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특집 - 제주불교가 만난 사람 - 한글서예의 대가 먹내음 붓길따라 한곬 현병찬 선생을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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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특집 - 제주불교가 만난 사람 - 한글서예의 대가 먹내음 붓길따라 한곬 현병찬 선생을 만나다!
  • 김익수 대기자
  • 승인 2021.12.28 13:2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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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이 몰입되면서 하얀 여백에 검은 파도가 넘실거린다. 묵향 짙은 글, 생동감으로 꿈틀거리기 시작한다. 붓과 혼연일체가 되어 온 그 자리에는 서체가 완성된다. 파도체, 미소체 등 독창적으로 아호 그대로 외골수의 집념으로 붓과 먹과 동고동락해왔다.   
제주불교가 만나보는 사람, 신년 새해 오늘은 한경면 문화예술마을의 현병찬 선생님과 시간을 함께 마련했다.        /편집자 주
먹물이 있는 집
먹물이 있는 집

 

“남을 움직이려거든, 내가 먼저 움직여야 한다”


공동체 정신 스며있는 제주노동요 즐겨 써
지난해, 작품·토지 및 전시관 기증서 전달 

 

서예가 현병찬 선생님
서예가 현병찬 선생님

▶선생님, 임인년 새해 들어서 처음 만나 뵙게 되었습니다. 올 한해도 건강하시고 날마다 즐겁고 보람찬 시간이 되시길 기원 드립니다. 
▷예. 감사합니다. 올 한해도 복 많이 지으시고 활력이 넘치는 한 해가 되었으면 합니다.
▶선생님께서 어렸을 적에 새해가 들면 마을 동네 아이들과 함께 어떤 놀이로 재미있게 보내셨나요. 추억을 한 번 소환해보면 어떨까요?
▷아, 예. 지금처럼 놀이기구가 많지 않아서 놀이가 단순했었지만, 축구경기를 좋아해 잔디밭에서 선배들과 함께 땀 흘리며 힘껏 뛰고 나면 녹초가 되었죠. 그런데 체력이 달리면서 운동체질이 아님을 스스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운동하고는 멀어지게 되었나봅니다.
▶초등학교 때 잊어지지 않고 기억에 남는 일이라면?
▷예. 칭찬이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말이 있듯이 초등학교 5학년 때인 것을 기억됩니다만, 선생님이 습자 시간에 붓글씨를 쓴 것을 보고는 참 잘 썼다면서 교실 뒷벽에다 걸어주셨습니다. 그게 붓을 들게 된 붓씨앗이 됐나봅니다. 그래서 수업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그런 사실을 어머님께 말씀을 드렸더니, 어머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너는 커서 선비가 되려나보다 정신일도하사불성이라는 말이 있듯이 그 말을 마음에 두고 잊지 않기를 바란다고 말씀하신 기억이 납니다.
그래서 중학교에 진학하고 나서는 반공표어 등 선배들이 붓글씨를 보고는 저렇게도 아름답게 쓸 수 있구나하고 감동을 받았죠.
중학교를 졸업하고 나서는 사범학교로 진학하게 되었습니다. 붓글씨 습작은 멈추질 않았습니다. 그런 가운데, 1957년 소암 현중화 선생을 사사하며 입문하게 되었습니다.
▶두 분 선생님은 모두가 한문서예의 대가이신데, 한글 서예에 전념할 수 있었나요?
▷예. 소암 현중화 은사님은 한문서예의 대가이시지만, 저에게 특별교재를 구입해서 기초부터 가르쳐주셨습니다. 지도를 받는 동안 어렵고 힘든 과정을 이겨내는 가운데, 선생님의 용기를 불어넣으려고 얼마 있으면 경서대회에 나갈 수 있다고 혹독하게 연습에 연습을 거듭했었죠. 그런데, 신문 갱지에 써서 보이면, 붉은 잉크로 엑스(X)표시를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강훈련이 계속되는 것이었죠. 결국 3학년 때에 이르러 선생님은 전국고등학교 경서대회에 처음 참가해서 서예부문 대상을 받게 되었습니다. 신문지와 갱지에 먹과 붓이 멈추질 않았던 결과라고 뒤늦게  절실히 통감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1980년부터 혜정 박태준 선생을 사사하기도 했습니다.
▶사범학교를 졸업하시고 초등교단에 서게 되시는데, 일찍이 운명을 달리 하신 사모님과 결혼하셨는데, 생전에 사모님의 내조라 할까요. 어떤 분이셨는지?
▷예. 병명도 모르면서 고통 속에서 헤매다 돌아가셨다고나 할까요.
처음에는 종아리가 저려서 병원에서 근육 강화제를 복용해왔는데, 끝내 회복되지 못하고 결국 다른 세상으로 보내드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 마디로 내조는 잘 해주었습니다. 그 당시 박봉이었지만, 그것마저도 제 잡기인 취미생활과 오락에 많은 비용으로 써버리곤 했었죠.
도내에서 생산되는 농산물을 사두었다가 필요할 때 조금씩 팔아서 어려운 가정살림에 크게 보탬을 해왔습니다. 그래서 집 한 채도 마련하기도 했습니다. 제 아내는 초등학교 동기 동창입니다. 어려운 가정에서 태어나 식구 많은 집으로 들어오게 돼 고생이 많았습니다. 그러면서도 남편을 신뢰하고 존경했던 마음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2003년 교단에서 퇴임하고서 이곳 한경면 저지문화예술마을에 입주해서‘먹물이 있는 집’ 이란 택호를 걸로 붓과 함께 정신일도하사불성 해오셨는데, 크고 작은 상은 이루 말 할 수 없이 수상하셨습니다.
▷예. 상을 받을 목적으로 붓에 미친 것은 아니고, 획 하나, 점 하나가 살아있는 글로 정진하는 것이 본 마음이었습니다. 그러다보니, 대한민국미술대전(국전)에서 대상을 수상하기도 했던 것 같습니다.        
▶서도의 심전경작에 몰입한 끝에 한글 서예로 정상에 서며 대가의 반열에 오르셨는데, 선생님께서는 제주 알리기 10개년 계획을 세워 실천 하는 등 지속적으로 활동을 펴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아. 예. 1992년부터 제주도 한글서예사랑모임(전신 한곬한글서회를 창립한 후에 제자들과 함께 제주방언(제주어)으로 서예를 쓰고 국내 전시는 물론 국제전을 열어 널리 알려오고 있습니다. 3년 전에는 세종대왕 즉위 600주년을 맞아 제주의 한글서예작품들이 서울 세종대왕 기념사업회 특별전시장에서 전시되기도 했습니다.  

