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종 선생과 함께 가는 중국불교유적 순례 (44) - 사천성 검각(劍閣) 각원사(覺苑寺) 석씨원류 벽화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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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종 선생과 함께 가는 중국불교유적 순례 (44) - 사천성 검각(劍閣) 각원사(覺苑寺) 석씨원류 벽화 (12)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22.03.01 0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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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경을 설법하는 보관을 쓴 노사나불

각원사 대웅보전 동쪽 벽의 세 번째 칸에 그려진 벽화는 총 20장면이다. 그 중 상단 두 줄에 그려진 여덟 장면은 다음과 같다. 번호는 『석씨원류』의 실린 판화 순서이다.

5단    58임간연좌(林間宴坐) 
        59사왕헌발(四王獻鉢)
        56관보리수(觀菩提樹) 
        57용궁입정(龍宮入定)
4단    54제천찬하(諸天讚賀) 
        55화엄대법(華嚴大法)
        52보살항마(菩薩降魔) 
        53성등정각(成等正覺)
     
마왕을 대신하여 마왕의 아들이 참회하고 항복하자 대지는 진동하고, 환한 빛이 무명의 어둠에 빠진 중생들을 고루 비췄고, 허공에서는 아름다운 음악과 함께 여러 종류의 꽃비가 내렸다(보살항마).  
샛별이 떠오를 무렵 그동안 싯다르타의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던 안개가 순식간에 걷히며 환해지더니 위 없는 진실한 깨달음을 얻었다(성등정각). 싯다르타의 이 깨달음은 ‘보리’ 또는 ‘정각’이라 부르며, 이때부터 정각을 이룬 싯다르타는 진리를 깨달은 사람이란 의미의 ‘붓다(Buddha, 불타, 부처)’로 불리게 된다. 정각을 얻어 붓다가 된 것을 ‘성도(成道)’라고 부른다. 『불본행집경』에서는 석가모니 부처님이 정각을 이루고 나서 이렇게 게송을 읊었다고 전한다.  

지난 옛적에 지은 공덕 그 이익으로 
마음에 생각한 것 다 이루었네.
빠르게도 그 선정의 마음을 증득하고
또 저 열반의 언덕에 이르렀네.

일체의 모든 원적(怨敵)과
욕계에 자재한 마왕 파순도
나를 흔들지 못하고 다 귀의하였으니
복덕과 지혜의 힘이 있기 때문일세.

만약 용맹으로 정진을 하여서
성지(聖智)를 구한다면 어렵지 않게 얻으리.
이미 모든 괴로움 끝까지 다 없애고
일체 모든 죄를 다 제멸하였네.  

