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대불 - 나의 학창시절 나의 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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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불 - 나의 학창시절 나의 문학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22.03.22 1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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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문학은
정인수 선생님과의 인연이 다분하다
정인수 선생님은 작문시간에
시 한 편을 낭송하면서 수업을 시작하였다
‘미라보다리 아래 세느강은 흐르고~~’
고미선(우도 남훈문학관 관장)
고미선(우도 남훈문학관 관장)

지난여름, 정인수 선생님 시비 제막식에 참석하였다. 선생님의 모교에서 총동문회 주최로 학교 정문 옆 넉넉한 장소에 세워졌다. 선생님의 인품만큼 시비 또한 듬직하게 버티고 있다. 코비드19로 제한 요건이 많았겠지만 뜻있는 독지가와 제주여중·고 제자인 K 작가가 힘을 합치니 수월하였다는 후문이다. 나의 문학은 정인수 선생님과의 인연이 다분하다. 고마움을 기리며 반추하여 본다.
초등학교 담임선생님은 가정방문 후, 제주여자중학교에 지원원서를 쓰게 했다. 옆집에 살았던 김희숙 선배가 같이 걸어 다니자고 권유하였다. 지금의 칼호텔 자리에 제주여중·고 여학원이 자리했다. 사립학교이다. 공립은 중앙여중이 처음 생겨났으나, 신설학교여서 밀렸다. 제주 시내 여학교에서는 신성여중·고와 제주여중·고의 대립각이 우세였다. 신성여중·고는 중앙성당을 끼고 자리하였다. 운동이나 무용과 미술, 문예 부문까지도 서로 경쟁이었다.
동초등학교 졸업하면서 중학교 전형 시험을 치렀다. 떨어지면 중학교도 재수하던 때이다. 학교마다 합격 불합격제도도 있었고 우선은 장학생 선발에 목적을 두어 몇 점 이상자를 선정하는지 관심사였다.
동문시장에서 남수각으로 오르막길을 걸으며 지금의 자연사박물관 앞을 지난다. 높은 다리를 지나면 칼호텔 자리의 제주여중에 도착한다. 남수각을 지날 때는 두 개의 길이 있다. 큰비가 오면 건널 수 없어서 높은 다리 길로 다닌다. 평소엔 냇가를 징검다리 몇 개 딛고 가파른 계단을 오른다. 계단 두 개씩 책가방을 흔들며 반동으로 빠른 걸음으로 오르면 검역소 길이 나타난다. 표구당 거리를 지나 병무청이 나타나면 삼성혈 앞 학교길이다. 삼 년 내내 걸어 다녔다. 
잊고 지냈다. 친정어머니가 유물로 넘겨준 상장과 통지표를 펼쳐 드니 기억이 새롭다. 담임선생님의 지시대로 중학교 면접시험 보는 날에 상장을 제시하였다. 운이 좋았는지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문예부 상을 탔다. 5.6학년 때도 대외백일장에서 받은 상장으로 문예부 특기생에 도전하라고 하였다. 문예부 장학생이 되어 입학금 면제되는 장학증서를 받았다. 
중학교 1학년 오월 즈음에 선후배 포플러 동인 상견례가 있었다. 문예부 특기생은 무조건 정문 옆 나무 아래로 모이라 하여 의무적으로 토론하게 하였다. 제주여중·고는 구멍 난 제주 울담으로 넓은 운동장을 둘렀다. 울타리 아래에 갖가지 나무가 심어 있어서 토론장소가 되었다. 돌계단에는 운동선수들이 쉬는 장소가 되기도 하고 정인수 작문 선생님이 결성한 포플러 동인의 모임 장소였다. 
어느 날 선생님은 포플러 동인 뺏지를 나누어주었다. 상징으로 여기게 동복 호주머니 덮개에 달고 다니게 하였다. 하얀색 갈매기 형상에 테두리가 있었다. 일 년에 두어 차례 열리는 대외백일장에는 꼭 참석하게 하였다. 정인수 선생님은 작문시간에 시 한 편을 낭송하면서 수업을 시작하였다. ‘미라보다리 아래 세느강은 흐르고~~’ 학창시절의 미라보다리는 동경의 대상이 되었다. 훗날 성인이 되어 미라보다리를 밟으며 건너는 꿈도 이루었다. 선생님의 구성진 소리가 지금도 메아리 된다. 빨랐다 느려졌다 높이 오르고 내리고를 자유자재로 낭송하던 음성이 아련하다. 
