生과 死를 뛰어넘는 진리의 횃불 - 사성제·팔정도·12연기 ⑺ - “지금 이 순간이 얼마나 중요한가 명심하고 또 명심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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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과 死를 뛰어넘는 진리의 횃불 - 사성제·팔정도·12연기 ⑺ - “지금 이 순간이 얼마나 중요한가 명심하고 또 명심해야”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21.12.28 1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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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러두기-
황경환 박사께서 2021년 7월 24일 ㈔21세기불교포럼 정기법회 시 ON/OFF 라인으로 강의하신 말씀을 본지가 편집하여 10여 회에 걸쳐 연재합니다.
황경환 박사 - 사단법인 21세기불교포럼 공동이사장. 초기불전연구원 선임연구원
황경환 박사 - 사단법인 21세기불교포럼 공동이사장. 초기불전연구원 선임연구원

명상 수행은 내 안의 삐뚤어진 삶의 습관 또는 성향을 바르게 인도하는 나침반과 같습니다. 시도 때도 없이 마음은 지나간 과거에 집착하여 묶이고, 오지 않은 미래에 뭔가를 바라면서 집착하여 묶이며 지금 이 순간을 놓치고 사는 게 보통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부처님께서는   『숫타니파타』의 「피안가는 길의 품」에서 “과거에 있었던 것을 말려 버리고, 미래에는 그대에게 아무것도 없게 하십시오. 현재에 대해서도 집착하지 않는다면, 그대는 적멸(寂滅)을 이룰 것입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여기, 나에게 일어나는 일들은 내 과거에 대한 원인의 결과이고 또 내 미래는 지금 내가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의 결과가 된다는 인과의 법칙, 즉 업의 법칙을 세존께서 강조하였는데, 우리가 가르침을 받아들인다면 지금 이 순간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명심하고 또 명심하게 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중부 제131경』에서도 세존께서는 “비구들이여, 과거는 이미 지나가 버렸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으니 현재 일어나고 사라지는 이 순간순간을 그때그때 잘 관찰하라. …”라고 말씀하였는데, 이는 명상수행의 핵심인 정지·정념(正知·正念)의 중요성을 간절하게 말씀하신 것으로 저는 이해하고 있습니다.
이 경의 말미에서 세존께서는 이러한 삶을 살아가는 수행자를 ‘한밤에 슬기로운 님’, ‘고요한 해탈의 님’이라 나는 부르리라고 게송으로 읊으셨습니다. 
이제 세존의 가르침을 수용하여 독립된 나라는 존재는 그 어디에도 없다는 조건적 발생의 법칙을 여실지견(如實智見)할 수 있는 지혜를 계발하면 허깨비 같은 나를 보고 나라고 착각하는 것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이러한 공성(空性)의 이치를 명확하게 파악하고 이해할 때 드러나는 것이 해탈의 세 가지 관문인 ‘무상·고·무아’를 보는 ‘판냐’(반야)를 체득하게 됩니다. 
이로써 모든 고통에서 벗어나는 척도이고, 10개의 족쇄 가운데 ‘내가 있다.’라고 하는 그릇된 견해, 즉 유신견의 첫 번째 족쇄가 끊어지는 길이 열립니다.
유신견은 또 반야심경의 핵심인 ‘조견오온개공’과 맥을 같이 하고, 이것이 진리의 흐름에 드는 첫걸음이 됩니다. 
앞에서 말씀드렸던 5부 경전 곳곳에서 ‘인식[想]과 마음[識]을 더불어 이 한 길 몸뚱이[色]”라고 표현되는 오온에 대한 언급이 6700번 반복 등장한다는 이유 또한 오온의 실상[空]을 이렇게 저렇게 설명한 것 이외에 무엇이 더 있겠습니까?   
그래서 반야심경의 관자재보살은 오온의 비어 있음을 명상(사선정)을 통해 보고 일체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났다는 것이 실증된 셈입니다. 
우리 경봉스님께서 말씀하신 명상의 중요성은 앞에서 말씀드렸지만, 하루가 24시간이면 8시간 잠자고 9시간 일하고 4시간 놀아도 3시간 남는데 이 3시간을 단 한 시간이라도 한 시간이 안 되면 30분이라도 이 몸을 끌고 다니는 주인공이 누구인지 한 번 찾아봐야 되지 않겠느냐고 하신 말씀의 뜻이 명상수행의 주제입니다.
