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영준 교수의 제주폐사지 답사 ‘고려부터 조선시기의 교래 보문사지’④ - ‘보문사’ 종교 기능 외에 여행자의 편의 적극 돕는 역할 수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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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준 교수의 제주폐사지 답사 ‘고려부터 조선시기의 교래 보문사지’④ - ‘보문사’ 종교 기능 외에 여행자의 편의 적극 돕는 역할 수행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22.02.22 1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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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삼현도」에서 제주—정의—대정은 붉은색으로 도드라지게 표현하면서도 전도에 걸친 물길과 교통로를 자세히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제주도의 하천은 배가 통행할 정도의 규모로 보이기는 하나 대부분 乾川이어서 하천을 따라 교통로가 발달할 수밖에 없었고, 조천에서 교래로의 물길 또한 건천이었음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그림의 좌측에 표시한 부분을 확대하여 보면 우측의 그림에서와 같이 조천관과 함덕포에서 건천으로 2소장을 지나 산장에까지 교통로가 이어지고 있으며, 산장에서는 다시 육상교통로로 정의현까지 연결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조천과 교래 사이의 2소장 표시 위에 바로 ‘寺泉’과 ‘普門’이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여기서의 보문은 고려시대에 운영되었던 普門寺임이 틀림없다고 할 수 있다. 普門의 단어 자체가 불교 용어라는 점을 감안할 때도 보문사를 院 기능으로 전환하여 활용하였을 개연성이 매우 높다고 할 수 있다. [해동지도] 뿐 아니라 [제주삼읍전도](도 11)와 [호남읍지] 「제주지도」(도 12)에서도 관련 지명이 보이고 있다는 점 또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제주삼읍전도]에서와 같이 타원 내의 부분을 확대하면 2소장 위에 ‘寺泉’과 함께 ‘濟衆院’이 표기되어 있다. 사천이라는 표현은 앞의 그림에서도 확인한 바가 있는 보문사지의 원물이지만, ‘제중원’ 표시는 19세기 중반부터 정의현을 오가는 ‘관원들이 점심을 먹었던 곳’이라는 협주와 함께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1872년에 제작된 [제주삼읍전도]와 「제주지도」에서 분명하게 표기하고 있다. 특히 조천진에서 교래에 이르는 물길 표기와 함께 교래 방향의 1소장으로 난 육로를 함께 표현하고 있어서 [탐라순력도]의 모호한 표현보다는 더욱 분명하게 표시되어 있다. 특히 2소장 내에서도 아직 정확한 의미는 파악되지 않지만, ‘제중원’과 ‘사천’ 등이 표기되어 있음은 이 지역이 다른 곳보다 상대적으로 중요하였음이 이해된다. 특히 조천포와 함덕포 사이의 물길을 관통하는 육로망이 표시되었는데 함덕—조천—신촌—와흘—대흘—와산—선흘로 이어지는 북동지역의 도로망은 2소장을 기점으로 하여 중산간지역의 육로망과 바로 직결되고 있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보문사지가 위치한 2소장은 제주의 산남—산북을 연결하는 요지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현재 보문사지 내에 있는 ‘원물’과 관련한 지명인 ‘院洞’이 보이는 고지도가 있다. 구전에 의하면 보문사지지가 있었던 마을명이 원동이었으며, 4․3 당시에도 같은 지명을 사용하였던 實例가 있다(도 12 참조). 

지도에서 확인할 수 있는 2소장의 범위에서 산남과 산북을 잇는 교통로가 확인되고 제주목에서 정의현까지의 노정에서 중간 지점에 위치한 보문사는 고려 때부터 신앙 기능에 더하여 행려의 편의를 돕는 대승불교의 利他行을 실천하였다고 할 수 있다. 행정관리나 유배인을 포함하여 각종 물자가 오가는 데 있어서 조천—교래 간의 교통로에 사찰이 위치하였던 사실은 고려시대 사찰이 도심이나 주요 포구 및 교통로에 입지하는 전통을 따랐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조선시대에는 국영목장으로 전환되었던 제주의 사정에 맞게 세공마의 이동에 필요한 교통로의 확장과 그에 따른 편의 제공이 지속되었을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여전히 사세를 유지하면서 주요 지도상에 지속적으로 표기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보문사는 창건 이후 폐사될 때까지 사원이 지닌 본래의 기능을 이행했을 뿐만 아니라 중산간지대의 사원이라는 특성을 유지하면서 주변 민가에 지속적인 영향을 끼쳤다고 할 수 있다.

5. 마치며
고려시대 제주의 사찰에 대한 문헌 기록이 正史類를 비롯한 읍지 등에 잘 남아 있고, 조선시대 제작된 제주의 고지도에도 보문사의 위치가 명확하게 표시되어 있다는 점은 단순히 종교적 기능에만 머무르지 않았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보문사는 제주목에서 정의현으로 이어지는 목사 순행길의 중간 기착지로 기능을 수행함과 동시에 오가는 행인들의 숙박지로 활용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사원이 중요한 교통로에 위치하여 편의와 휴식을 제공하였다는 사실은 기존의 연구 성과들에서 확인되며, 보문사는 중앙의 사찰과 같이 단순한 종교 기능 외에도 여행자의 편의를 적극 돕는 역할을 수행하였다는 점에서 더욱 의미가 크다.
보문사는 제주목에서 정의현으로 이어지는 목사 순행길의 중간 기착지로 기능을 수행함과 동시에 오가는 행인들의 숙박지로 활용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사원이 중요한 교통로에 위치하여 편의와 휴식을 제공하였다는 기존의 연구 성과들이 확인된다는 점에서 제주의 보문사는 중앙의 사찰과 같이 단순한 종교 기능 외에 여행자의 편의를 적극 돕는 역할을 수행하였다는 점이 부각된다.
특히 제주는 1105년(숙종 10)에 고려 정부의 지방행정에 편입되었고 이후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는 중앙의 수령 파견으로 여러 분야에서 이전 시기와는 다른 양상의 문화 전개가 이루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이 시기에 확대되었을 것으로 보이는 관영수공업과 사원수공업은 관청과 사찰에 직접적으로 소용되었을 여러 물품들을 생산, 공급하였을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문헌에서 확인되는 고려시대의 사찰 15곳에 공급되었을 僧物을 포함하여 건축기술과 같은 고급 기능 등은 당시 중앙에 편입된 제주사회의 빠른 발전을 도모하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보문사 또한 자체 승물의 제작에 그치지 않고 여행자들의 편의를 돕는 본래의 기능을 수행하였을 것으로 보이며, 이러한 문화전통은 조선시대에도 이어져 17세기 전후에 제작된 여러 고지도의 곳곳에 표시될 정도로 그 위상은 목사의 순행길에서도 특별하게 작용하였을 것이다. 고려시대 제주 불교의 정체성과 위상을 확인함에 있어서 보문사지의 역할을 우선적으로 검토하는 것은 당시 제주사회에 끼친 불교의 사회적 기여 정도와 문화적 확장 정도를 가늠해 볼 수 있는 중요한 주제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역사민속학] 58, 한국역사민속학회, 2020. 06.에 발표한 원고를 기반으로 하여 정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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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재 2022-02-28 14:01:11
좋은 글 감사합니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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