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와 함께하는 ‘노자’ 산책 (7) - 도덕경 - “총애든 굴욕이든 깜짝 놀란 일 당하는 것과 같이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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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와 함께하는 ‘노자’ 산책 (7) - 도덕경 - “총애든 굴욕이든 깜짝 놀란 일 당하는 것과 같이 하라”
  • 글·고은진 철학박사
  • 승인 2022.03.01 0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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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귀한 자리에 있는 사람에게서 총애 받기를 원한다. 장자에는 진나라 왕의 종기를 터트려 고름을 뺀 자에게 수레 한 대, 치질을 핥아서 고친 자에게는 수레 다섯 대를 주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사람들이 그토록 기를 쓰고 얻으려는 그 총애란 것은 참으로 수치스러운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것을 혹시나 잃지나 않을까 봐 노심초사 한다. 
귀함이란 자신 스스로 권력을 행사하는 높은 자리이다. 총애를 받는 자는 남에 의해 자신이 길러지지만 귀한 자는 스스로 권력을 행사한다. 그런데 귀한 자리에 있는 자들은 언제나 걱정거리가 끊어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막중한 의무와 책임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가령 왕은 백성들을 잘 다스려야 하는 의무와 책임이 있으며, 이것을 다하지 못하였을 경우 그 자리가 위태로워 질 수 있다. 이와 같이 귀함은 끊임없이 근심 걱정을 낳게 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몸처럼 귀하게 여긴다. 
춘추전국 시대에 총애와 굴욕은 백지장 한 장 차이다. 총애를 입어 신분이 급상승하기도 하지만 총애가 떨어지면 같은 상황이라도 죽음에 이를 수 있다. 춘추시대 위(衛)나라 영공(靈公)의 총신으로 미자하(彌子瑕)라는 인물이 있었다. 그는 복숭아를 먹다가 너무 맛있어 그 반쪽을 왕에게 바쳤다. 군주의 총애를 입을 때 그것을 애정으로 받아들였으나, 총애를 잃자 먹다 남은 복숭아를 왕에게 먹였다며 벌을 받았다. 그래서 노자는 윗사람에게 총애를 입든 굴욕을 입든 깜짝 놀란 일을 당하는 것과 같이 하라는 것이다. 이것이 지혜로운 이의 가르침이다. 마찬가지로 지혜로운 이는 큰 근심을 귀하게 여긴다. 
그런데 노자는 큰 근심이 있는 까닭이 몸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노자에게는 몸이 존재자체이다. 몸을 나타내는 한자 身은 애기를 배고 있는 여자의 모습을 옆에서 그린 상형자로 생명의 중추를 포함하여 그 전체를 포함한 글자이다. 노자에게서 몸은 마음(心)에 대비되는 글자가 아니다. 노자의 몸은 인격이자, 생명이다. 
불가에서 마음(心)은 자아뿐만 아니라 일체 법을 형성하는 핵심 개념이다. 아함경에는 사량하고 요별하는 심리 작용의 총칭으로 심(心)을 언급한다. 오온(五蘊)중에서도 심적 현상은 수(受)·상(想)·행(行)·식(識)의 다양한 인식 단계의 작용으로 나타낸다. 대승불교인 유식에서는 심(心)이 자아와 제법을 형성한다고 보았다. 무시이래 생긴 중생이 남긴 몸과 말과 생각으로 쌓은 업이 아뢰야식에 함장되어 있다가 인연이 닿으면 견분(見分)과 상분(相分) 즉 주관과 객관으로 이분화하여 견분이 상분을 대상으로 하여 자증분을 형성한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주관인 견분이 만들어낸 상분이 사실은 식 자체인 아뢰야식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중생의 삶은 결국 자기가 만든 꿈속에서 자기가 만든 상대를 사랑하고 미워하는 형국인 것이다. 이처럼 불교에서 심(心)은 매우 중요한 개념이다.
그런데 노자 당시에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던 심(心) 개념이 맹자를 거쳐 송의 성리학에 와서는 마음에 내재하는 선천적인 도덕 원리로 고착화된다. 그 이유로 불교의 영향이 컸음을 부인하기는 힘들다. 그러나 불교에서 말하는 심(心)과 성리학의 심(心)과는 매우 다르다. 
기원 후 2세기 경 성립한 초기 한역경전에 불교 중국사에 막강한 영향력을 미친 안반수의경이 있다. 안(安)은 숨을 들이마시는 흡(吸)에 해당하고, 반은 숨을 내쉬는 호(呼)에 해당하고 수의(守意)는 컨트롤한다는 의미이다. 다시 말하면 호흡을 조절하여 무위(無爲)에 이른다는 뜻이다. 당시 중국에는 열반이라는 개념이 없었기에 이와 비슷한 무위를 쓴 듯 보인다. 
이는 당시 유행하던 노자의 태식법(胎息法)이 불교의 수식관(數息觀)으로 바뀌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고 이는 결국 선종(禪宗)의 탄생을 예고하는 씨앗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노자의 신(身)과 불가의 심(心)은 크게 다르지 않다. 불가의 심(心)은 육체와 대비되는 개념이 아니다. 신(身)또한 심(心)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노자의 신(身)또한 몸과 인격을 아우르는 개념이다. 따라서 몸과 마음을 이분화하는 성리학의 전통보다 노자와 불교의 거리가 훨씬 가깝다 하겠다.   
감산 덕청 스님은 노자 13장에 대해 오로지 도인(道人)이라야 부득이한 시절의 흐름을 따라 천하에 군림하더라도 스스로 현달한 것으로 여기지 않고, 고귀한 자리에 있다고 해도 단지 도로써 백성을 구제할 것만을 궁리한다 하였다. 그래서 도인이 자기 몸을 아끼는 것은 생명을 지키고 몸을 보전함으로써 도를 행하려 한 것이라 하였다. 이런 인물이라면 천하의 권세를 맡길 수 있고, 이런 사람이 왕의 자리에 오르면 무위(無爲)로써 다스리게 된다고 하였다. 
모든 인간은 자기 몸을 가장 귀히 여긴다. 자기 몸을 위하는 것이 가장 큰 근심이다. 그런데 문제는 자신을 귀하게 여김으로 해서 남을 천하게 여긴다는 데 있다. 따라서 노자는 만일 내 자신을 귀하게 여김으로 해서 천하도 똑 같이 소중히 아낄 수 있는 통치자가 있다면 천하를 안심하고 그에게 맡길 수 있다고 하였다. 이것은 천하를 다스리는 자들이 자기를 귀하게 여기듯 천하를 귀하게 여겨야 함을 강조한 것이다. 그래서 큰 근심을 내 몸 여기듯 하는 이는 가히 천하를 맡길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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