또 다시 강조합니다만 영국 옥스퍼드 대학의 교수였던 막스 밀러(1823~ 1900)가 불교 공부를 한다면서 명상을 하지 않는 사람은 ‘행복한 똥 돼지’라고 한 말했는데, 이 말뜻 역시 어디에 있는가를 여러분들은 이제 분명하게 이해를 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막스 밀러 교수의 경력 몇 가지만 더 소개하겠습니다. 이 분은 독일 태생으로 영국으로 귀화해서 자신의 전 생애에 <독일인의 사랑> 이라는 아주 짧은 한편의 소설을 남겼는데 이 소설은 지금도 많은 독일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는 동양학과 비교 종교학의 세계적인 권위자로 알려져 있을 뿐만 아니라 특히 불교학연구에 큰 족적을 남긴 대학자입니다. 막스 밀러 교수의 학문의 깊이가 일본에 알려지면서 일본 역사상 처음으로 막스 밀러 교수는 산스크리트 언어와 유럽의 불교문화를 일본에 전파한 인물이 되었습니다. 
여기에는 일본 교토의 정토진종오따니파인 동본원사(東本願寺) 승려 난조분유(南條文雄: 1849 -1927)가 1876년 영국 옥스퍼드 대학으로 건너가 8년간 막스 밀러 교수의 문하에서 산스크리트어 텍스트와 유럽의 불교문화를 공부했고, 난조분유는 다시 빠알리 원전 5부를 6년간에 걸쳐 일본어로 번역한 자신의 후배 다카쿠스 준지로(高南順次郞:1866-1945)를 막스 밀러 교수에게 소개장을 써 줌으로써 7년간 옥스퍼드에서 유학하게 하고, 1897년(32세)에 귀국했는데 이러한 계기로 인해 일본은 오늘날 세계에서 제일가는 다양한 불교학문의 메카가 되었습니다. 이 사실은 어느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이제 본론으로 돌아가서 오늘의 주제인 4제, 8정도, 12연기를 설명하겠습니다. 사성제라고 하는 고귀한 네 가지 진실은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진리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을 ‘깨달은 님’이라고 부르는데, 여기에 대해서는  「숫타니파타」((Stn558)에서 ‘나는 알아야 할 바(고성제)를 알았고, 닦아야 할 바(도성제)를 닦았고, 버려야 할 바(집성제)를 버렸고, 그래서 바라문이여, 나는 깨달은 자 부처이다.’ 라고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함에도 절에 다닌다는 대다수 불자들에게, 부처님은 깨달은 분인데 무엇을 깨달았냐고 물어보면 횡설수설합니다. 이뿐만 아니라 불교대학에서 불교학을 전공한 학부 출신들에게 물어도 대답은 마찬가지입니다. 
2007년쯤으로 기억되는데 서점에 갔다가 장휘옥, 김사업 공저인 <길을 걷는 자 너는 누구냐?>라는 책을 구입하여 읽어 보았습니다. 이 책을 읽고 느낀바가 있습니다. ‘장휘옥’ 필자의 이력을 보면 보통사람의 신심(信心)으로는 하기 힘든 그 수행력의 열정에 나는 당시 큰 존경과 감동을 받은 바가 있었고, 아마 지금도 통영의 오곡도 수행센터의 원장으로 계시면서 후학들을 지도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이분에 대한 큰 호기심이 발동해서 오곡도 수행센터에 가서 장휘옥 원장님과 불법에 대한 대화를 나누고 싶어서 그 분이 계시는 오곡도에 들어가려고 몇 번을 시도 했는데 뱃길 편도 쉽지 않고, 장원장님 역시 많은 일정들 때문에 시간 조율이 간단하지를 않아서 그냥 전화로 20분정도 궁금한 내용 두 가지에 대한 것만 물어 보았습니다. 하나는 “부처님이 깨달았다고 하는데 무엇을 깨달았느냐?”는 것이고, 그 둘은 “부처님의 깨달은 경지와 조사 스님들이 깨달았다는 경지가 같은 것인가? 다른 것 인가?”라는 질문입니다.
여기에 대한 장원장님의 답변은 부처님께서 깨달았다는 그 깨달음은 쉽게 설명할 수가 없다고 했고, 두 번째 질문에 대해서는 부처님께서 깨달은 경지와 조사스님들의 깨달았다고 하는 경지는 같은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도 그 분의 식견이 그때와 변함이 없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내심으로 ‘고오타마 붓다 불교를 공부한 분은 아니라고 여기고 오곡도에 대한 관심은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고, 한마디로 실망 그 자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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