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상 에세이 - 소걸음에 호랑이 눈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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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 에세이 - 소걸음에 호랑이 눈길로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22.02.22 1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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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현
유현

두 번째 절기인 우수가 지나고 경칩이 눈앞이라 봄기운이 꿈틀거린다. “우수 경칩에 대동강 풀린다.”는 속담이 있듯이 아란야 뜰 안의 은행나무도 긴 겨울잠에서 깨어나 땅속 깊이 뻗친 뿌리에서 물을 빨아올려 싹을 틔울 기세다.
맹아萌芽의 힘이 강한 수종이어서 노거수의 뿌리목 부근에서 많은 가지가 돋아난다. 겨우내 더는 노란 열매를 갈망하지 않는 듯 보이나 암수딴그루로 5월에 꽃을 피워 10월에 열매를 맺을 것이다.
하지만 은행나무에서 뿜어져 나오는 강력한 생명력이 나에겐 어울리지 않다고 느껴진다. 아마도 70중반의 나이 탓에 젊은 시절의 욕망이 줄어들어서 그런가 싶다. 
겨우내 움츠러들었던 몸과 마음을 벼려서 영춘가를 부르고 싶지만 왠지 기대치에 못 미칠 것 같다는 예감이 든다. 
풍진세상이다. 코로나가 극성이고, 설상가상으로 코앞에 닥친 대선 정국은 스캔들과 네거티브로 뒤범벅된 진흙탕 싸움을 벌이고 있어서다. 
제가齊家는커녕 수신修身도 못하는 후보들이 주제넘게 장밋빛 공약을 남발하며 국민을 기만하려고 하니 최소한의 염치도 없는 것 같다. 
선거 때마다 후보들은 공정과 평등을 실현하겠다고 공약을 내놓고 있지만 예나 지금이나 이런 공약이 계속되고 있다는 것은 시대의 거대 담론을 해결하지 못했다는 반증이라 하겠다.
어쩌다가 우리사회가 이 지경까지 망가지고, 도덕은 땅에 떨어졌을까? 헤아릴 수 없는 영겁의 세월 동안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의 세 가지 불선不善의 마음들이 모여서 대립과 분열의 상相을 만들고 생존 자원을 독식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요즘 세태를 살펴보면 지눌스님이 살았던 12세기 고려 사회와 닮은꼴이다. 무신들끼리의 권력다툼과 정변의 소용돌이에 불교가 휘말리어 수행과 전법 등 종교적인 기능을 다 할 수 없었던 혼돈과 혼란의 극치를 보여준다.
지눌스님은 시대를 직시하는 호랑이의 눈으로 정혜결사定慧結社운동을 일으켰다. 이는 곧 계정혜의 삼학을 수행하는 공동체를 말한다.
계정혜를 줄이면 정혜이다.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 가운데, 네 번째 팔정도(중도)가 바로 그것이다. 시대는 다가왔다가 다시 흘러가지만 진리는 변명하지도 화내지도 않으며 거대한 침묵으로 머물면서 모진 폭풍우 속에서도 언제나 슬기롭게 버틴다. 
조계산 송광사에 있는 보조국사 지눌의 비문에는“… 스님은 위의威儀가 엄숙하며 소의 걸음에 범의 눈길[牛行虎視]이었으며 …”라고 새겨져 있다. 
진리를 호랑이 눈으로 찾아다니고 이를 향해 소처럼 우직하게 매일 한 발자국을 걷다보면 언젠가는 반야용선의 뗏목을 타고 저 언덕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현자들이 말하는 ‘물극필반物極必反’의 시기가 조만간 오기는 오는 것일까. 설렘과 긴장감이 회오리친다. 
조급증을 버리고 푼더분히 살아 보려고 한다. 해는 서산에 지는데 소걸음 아니 달팽이 걸음이면 또 어떠랴. 호랑이 눈빛만 가지고 있으면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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