生과 死를 뛰어넘는 진리의 횃불 - 사성제·팔정도·12연기 ⑸ - “진리의 흐름에 들어가려고 노력하지 않는 삶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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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과 死를 뛰어넘는 진리의 횃불 - 사성제·팔정도·12연기 ⑸ - “진리의 흐름에 들어가려고 노력하지 않는 삶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21.11.30 1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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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러두기-
황경환 박사께서 2021년 7월 24일 ㈔21세기불교포럼 정기법회 시 ON/OFF 라인으로 강의하신 말씀을 본지가 편집하여 10여 회에 걸쳐 연재합니다.
황경환 박사 - 사단법인 21세기불교포럼 공동이사장 -초기불전연구원 선임연구원
황경환 박사 - 사단법인 21세기불교포럼 공동이사장 -초기불전연구원 선임연구원

사성제·팔정도·12연기 ⑸

앞에서 언급했던 계정혜 삼학이라고 하는 삼학(三學)의 창작자는 또 누구인가? 왜 세 개(正語-正業-正命), 세 개(正勤-正念-正定), 두 개(正見-正思惟)를 묶어서 계정혜라고 하는가? 여기에 대해서도 공부를 하고자하는 불자라면 분명하게 이에 대한 의문을 가지고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담마딘나’라는 부처님의 수제자인 비구니는 속가에 있었을 때 대단한 부자집의 며느리였습니다. 그 남편인 ‘비사카’와 이혼을 하고 출가해서 부처님 상가에 와서 금방 아라한이 되었습니다. 
아라한이 되어서 ‘담마딘나’ 비구니가 남긴 시구절인 테리가타(비구니들의 게송)에 게송하나가 있는데 내용은 이렇습니다. “궁극을 지향하며 의욕을 일으키고 정신적으로 충만하여야 하리. 감각적 욕망에 마음이 묶이지 않는 님이 흐름을 거슬러 가는 님이라 불린다.”(테리가타 1장12)
‘담마딘나’ 비구니는 혜, 계, 정 또는 계정혜를 두개, 세 개, 세 개를 묶어서 ‘비사카’라는 자신의 전 속가 남편에게 팔정도에 대한 설명을 좀 쉽게 해주기 위해서 창작된 내용이 계정혜 삼학 즉 실라, 사마디, 판냐(paňňā, 般若)입니다. 
이 삼학에 대하여 2010년 8월 달라이라마 존자님과 사이에 법왕청에서 50분간 진지한 법담을 나눈 적이 있는데, 상세한 내용은 21세기 불교포럼 홈페이지에 실려 있습니다. 관심 있는 분은 참고 바랍니다. 
그때 달라이라마 존자님께서 저를 보고 반야심경을 아느냐고 물었어요. 그러시면서 반야심경에 나오는 ‘판냐’가 뭐냐? 그러셔요. 예. 존자님 ‘판냐’는 8정도의 계정혜를 지칭 합니다. 그랬더니 아니야 ‘판냐’는 혜를 말하는 거야 하셨습니다. 저가, 존자님의 말씀을 듣고 나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존자님. 그 말씀도 맞습니다. 그러나 ‘판냐’는 8정도의 정견과 정사유를 합쳐서 ‘판냐’라고도 하고 8정도를 두 묶음의 혜(慧)와 세 묶음의 계(戒)와 세 묶음의 정(定)을 합쳐서 ‘판냐’라고도 합니다.” 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존자님께서는 ‘어, 어, 어’ 하시면서 저의 답변에 동의를 해 주셨습니다. 참으로 이런 스토리도 어떻게 보면 참 묘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솔직히 말씀 드리면 이 촌놈이 어떻게 해서 혼자 인도 다람살라의 법왕청를 찾아가는 열정이 있었을까? 물론 그때 박은정 선생이 거기에 있어서 통역을 도와주었기 때문에 가능했지만은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생각이 그때는 실감이 났습니다. 
여러분들이 진정 금생에도 행복하고 내생에도 행복하고 영원한 행복을 원하신다면 용기를 가지고 길을 한번 나서 보십시오. 길은 곧 8정도의 길입니다. 기회는 용기를 가진 자에게 주는 고귀한 선물이라는 사실을 여러분도 너무 잘 아시지 않습니까?
인도의 다람살라에서 존자님과의 대담에서도 복수로 사용되는 ‘판냐’의 용어가 이슈가 되었듯이 ‘판냐’는 불교를 이해하는데 너무도 중요한 열쇠 낱말이고 부처님의 빠라마타(궁극적) 언어입니다. 
본론에 앞서 서두가 길어졌습니다만, 여러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오늘 4제 팔정도 12연기라고 하는, 이것이 불사에 이르는 진리가 되지 못한다면 사실 불교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듣고 익히 알려진 『숫타니파타』의 「모자라자의 질문에 대한 경」(Stn5:16)에서도 불사(不死)에 대한 게송이 있습니다. “모자라가여, 항상 마음챙김(sati)을 확립하고 실체를 고집하는 편견을 버리고, 세상을 공(空)으로 관찰하십시오. 그러면 죽음을 넘어설 수 있습니다.”
