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득 스님의 똑!똑! 금강경 - 첫 번째 이야기; 하나의 흐름에 들어
상태바
우득 스님의 똑!똑! 금강경 - 첫 번째 이야기; 하나의 흐름에 들어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22.02.18 11:2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강경은 천수경, 반야심경과 함께 출가불자나 재가불자를 아울러서 가장 널리 읽히고 있는 경전임엔 틀림없을 것입니다. 주석서 또한 한국에서 출판된 것만 해도 200종이 넘습니다. 그럼에도 가장 잘못 이해하고 있고 그 뜻이 왜곡되어 전달되는 경이 바로 금강경이기도 합니다. 중국어로 번역된 종류는 여섯 종류가 있지요. 그 중 가장 널리 쓰이는 판본은 서유기의 주인공인 현장법사의 번역본과 인도의 승려로서 중국에 전법 차 건너와 살았던 구마라집 번역본이 있습니다. 하지만 현장본은 학문적 연구의 비교 자료로 쓰이고 주로 독송, 번역되는 역본은 구마라집본입니다. 저도 다섯 가지 번역본을 다 읽어보고 가지고 있습니다만 가장 무난하고 매끄러운 판본은 구마라집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요즘 인도에서 수십 년 유학하고 돌아온 스님들의 원전 번역(빨리어나 산스크리트어를 바로 우리말로)이 절찬리에 이루어지고 있어 저 같이 게으른 사람에게는 더없이 고마운 일입니다. 덕분에 산스크리트어본과 더불어 번역본도 함께 지닐 수 있는 행운을 누리고 있습니다.
앞으로 이야기할 금강경의 저본(底本)은 구마라집본으로 하고 주석, 강해는 이본(異本)들을 참고하여 이야기를 전개해 나가겠습니다. 아울러 저에게 선심(禪心)을 깨닫게 해주시고 경전 읽는 눈을 뜨게 해주신 지유선사·정화선사(知有禪師·正和禪師) 두 분 스승님들의 사상이 이 글에 적지 않게 녹아 있음을 말씀드립니다.  

金剛般若波羅蜜經

如是我聞  一時 佛 在舍衛國祈樹給孤獨園 與大比丘衆千二百五十人俱 爾時 世尊 食時 着衣持鉢 入舍衛大城 乞食 於其城中 次第乞已 還至本處 飯食訖 收衣鉢 洗足已 敷座而座 .

이와 같은 말씀이 나에게 들려왔습니다. 한 때에 부처님께서 스라바스티에 있는 기타태자와 외로운 이를 돕기를 즐겨하는 장자 수닷타가 세운 동산에서 수행이 뛰어난 비구 무리(승가)천 이백오십 명과 함께 계실 때입니다. 마침 공양을 드실 때라 세존께서는 가사를 갖춰 입으시고 발우를 지니신 후 성안으로 들어가 밥을 비시는데 그 성안에서 차례로 밥을 얻으신 후 동산에 돌아오셔서 공양을 드시고 발을 씻은 뒤에 자리를 펴고 앉으셨습니다. 