 석가모니 부처님이 정각을 이룬 곳은 보드가야로 인도 비하르 주의 가야 시에서 남쪽으로 10킬로미터 쯤 떨어진 곳에 있는 작은 마을이다. 인도 성지 순례 시 빠지지 않는 곳이다. 근처에 석가모니 부처님이 고행을 하다 목욕했다고 하는 나이란자나(니련선하) 강이 있다. 현재 보리수가 있는 곳에는 높이 50미터가 넘는 마하보디사원(사진 1)이 자리하고 있다. 마하는 크다는 뜻이고, 보디는 보리, 즉 깨달음을 뜻하므로 우리말로는 대각사라고 번역된다. 
기원전 260년경, 마우리아 왕조의 3대 왕 아쇼카는 석가모니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은 보리수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곳을 성지순례 장소로 정하고 그곳에 불교 사원을 짓게 하였다. 그리고 부처님이 앉아서 명상하였을 곳에는 금강좌를 만들었다. 아쇼카 왕이 세운 사원은 이후 여러 차례 보수와 중축을 거쳤다. 일부 난간은 기원전 3세기~1세기 것도 존재하지만 현재의 사원은 5세기에서 7세기쯤에 조성한 것으로 추정한다. 이러한 추정은 인도로 구법 여행을 갔던 중국의 두 스님이 남긴 여행기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중 하나는 동진 때 인도를 순례한 법현 (法顯, 399-412)이 쓴 『법현전』이다. 이 책 권5에는 “(부처님께서) 6년간 고행하던 곳에는 후세 사람이 탑을 세우고 불상을 만들었는데, 지금도 모두 남아 있다”고 전한다. 탑에 대한 체적 설명은 없지만 탑이 존재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법현보다 200년쯤 뒤에 인도에 온 당나라 스님 현장(玄奘, 627-645)이 쓴 『대당서역기』권8 ‘마게다국(摩揭陀國)’조에는 다음과 같이 상세하게 묘사되었다. 
보리수로 둘러친 울타리 한가운데 금강좌가 있다. 그리고 보리수의 동쪽에 정사가 있는데 높이는 160∼170여 척에 달한다. 아래 기단의 너비와 면적은 20여 걸음에 달한다. 푸른 벽돌을 쌓았고 석회를 발랐다. 층층으로 이루어진 감실에는 모두 금상이 있고 네 면의 벽은 빼어난 솜씨로 조각되었는데 구슬의 형상이 잇따라 새겨져 있거나 천인과 선인의 상이 있다. 위에는 금동으로 만들어진 보병이 놓여 있다. 
당시 현장 스님이 직접 본 보리수와 함께 있는 사원은 높이가 50미터쯤 되고 그 규모와 형태가 지금의 마하보디사원과 비슷하여 이때 사원이 조성되어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이슬람 왕조가 들어선 뒤에 사원은 폐허가 되었다가 19세기에 와서 버마와 영국에 의해 복원이 이루어졌다. 특히 1880년 영국인 고고학자 알렉산더 커닝햄에 의해 대대적인 발굴과 함께 복원이 이루어졌고, 한동안 힌두교 사원으로 알려졌던 마하보디사원이 불교 성지임이 밝혀졌다. 현재는 대표적인 불교 성지이자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성등정각 이후 장면 중에는 ‘화엄대법’이 가장 중요하다. 정각을 이룬 후 노사나불의 몸으로 나투어 화엄경을 설법하는 내용이다. 이 장면은 1447년 수양대군이 소헌왕후(昭憲王后)를 추모하고 불법을 널리 전하기 위해 『석보상절』을 제작할 때 만들어진 팔상 판화(사진 2) 이래 우리나라 팔상도의 일곱 번째 장면인 녹원전법상의 중심 주제이다. 이 장면은 녹원전법상이라는 그림의 제목을 그린 녹야원에서 처음으로 설법하는 장면인 ‘전묘법륜’보다 더 중요하게 다루어졌다. 통도사 녹원전법상(사진 3, 1775년))을 예로 들면 윗부분에 표현된 ‘화엄대법’이 전체 화면의 반을 차지하고, 녹야원 설법 장면은 오른쪽 아래에 작게 묘사되었다. 아마도 부처님이 설법하는 장면, 그것도 중요한 경전인 화엄경을 설하는 장면이어서 중요하게 다루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화엄경을 설법하는 화엄경변상도가 따로 그려졌던 것을 고려하면 충분히 설득력이 있다. 7처9회의 설법 내용을 그린 송광사 화엄경변상도(국보 314호, 1770년, 사진 4) 중 제1회 ‘보리수하세주(菩提樹下世主)’에는 보관을 쓴 노사나불과 설법을 듣고 삼매에 빠진 두광이 묘사된 승려가 표현되었다. 『석보상절』과 『월인천강지곡』을 편집한 『월인석보』 팔상 판화(사진 2)나 통도사 녹원전법상(사진 3) 아랫부분에 설법을 듣는 사람이 다르게 표현되어 있어 의도하는 바가 달랐던 것 같다. 
한편 각원사 벽화의 ‘화엄대법(사진 5)’은 우리나라 팔상도에 표현된 장면과 다르게 항마촉지인을 취한 석가모니불로 묘사했다. 그 내용은 『석씨원류』의 판화(사진 6)와 동일하다. 다만 하단에 표현된 승려의 머리에 두광이 표현되지 않았다. 이를 앞에서 살펴본 우리나라 녹원전법상에 표현된 ‘화엄대법’을 비교하면 우리나라 팔상도는 『석보상절』에 그려진 팔상 판화의 전통을 지속해서 고수하였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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