정인수 선생님은 중학교 때 삼 년 연속하여 학생과장과 문예부를 이끌다 공립학교로 옮겼다. 내가 결혼한 후, 남편과 같은 학교에 근무하게 되자 우리 집으로 초대한 적이 있다. 선생님의 손만큼이나 큰 종합선물세트를 가지고 오셨다. 술상을 준비하여 쇠고기 육회를 올렸더니 목소리를 높이며 칭찬하였다. 한참을 떨어져 지내다 제주도문화상을 받는 자리에 찾아뵈었다. 몰라보게 왜소해졌고 치과 치료 중이었다.
몇 년 전, 김희숙 무용가의 부탁으로 공저한  『춤을 살다』 를 내놓았다. 팔 개월 동안 힘을 쏟으면서 정인수 선생님의 십 년 동안 공적이 대단함을 알았다. 자료는 김희숙 선배가 모아둔 가방 세 개 분량만큼 있어서 필요한 것을 찾아내었다. 예술단장으로서 십 년 동안 문예회관 대극장에서 공연했다. 공연한 창작무는 대부분 정인수 선생님 연출과 대본이었다. 무용과 연극에 힘을 쏟아서인지 선생님의 시집은 두 권뿐이다.
학창시절의 또 다른 한 토막을 꺼내 본다. 학교 정문은 칼호텔 남쪽 주차장에 자리하여 철문을 여닫는 규칙이 철저하였다. 정인수 학생과장의 지도하에 규율부는 교복 점검, 머리 길이 검사까지 아침마다 실시한다. 조회시간을 거쳐 교실에 들어가면 정문은 닫힌다. 지각한 학생은 울타리 넘다가 걸리고 하교할 때까지 바깥출입 못하게 엄격하였다.
행사가 열릴 때면 기수는 늘씬한 몸매에 하얀 상의 교복에 검정 후리어 치마를 입고 허리에 하얀 허리띠를 찬다. 세 명의 선배는 세 개의 기를 한 개씩 허리에 꽂고 발걸음 맞추며 행진한다. 학교의 얼굴이었다. 그 선배들은 모두 어디 갔을까.
제주여중·고를 빛내기는 무용부가 최고였다. 무용단원은 전국대회에 나가서 대통령상까지 거머쥐었다. 송근우, 정인수, 강영호 선생님의 공로가 대단하였다. 실기지도와 대본을 직접 썼고 상황에 맞는 미술 소품까지 그렸다. 이경수 교장 선생님은 출전경비 마련하느라 애썼다. 무용단원은 공부보다 연습에 매진하고 머리 검사에도 예외를 두었다, 길게 머리를 땋아 다녔다.  
전국대회 출전하고 시민회관에서 1년에 한 번은 정기 공연한다. 동백제가 되면 전교생이 포크댄스를 하였다. 송근우 선생님은 전교생에게 일주일에 한 시간씩 가르쳤다. 현대무용을 전공한 선각자여서 학생들에게 스텝 기본동작까지 가르치고 이론시험까지 치르게 하였다. 운동부원과 무용부 단원들은 대회가 가까워지면 교내에서 합숙하며 늦게까지 연습하였다. 밑반찬을 집에서 가져오고 밥을 해 먹었다. 고인이 되신 선생님 얼굴이 그립다.
구내매점은 칼호텔 1층 뷔페식당 정원 자리에 있었다. 쉬는 시간과 점심시간이 되면 삼립빵과 국수를 팔았다. 학용품은 극소수에 불과하였다. 학교 울타리 북쪽 경계선 너머에도 할머니 가게가 있어서 울담으로 돈을 넘기며 빵을 건네받았다. 매점에서 품목이 매진되면 할머니 가게를 이용하였다. 그 할머니도 한 줌의 흙이 되었을 텐데 별이 되어 내려다보고 있겠지.
제주여중·고가 이전을 하고 나자 호텔이 들어서고 주변에 상권이 형성되었다. 호텔 스카이라운지에 올라섰다. 제주 시내가 발아래 위치하여 한눈에 보인다. 비행기조차 장난감처럼 날고 있다. 도두봉과 사라봉도 서로 다른 모습으로 바다에 이웃하고 있다. 스카이라운지 한 바퀴를 걷다 보니 하얀 칼라를 덧댄 제주여중 교복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대기업의 건물매각으로 아파트가 들어선다는 소문이다. 삼성혈의 우거진 숲이 코앞이다. 아, 옛날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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