금강경의 원 이름은 Vajracchedika prajnaparamita sutra입니다. 이 바즈랏체디카아를 현장스님은 능단(能斷)이라 번역했고 구마라집은 금강(金剛)이라 번역했습니다. 능단이란 ‘무엇이든 잘라 버릴 수 있는’ 이란 뜻이고 금강이란 ‘다이아몬드처럼 가장 견고하고 날카로운, 대충 이런 뜻이 되겠지요. 그 번역이 잘못됐다고 보기는 뭐하고 조금 보충을 하자면 벽력(霹靂), 이런 뜻도 있습니다. 
저는 인도 여행을 통하여 경전을 올바르게 이해하는데 얼마나 많은 도움을 받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언젠가 말씀 드린 적이 있는데요, 언어란 그 사회 구성원들의 사유방식의 결정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들에게 있어 벽력이란 지혜의 상징입니다. 그래서 그쪽 탱화에 나타나 있는 문수보살의 그림은 우리처럼 자애로운 모습이 아니라 눈을 부릅뜬 채 금강저(인도 신화에서 인드라 신이 벽력을 내려치는 도구)를 들고 벽력을 내리치는 모습입니다. 즉 벽력(지혜)이란 그릇된 신념, 가치체계, 통념들을 눈 깜짝할 사이에 부수어 버린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사실로 말하자면 경의 제목을 바르게 이해하게 되면 그 경은 보지 않아도 됩니다. 제목 안에 뜻이 다 담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반야바라밀다, 즉 ‘프라지나파라미타’ 란 ‘지혜의 실천 또는 지혜를 행함’ 이런 뜻이 되겠습니다. ‘수트라’란 뜻은 보배 꾸러미라는 말인데 우리말로 경(經)이라고 쓰지요. 다 그 사회의 사유구조방식에 따라 명명한 거니까 잘못된 옮김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럼 이제 본문으로 들어가 볼까요. 여시(如是) ‘이와 같이’ 라고 번역합니다. 사실 다른 모든 경전 첫 머리에 등장하는 말이기도 한 여시(如是)는 굉장히 함축적이고 깊은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다른 주석서들을 보면 대강 넘어가 버리고 마는데 이 여시(如是)라고 하는 말은 부처님 사상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시 즉 ‘이와 같이’라는 것은 ‘한 흐름 속에서’ 라는 뜻이 됩니다. 부처님께서 연기의 실상에 관하여 예로 든, 바다와 파도의 비유는 언제 생각해도 그저 놀랍고 감탄스러울 뿐입니다.

헤아릴 수 없는 파도가 있습니다. 그 파도 하나하나는 다 홀로 존재한다고(我相) 생각합니다. 그 중 한 파도(부처님)가 문득 홀로 독립된 존재라는 생각에서 벗어나 근원을 돌이켜 보니 각자 독립된 존재라고 여겼던 무량무수의 파도들이 사실은 바다의 움직임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는 자각입니다. 큰 파도 작은 파도 할 것 없이 바다라고 하는 전체 속에서 일어나는 움직임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나 파도들은(衆生)그 사실을 자각하지 못한 채 너는 잘나고 나는 못났다는 생각을 지니고 삽니다. 이것이 분별입니다. 이것이 생사(生死)입니다. 이것이 고통입니다. 이것이 윤회의 원인(無明)입니다. 하지만 전체의 흐름 속에 함께 한다는 자각이 있든 없든 간에 본래로부터 한 흐름인 것입니다. 다만 파도들은 사실이 아닌 스스로 지어낸 생각(顚倒夢想)을 부둥켜안고 삽니다. 이것이 중생계입니다.

여시(如是)즉 ‘이와 같이’란 전도몽상에서 벗어나 ‘한 흐름 속에 함께 하여’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작위적인 생각은 사라지고 전체적 한 흐름으로만 존재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다른 번역들처럼 여시아문(如是我聞)을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로 아니라 “이와 같이(한 흐름 속에서)나에게(전체로서의 나)들려왔다.”로 해석해 보겠습니다. 여기서 ‘들려왔다’ 즉 ‘들음(聞)’은 듣는 주체와 들리는 대상과 들음이라는 행위가 따로 있다면 바른 들음이 아닙니다. 그러면 이경전의 기자인 아난은 아라한이 못 되겠지요! ‘반야바라밀’이란 동시에, 전체가 하나 되어 자기의 전 존재를 함께 드러냄을 뜻합니다.  
 다시 바꾸어 말하면 듣는 나도 없고 말하는 화자도 없습니다. ‘오직 들음’ 이라는 행위로 전체가 동시로 하나 되어 열려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난이라는 주관적 나는 사라지고 없습니다. ‘이와 같이’란 말로써 개인적 견해가 아닌 진여실상인 바른 법임을 증명 하고자 하는 것이, 경전의 첫 머리에 예외 없이 시작되는 ‘如是我聞’인 것입니다.

