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영준 교수의 제주폐사지 답사 ‘고려부터 조선시기의 교래 보문사지’③ - 일휘문 막새로 보아 창건연대 고려 전반기로 특정할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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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준 교수의 제주폐사지 답사 ‘고려부터 조선시기의 교래 보문사지’③ - 일휘문 막새로 보아 창건연대 고려 전반기로 특정할 수 있어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22.02.18 1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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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6>의 우측 중간에 ‘원물’이라 부르는 자연 샘이 위치하며, 좌측에는 밭둑에 노출된 채 방치된 와편들이 즐비하다. 또 좌측 중간에서 보는 사진은 대파가 자라는 밭과 대나무가 있는 경계를 보여주고 있는데, 제주에서는 집을 지을 때 항상 대나무를 울타리에 심는 문화상을 보여주고 있어서 특정 시기에 보문사지가 폐사된 이후에 4․3때까지 민가로 수용되었던 상황을 설명하는 것으로 보인다.

사역에서 바로 보이는 동측의 교통로에 접근할 수 있는 여건도 적절하며, 사역에서 사용할 수 있는 식수가 인근에 있다는 점 또한 좋은 입지 조건이어서 조선시대 동부지역의 산남과 산북을 연결하는 교통로 상에 놓은 숙박처로 활용되었을 가능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즉 제주성 동문에서 출발하여 조천을 거쳐 현재의 위치로 이동하였을 때의 거리는 약 25km 정도이므로 하루를 유숙해야 한다면 보문사지가 적절한 거리에 위치한다고 할 수 있다.

 

3. 보문사지의 현황과 채집유물의 성격

보문사지로 추정되는 곳은 현재 경작지로 조성되어 있는데, 상당히 많은 유물편들이 산포되어 있다. 꾀꼬리오름 기슭에는 보문사지의 샘인 원물이 보존되어 있으며, 이곳 사지에서는 청자, 분청사기, 백자 등의 도자기류를 비롯하여, 어골문 계열의 복합문 기와가 고루 확인되고 있다. 최근까지 기단석과 다듬어진 초석들도 한군데 쌓여 있었지만 현재는 모두 반출된 상황으로 확인되었다.
이곳 보문사지에서도 일휘문 암막새편이 채집되었다. 밝은 갈색의 일휘문 암막새기와로 손질하여 매끄럽게 제작되어 있다. 통상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가는 선으로 구분한 주연부에 구슬무늬 대신 띠를 둘러 장식하였으며, 하단부 주연부는 일휘문 옆에서 말려 올라와 끝부분이 마무리 되어있다. 당초에는 볼록하고 큼직한 일휘문 2개가 돌출되었을 것으로 보이나 수습한 막새편은 반쪽이 사라진 상태이다.
막새는 끝을 막아 준다는 뜻으로 무늬판이 암키와의 끝에 달리면 암막새, 수키와의 끝에 달리면 수막새가 된다. 암막새나 수막새는 대부분 처마 끝에 설치하여 지붕의 끝을 깨끗하게 마감하여 줄 뿐만 아니라 서까래나 부연 끝을 감싸 줌으로써 비가 들이치는 것을 막아 주는 역할도 한다.

새겨진 일휘문은 태양무늬에서 변형된 형태의 문양으로, 도깨비 눈 모양의 독특한 무늬이다. 일반적으로 외곽에 한 줄 혹은 두 줄의 원호를 두르고 내부에 눈동자 문양의 반구형 요철을 나타낸 형태를 하고 있는데, 연화무늬나 당초무늬 같은 식물문양에서의 화려함이나 아름다움 대신 추상적 문양을 넣음으로써 질병과 재난 등의 피해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벽사의 의미를 담고 있으며, 2018년 4월에 보문사지 현장에서 수습하였다.
제주목 관아지와 항파두리 토성 보고서를 비롯하여 고려시대에 운영되었을 寺庵에 대한 기록으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수록되어 있는 15개소의 사명은 이미 고려시기 제주 및 탐라에는 불교의 전래가 있었음을 말한다. 폐사지를 비롯한 대부분의 발굴 현장에서 다량으로 수습되는 기와들은 고려시대에 제작되었음을 확인해주는 비교적 편년이 명확하다는 점과, 기와의 주된 사용처가 관청과 사찰임을 고려할 때 수정사지․법화사지․원당사지(현, 佛塔寺)에 대한 기왕의 발굴보고서에서도 대체로 10세기에서 12세기에 해당하는 유물이 다수 발굴되었고 이를 근거로 할 때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보이는 사찰의 창건 연대는 고려시대 전반기의 탐라국 후기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상의 내용에서 확인되는 몇 가지 사실은 각종 명문와가 함께 제작 시기가 이른 토기 및 시유도기, 자기류가 다량 출토된다는 점이다. 특히 기와는 고려시대에 사용되었던 일휘문 막새가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보문사지에서 수습된 일휘문 막새는 사찰의 창건 연대를 고려 전반기로 특정할 수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고려시대 탐라국 후기에 보이는 15처의 사찰에 사용되었을 기와가 상당량에 달한다는 것은 사찰의 초창과 중수에는 고려의 瓦匠이 직접 제작하였거나, 기와제작술을 습득한 이들에 의해 제주에서 직접 제작된 기와가 사용되었음이 분명하다. 더구나 이것은 사원수공업의 확장과 관련하여 보면 더욱 명료해진다.


4. 제주 보문사지의 위상과 역사문화적 의미

앞에서의 검토를 바탕으로 보문사지가 고지도에 어떻게 표기되고 있는지에 대한 검토를 통해 보문사의 성격과 위상을 이해해보고자 한다. 특히 이형상의 [탐라순력도] 「朝天操點」 및 「金寧觀窟」 장면과 「橋來大獵」 및 「山場駒馬」와 함께 재고할 여지가 있다 이 장면에 대한 재고는 뒤에 언급할 「해동지도」 「제주삼현도」와 직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데, 「제주삼현도」에는 조천포에서 보문사지를 지나 교래로 연결되는 교통로가 표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탐라순력도]의 「한라장촉」에서는 표현되지 않은 부분이 명확히 표기되어 있다는 점이 눈여겨 볼만 하다. 특히 「조천조점」 장면의 상단부에 ‘二所牧場屯馬’의 표현이 「제주삼현도」에서는 보다 정확하게 표시되어 있으며, 아울러 ‘寺泉’과 ‘普門’의 표시도 명확하다는 점에서 [탐라순력도] 「한라장촉」의 표기 방식과는 많이 다르다는 점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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