이뿐만 아니라 초기경전의 여러 곳곳에서 불사에 대한 얘기가 나옵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다르마는 죽는 길을 갈 것인가? 사는 길을 갈 것인가? 여기에 대해 결정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세익스피어의 4대 비극 중 하나에 나오는 ‘햄릿’의 “죽느냐 사느냐 이것이 문제로다”라는 삶과 죽음의 명제와는 전혀 다릅니다. 다시 말하면 음흉한 자신의 카르마에 종이 되어 바보같이 죽음의 길을 선택할 것이냐? 아니면 왜곡된 ‘산냐’(saňňā)라는 인식을 ‘판냐’로 바꿔서 금생에도 행복하고 내생에도 행복하고 그리고 영원히 행복한 진리의 길로 나갈 것인가? 질문은 딱 이것입니다. 
이것을 부처님께서는 고통과 고통의 소멸로 나아가는 길이라고 단정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산냐’와 ‘판냐’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보니깐 얼마 전 지리산 수행 처에 계시는 활성스님이 쓰신 고요한 소리에서 나온 “산냐에서 판냐로”라는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가 없네요. 소책자의 내용이 하도 중요해서 그것을 우리 사무국장이 몇 권을 구입해서 원하는 분들에게 한 권씩 보내 줬을 겁니다. 그 소책자를 받은 분들 중에는 아마 두 분류가 있을 거 에요. 한 분류는 그 정도는 다 이해 할 수 있는 한 분류이고, 다른 한 분류는 그 내용을 잘 모르는 사람이 더 많은 분류가 또 하나의 분류가 될 것이라 생각되는데요.
생사에 대한 문제를 다룬 그 중요한 책이 설사 자신들에게는 이해가 잘 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자신들이 보내달라고 해서 받은 책이라면 보내준 사람의 성의를 봐서라도 전화 한통 주시는 그런 여유로운 마음이 있어야 하는데 전화를 주신 분이 한 분도 없었어요. 
태어나면 늙고 병들어 죽는 이 불행한 존재가 대 자유라고 하는 니르바나의 길로 가고 싶다는 작은 신심이라도 있는 불자라면, 또 그것이 아니면 10가지의 족쇄 중에서 3개의 족쇄를 끊고 진리의 흐름에 들어가려고 원을 세우고 노력하지 않는 나의 삶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라고 자신의 삶에 대한 실존적 현실을 파악하고 살아가는 삶이라면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인가 하고 물어야 하는데 아무도 묻는 사람이 없습니다. 
여러분들은 자신의 무지 때문에 죽는다는 것이 억울하고 두렵지 않습니까? 저의 심한 편견인지는 몰라도 또 저가 원맨쇼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부처님의 담마라는 입장에서 보는 인간의 실존적 현실은 정말 눈물이 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지금 살아가는 이 삶의 연속은 들숨과 날숨의 연속에 의지하고 있는데 만약 들숨 후 날숨하지 못하고, 날숨 후 들숨하지 못하면 이 몸은 한낱 썩은 나무덩치보다 못하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대다수 사람들은 지금 이순간도 촌음을 쉬는 그런 것 없이 어느 순간 들숨과 날숨의 끝이라는 죽음의 나락으로 질주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없는 탐·진·치의 반복에 중독이 되어 점점 허물어져가는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돌아볼 여력조차 없습니다. 나이가 들어가면 갈수록 허물어져가는 자신의 몸을 더 리얼하게 실감 할 수가 있지 않습니까? 이빨도 아프고 눈도 흐려지고 저가 그런 경험을 최근에 하고 있습니다. 눈이 침침해서 안과에 가니까 백내장이 있다 해서 양눈 모두 백내장 수술을 했습니다. 처음에는 의사가 이럽니다. 아직은 괜찮습니다. 이러거든요. 좀 더 기다려 봅시다. 아직은 괜찮다는 이 말의 뒤에는 조금 있으면 반드시 안 괜찮다가 도래한다는 전제가 붙어있는 말이잖아요. 울산에 인플란트를 잘하는 명의가 한분 있는데 제가 PTP한국본부 총재를 한 이력 때문에 이빨 체크하러 가면, 총재님 아직은 괜찮습니다. 이러거든요. 
이 몸이나 남의 몸이나 모두 이런 저런 고통들을 어쩔 수 없이 겪을 수밖에 없게끔 태어난 존재이므로, 이 몸이 성할 때 부처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지의 인식을 명지의 의식으로 바꾸라고 하시면서 그러면 죽음을 뛰어 넘을 수가 있다고 했습니다.
이 명제는 “무조건 믿으라는 것이 아니라 문사수(聞思修), 즉 듣고 생각하고 수행이라는 실험을 해보라. 그러면 스스로 알게 것이다.”로 귀결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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