 

먹물이 있는 집
먹물이 있는 집

남은 시간 서예의 위상 높이는데 노력…

▶선생님. 고향을 향한 애정은 깊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제주 정신에 대해서는 어떤 말씀을 주시겠습니까.
▷저는 제주노동요를 즐겨 쓰기도 합니다. 여기에 제주말씨가 도민 특유의 공동체 정신이 스며 있다고 봅니다. 서민들의 삶에서 생겨난 노동요에 제주정신의 핵심이 깃들어있다는 것이죠. 다시 말해 척박한 환경을 이겨내고 결코 포기하지 않는 불굴의 정신이라고 할까요. 고난과 핍박을 견디고 극복해하는 정신이야말로 제주의 강인한 정신이 녹아있다고 봅니다.  
▶선생님께서는 지난해 7월로 기억됩니다만, 수십 년 동안 써온 자신의 서예작품과 수집 작품, 전문도서, 토지 및 전시관 등 기증서를 전달하고 무상으로 기부하셨습니다. 어떤 마음으로 전 재산을 기부하게 되셨는지요?
▷예. 65년 동안 쌓아올린 흔적입니다. 제 아내가 기부하는데, 큰 용기를 주었고, 집안 식구 모두가 사회에 기증하는 것이 바람직스럽다고 결론에 이른 것입니다. 다만 제주문화발전을 위해 유용한 공간이 되고 예술이 면면이 이어져 나가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선생님께서 마음속에 함께하고 있는 인생의 좌우명이라 한다면 무엇이 있습니까?
▷예. 초등학교 교사를 발령받아서 학생들을 가르치게 되면서 마음에 정한 것입니다만, 저기 벽에(먹물이 있는 집 작업실 내) 걸려있지 않습니까. ‘남을 움직이려거든 내가 먼저 움직여야 한다’입니다. 말하자면 솔선수범해야 한다는 것과 같은 말이 되겠습니다.

서예가 현병찬 선생님과 제자들과 담소를 나누고 있다
서예가 현병찬 선생님과 제자들과 담소를 나누고 있다

▶앞으로의 계획에 대한 말씀을 주셨으면 하는데요.
▷예. 80에 들어섰는데, 내리막길이 아닌가 싶습니다. 욕심은 금물이라고 봅니다. 다만, 제주어를 지키고 제주정신을 알리는 것은 게을리 할 수 없구요. 제가 쌓은 자그마한 지식과 지혜, 경험담을 통해 독창성과 가치, 서예의 위상을 높여 나가는데, 시간이 닿는데 까지 노력하렵니다.  
▶끝으로 새해 덕담과 함께 남기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면?
▷예. 한마디로 ‘한 우물을 파라’라고 말씀드립니다.
▶예. 고맙습니다. 임인년 새해 모두가 어려움과 고통 속에서도 희망차게 출발하고 있습니다. 코로나 19가 하루 속히 소멸되어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기를 기원 드리며, 오늘은 선비이면서 장인인 서예가 한곬 현병찬 선생님과 대담으로 엮어본 제주불교신문이 만남은 여기서 접습니다. 
▷건강하시고 복 많이 받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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