한때(一時 )도, 혹 어떤 이들은 어느 때라고 번역하기도 하던데 이것도 이렇게 번역해 보겠습니다. 한때란 ‘들음’이라는 행위로 아난과 천이백오십 명의 비구들과 화자인 부처님이 하나 되어 있는 때를 말한 것입니다. 이런 일은 비단 부처님 회상에서만의 일이 아니라 우리들 세계에서도 자주는 아니지만 가끔 경험하는 일이 아닌가 싶은데요, 예를 들자면 드믄 일이겠지만 어떤 콘서트 장에서 연주하는 연주자나 듣는 청중은 연주되고 있는 음악과 하나 되어 있을 때 그때는 나라는 개인의 자아의식은 사라지고 음악만이 남게 됩니다. 여기서 연주자와 청중은 음악으로 하나 되어 동시 전체의 삶을 열게 된 것입니다. 사람들이 잊어버려서 그렇지 그 순간만큼 행복해 본 적이 또 있나요? 있다면 나와 보라고 하십시오. 그것을 우리는 잊고 살지만 그것이 우리의 본래면목 즉 참모습이기 때문에 그러한 상황을 무의식중에 그리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만 중생들은 어떤 자극적 상황과 행위들을 통해서 무아의 감정을 맛보게 되지만 부처님과 아라한들은 늘 그러한 하나 됨 속에서 산다는 것이 다릅니다. 

자 다음으로 넘어가 볼까요. 음, 기원정사의 창건 유래에 대해선 잘 알고 계시죠? 그래서 그것은 생략하기로 하겠습니다. 자 여기서부터는 상상력이 필요합니다. 부처님께서 머무시던 동산은 성중으로부터 30분가량 떨어진 곳입니다. 지금은 황량한 폐허가 돼버려 수백 마리의 원숭이들의 놀이터로 사용되고 있습니다만 조금만 더 상상력을 발휘하면 옛적 부처님 재세 시 그 아름다웠던 동산의 모습을 그려내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아름다운 새들의 노래가 들립니다. 바쁘게 뛰어 다니는 원숭이도 보입니다. 조용히 눈빛을 안으로 갈무리한 채 경행(걸으면서 하는 명상) 하고 있는 비구들의 모습도 보입니다. 나무 밑에 앉아 조용히 선정에 잠겨 있는 비구들도 보입니다. 그 무리 한가운데 유난히 밝고 맑은 오로라를 피워내는 분이 계십니다. 제가 목숨 다해 귀의해야할 귀의처인 부처님이십니다. 스승 세존께서는 선정에 들어 계시다가 공양 받으실 때가 된 것을 아시고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움직임으로, 걷어 올려 어깨에 접어 두었던 가사를 펴서 손과 목 등 드러난 몸을 가리시고 발우를 들어 가슴 아래에 받쳐 들고 찬연한 아침햇살을 받으며 한 걸음 한 걸음 움직여 성중으로 들어가십니다. 그 뒤를 따라 비구 무리들도 법답게 위의를 갖추어 성중으로 들어가십니다. 이때 부처님 걸음 속에는 반야바라밀만 살아나 있습니다. 바른 주의 집중 속에 걷는 행위로 하나 되어 있습니다. 그 걸음 가운데 우주도 녹아 있고, 중생도 녹아 있고, 부처도 녹아 있습니다. 그 하나 됨이 동시이며 전체이며 열려있는 삶입니다. 이것이 반야바라밀입니다. 이윽고 성중에 들어가셔서 처음 마음 정한 곳으로부터 차례로 일곱 집을 거쳐 밥을 빌어 거처로 돌아오십니다. 빌어온 밥 양 만큼 드시고 남은 밥은 마른자리에 두어 들짐승들이 먹게 하시고 발우를 씻어 잘 포개어 놓으신 후 발을 씻으시고 자리를 펴고 앉으십니다. 그림이 그려지십니까? 저는 상상이나 현실적 상황을 막론하고 이와 같이 아름다운 모습을 보지 못했습니다. 지극히 일상적인 모습을 그린 이것들을 3000년이라는 時空을 뛰어넘어 가슴으로부터 끄집어 올림으로써 저는 눈멀고 귀먹어 버렸습니다. 이처럼 부처님의 일상은 지극히 평범한, 平凡 그 자체였습니다. 그러나 그 평범함은 누구도 흉내 내기 어려운 비범함입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