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불교가 만난 사람 - 대한불교 법화종 정혜사 주지 관행스님 - “일찍 들어왔다고 빠른 것 아니고, 늦게 들어왔다고 늦은 것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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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불교가 만난 사람 - 대한불교 법화종 정혜사 주지 관행스님 - “일찍 들어왔다고 빠른 것 아니고, 늦게 들어왔다고 늦은 것 아니다”
  • 김익수 대기자
  • 승인 2021.11.23 01:5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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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혜사 주지 관행 스님
정혜사 주지 관행 스님

한 잎도 남김없이 가지는 비웠다. 하지만, 잎 없는 가지에는 붉게 달아오른 감이 가치 밥으로 남겨두고 있다. 도심 속의 호젓한 숲길처럼 작은 올레길은 적막이 흐르는 느낌이다. 청정한 자연 속에서 지친 몸과 마음을 내려놓고 싶은 곳, 바로 법화도량인 정혜사가 시선을 강타한다.
마을 따라 길 따라 만나는 사찰, 오늘은 대한불교 법화종 정혜사(주지 관행 스님)를 만나본다.
조금 전까지 외출하고 돌아왔다는 주지 관행 스님이 반갑게 맞아주신다.

▶스님. 늦은 가을인데도 사찰 경내의 잔디밭은 계절의 감각을 잊은 듯, 파아란 모습으로 찾아오시는 분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줍니다.
▷예. 보살님들이 손과 손이 모아져 정성스럽게 잔디밭을 잘 가꾸어서 그런 것 같습니다. 꽤나 면적이 넓은데도 손길에서 소홀함이 없이 관리를 잘 하고 있어서 잡풀이 없는 것 같습니다.

▶사찰 주변은 감귤과수원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사찰 모습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만, 정혜사가 이곳에 창건한 내력에 대해서 먼저 말씀을 해주셨으면 합니다.
▷예. 정혜사가 처음부터 창건한 것은 이곳이 아니라, 구도심 서사라 지역에 사찰을 두고 있었지요.
정혜사는 故 혜관 스님(서귀포시 보목동 前 혜관정사 주지)이 제주 도심에 법화사상을 홍포하기 위해 창건하게 됩니다.
혜관 스님은 제주불교의 원로이신 故 원문상 스님의 속가 인연으로는 친동생이 됩니다. 원문상 스님은 일제 강점기와 해방 공간에서 활동하며 제주불교 발전에 많은 기여를 하게 되었습니다. 해방 직후에는 왜색불교 청산을 주창하며, 제주불교혁신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끌었지만, 한국전쟁 직후 예비 검속으로 억울하게 희생당했습니다. 
그래서 혜관 스님은 원문상 스님의 유품을 정리하던 중 원문상 스님이 1940년 후반부터 일기 시작한 법화종단 창종에 기여했던 것으로 보고 있답니다.
그후 1956년 ‘대한불교 법화종’ 이 창종 되자 혜관 스님은 원문상 스님의 뜻을 잇고자 제주에 법화종지를 전파하는데 노력한 것이 그 씨앗이 정혜사로 보시면 되겠습니다. 

▶서귀포시 하원동 법화사가 법화경 전법이 시초이자 요람이라고 보고 있는 가운데,  그 당시 제주도내는 사찰과 암자가 500곳이나 되었다고 하니, 제주불교가 찬연한 꽃을 피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만, 정혜사의 창건과정에 대한 말씀을 들었으면 합니다.
▷예. 정혜사는 지난 1969년 김봉희, 양복순 창건 화주의 도움으로 제주시 삼도1동에 창건해 법화사상을 펴왔습니다. 그러나 부지를 시주했던 서사라 지역이 개발되면서 땅값이 오르자 명의이전을 해주지 않는 등 우여곡절을 겪기도 했답니다. 이후 1980년 혜관 스님과 신도들이 힘을 모아 부지를 매입하고 정식으로 사찰 등록을 하게 되죠.

▶그러면 관행 스님께서는 언제 정혜사로 오게 되었습니까.
▷예. 저는 속계를 벗어나 공부하러 통도사를 잠시 거쳐 1981년 송광사에 입문하게 됩니다. 송광사에서 3년 동안 유학하고 나서 황학산 대구 직지사에서 2년 동안 수학하다가 1988년에 이곳 정혜사로 들어오게 됩니다. 

▶이곳에서 불사를 하는데, 스님은 물론이고 불자들도 마음고생이 많았다면서요. 그 당시에 어떤 어려움이 있었습니까. 
▷예. 일은 벌려놓고 이를 마무리 하려니 마음고생은 당연했습니다.
그러니까 불사를 하는데, 바로 1997년에 IMF를 맞게 돼, 젊은 혈기만으로는 불사하는데, 역부족임을 절실히 느꼈습니다. 자금동원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앞이 캄캄했었죠. 이러한 가운데 불자들의 큰 원력으로 불사를 마무리 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불사를 통해 정혜사는 법화불자들의 성지로 새롭게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말없이 든든한 힘이 되어준 신도회(회장 전두현)와 불심이 돈독한 여성 불자들로 구성된 법등회(회장 한복수)는 정혜사의 받침목이면서 큰 기둥역할을 해오셨습니다.

▶9층 석탑 주변에 새겨진  ‘나무묘법연화경(南無妙法蓮華經)’이란 글귀가 법화도량임을 전하고 있습니다만, 스님께서 존경하시는 분이라면 어떤 분이신지요?
▷예. 물론 은사님이신 혜관 스님이십니다. 저를 출가시켜주시고, 모든 밑거름의 역할을 다해주셨습니다. 철모를 때 과감하게 보고 듣는 것이 한계가 있다면서 유학을 보내주시기도 했습니다. 아버님 같은 분이셨습니다. 강단이 아주 분명하신 분이라서 제자가 무엇이 부족한지, 뭐를 해야 하는지를 빈틈없이 지도를 해주시기도 했답니다. “일찍 들어왔다고 빠른 것이 아니고, 늦게 들어왔다고 늦은 것이 아니다”라고 말씀해주셨습니다.
송광사에서도 월호 스님도 앞일을 걱정하시면서 잘못될까봐 가르침으로 방향을 잡아주시기도 했습니다. 공부 방향이나 초심자들이 길을 잘못 들면 헤매기에 공부에 대한 바른 길로 인도해준 고마운 일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스님께서 늘 마음에 두고 계시는 게송이나 사자성어는 어떤 것이겠습니까.
▷예. 마음속에는 늘 처렴상정(處染常淨)입니다. 고요한 마음을 유지하면서 온갖 번뇌와 시비, 갈등이 난무하는 중생 세계에서 항상 맑은 본성을 간직하고 밝고 향기로움이 가득한 정화된 세상이라고 말입니다. 

▶코로나 19로 사회적 거리두기로 인해 사찰을 오가는 재가 불자들도 일상 때보다 줄어들었다고 말씀들 하십니다. 단계적 일상회복에 들어서서는 불자들의 신심도 변화가 있지 않겠나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앞으로 불도의 길이 어떤 변화를 가져올 것 같습니까.
▷예. 많은 변화가 있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60~70년대에는 불자들의 신심도 매우 돈독했었고, 스님들도 열의가 마음에 꽉 차있었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다소 느슨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사회변화에 따른 맞물린 변화라고 생각됩니다. 욕구의 분출이 종교와의 거리가 생겨나면서 명상이나 힐링의 방향으로 많이 흐르고 있나 봅니다.

▶오늘 관행 스님 소중한 시간을 내어 정혜사의 역사와 불심에 대한 많은 얘기를 해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성불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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