화와 석가모니의 전기를 그린 조선시대 팔상도와 비교해 보면 두 번째 벽의 벽화 15장면은 팔상도의 첫 번째 장면인 〈도솔래의상(兜率來儀相)〉의 일부와 두 번째 〈비람강생상(毘藍降生相)〉, 세 번째 〈사문유관상(四門遊觀相)〉의 일부 장면에 해당한다. 15장면 중 〈이모양육〉, 〈습학서수〉, 〈제왕각력〉, 〈실달납비〉 같은 장면은 천은사 팔상도(1715년)에서만 그려졌고, 대부분의 팔상도에서는 그 장면은 빼고 주로 〈마야탁몽〉, 〈수하탄생〉, 〈종원환성〉, 〈선인점상〉을 중심으로 그린다. 1775년에 제작된 통도사 〈비람강생상〉(보물 1041호, 사진 2)에도 태자의 룸비니원에서의 탄생과 그 직후 일어난 ‘천상천하유아독존 삼계개고아당안지’라는 사자후를 토하며 일곱 걸음을 걷는 ‘행칠보’, 아홉 마리의 용이 물을 뿜어 씻는 ‘구룡관정’ 등의 신비로운 일들과 함께 〈종원환성〉, 〈선인점상〉이 아래쪽에 묘사되었다. 화면의 상단 중앙에는 마야부인이 오른손으로 나뭇가지를 잡자 부인의 오른쪽 옆구리에서 태자가 탄생하는 장면이 그려졌다. 마야부인은 주변의 다른 인물들보다 더 크고 화려하게 표현되었다. 석씨원류의 판화(사진 3)나 각원사 벽화 장면(사진 4)과 비교하여 보면, 모습은 크게 다르지 않지만 주변 인물들의 모습이나 수는 조금 다르다. 참고한 본을 따라 그림이 그려졌지만 시대나 지역, 그리는 화가의 기량에 따라 조금이 차이가 난다. 

(사진 5) 태자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해 대사면령을 내리는 각원사 대사수복 벽화 (2)
(사진 5) 태자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해 대사면령을 내리는 각원사 대사수복 벽화 (2)

각원사 벽화가 중국에 전하는 여러 종류의 석씨원류 판화본 중 어떤 본을 참고해 그렸는지 유추할 수 있는 단서를 〈대사수복〉(사진 5) 장면이 제공해 준다. 이 장면은 태어난 태자에게 복을 주기 위해 성 안의 모든 거리에서 먹을 것과 생필품을 나눠주고 수천 명의 바라문을 초청해 잔치를 베풀고, 사면령을 내려 죄인을 방면함을 물론 동물들까지 방생하는 장면이다. 우리나라 팔상도는 물론 우리나라에 전해진 석씨원류의 판본 중 하나인 불암사본의 모본이 된 성화본(1486년)에는 그려지지 않는 장면이다. 중국에서는 정통본(1434-1436년)과 대흥륭사본(1486-1535년)에 등장하며 대흥륭사본을 모본으로 한 우리나라 선운사판에도 등장한다. 궁을 상징하는 전각 중앙에 정반왕이 앉아있고, 그 주변에 대신들이 서 있고 마당에는 바라문으로 보이는 9명의 인물이 축수하는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원래 상황이야 훨씬 화려하고 장엄했겠지만 간략하게 그리는 판화의 특징 상 표현이 제한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청나라 때인 1808년에 간행된 가경본의 〈대사수복〉 장면(사진 6)은 좀 더 사실적으로 그려져서 이와 비교해 볼 수 있다. 19세기 초에 그려진 가경본 판화는 높은 곳에서 내려 보는 방식의 부감법을 사용하여 그려서 명대 판화와는 스케일이 다르다. 넓은 궁궐 안팎에 관리 및 궁인에 둘러싸여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아 태자의 탄생을 축수하는 바라문, 혹은 사면 받은 죄인들을 가득히 묘사하였다. 원근법이 가미되어 더 사실적으로 보인다. 각원사 벽화는 한정된 공간에 그려야 했기 때문에 표현이 제한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계속)

(사진 6) 청나라 때 제작된 가경본 석씨원류의 대사수복 장면
(사진 6) 청나라 때 제작된 가경본 석씨원류의 대사수복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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