똑똑 금강경 - 두 번째 이야기; 열린 마음으로
상태바
똑똑 금강경 - 두 번째 이야기; 열린 마음으로
  • 우득 스님 (와우정사 주지·한라정토회 지도법사)
  • 승인 2022.03.22 11:4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경전 속에 담겨진 수많은 캐릭터들이
지금 여기서 일어나고 있는
마음속의 편린들을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時 長老須菩提 在大衆中 卽從座起 偏袒右肩 牛膝着地 合掌恭敬 而白佛言 希有世尊 如來 善護念諸菩薩 善付囑諸菩薩 世尊 善男子善女人 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 應云何住 云何降伏其心 佛言 善哉善哉 須菩提 如汝所說 如來 善護念諸菩薩 善付囑諸菩薩 如今諦聽 當爲汝說 善男子善女人 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 應如是住 如是降伏其心 唯然 世尊 願樂欲聞

때에 수붓띠(수보리)장로께서는 무리 가운데서 곧 일어나 풀어졌던 가사를 단정히 접어 오른쪽 어깨 위에 걷어 메어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오른쪽 무릎을 꿇어 땅에 댄 후 공손하고 경건한 모습으로 합장하여 부처님께 여쭈었습니다.  “드무신 분 세존이시여 여래께서는 모든 보살들을 잘 보호하시고 잘 전하여 당부하십니다. 세존이시여 위없는 바른 깨달음에 대한 마음을 낸 선남자 선여인들은 마땅히 어떻게 그 마음(바른 깨달음에 대한)에 머무르며 어떻게 그 마음(바른 깨달음에서 벗어나려는)을 다스려야 합니까?”  부처님께서 수붓띠 장로에게 말씀하시되  “음! 좋은 질문이야! 그대가 말한 대로 여래는 모든 보살들을 잘 보호하며 그것을 잘 전하여 당부한다. 그대는 이제 자세히 들어라. 마땅히 그대를 위하여 말하리라. 선남자 선여인이 바른 깨달음에 관하여 마음을 냈을 때 마땅히 이와 같이 그 마음에 머무르며 이와 같이 그 마음을 다스려야 한다.” 
“그렇습니까? 원하건대 즐거이 듣고자 합니다.”

 

자! 조금 상상력을 발휘해 보십시다. 부처님께서는 자리에 단정하게 앉아계십니다. 새 울음소리도 들립니다. 원숭이들이 장난치는 소리도 들립니다. 가까운 논밭에서 소 몰고, 밭을 가는 소리도 들립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그 어떤 소리에도 싫어하거나 좋아하는 마음을 내지 않습니다. 다만 그 소리들은 왔다가 그냥 흘러갑니다. 마음속에 그리는 어떤 소리가 있다면 그 소리 이외에는 소음이 되겠지만 마음속에 어떤 한정을 만들지 않고 비워버린 마음, 열려있는 마음의 상태에서는 들리는 소리는 소리, 소리 마다 가릉빈가의 음성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소리가 있으면 소리와 하나 되어 흐르고 몸에 와 닿은 바람이 있으면 그 감촉과 하나 됩니다. 여기에는 어떤 작위적인 행위가 없습니다. 이것이 큰 침묵입니다.

그렇게 부처님께서는 큰 침묵 속에 앉아 계십니다. 비구 무리들도 부처님과 함께 큰 침묵 속에 들어 한 흐름으로 흐르고 있습니다. 이때 그 큰 침묵의 흐름 속에 작은 소용돌이가 일어남을 장로 수붓띠가 알아차립니다. 알아차리자 곧 일어나 온 몸을 감싸고 있던 가사를 풀어서 단정하게 접어 오른쪽 어깨 위로 걷어 메어 어깨를 드러낸 후 오른쪽 무릎을 땅에 대고 합장하여 존경의 예를 표한 뒤에 부처님께 여쭙니다.

여기서 우리는 반드시 이해하고 넘어가야만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시간과 공간 그리고 자아(自我)에 관해서입니다. 금강경의 무대인 쉬라바스트의 사헤트마헤트와 고타마 붓다 그리고 장로 수붓띠는, 자아라고 하는 전도된 편견을 전제로, 시간과 공간을 인식하므로 역사적 인물들임과 동시에 독립된 존재, 즉 타인으로 존재합니다. 때문에 우리는 그 분들을 만나려 해도 시간과 공간이 다른 차원에 존재함으로 인하여  만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시간과 공간은 사실로써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공업(共業)과 별업(別業)인 인식 속에서만 존재합니다. 인식을 벗어나서 한 흐름 속에 들어가면 금강경의 무대와 붓다 고타마와 장로 수붓띠는 여기 이 자리 우리의 삶 속에서 살아납니다. 부처님은 일체 함이 없는 큰 침묵 속에 우리와 함께 살아 있습니다. 수붓띠는 침묵 속에 어떤 소용돌이가 일어나자 즉각 알아차림으로 살아납니다. 우리는 그 알아차림(覺性)을 관자재보살 또는 관세음보살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이야기가 조금 딱딱하게 흐르고 있습니다만, 반드시 이해하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기에 조금 더 언급하기로 하겠습니다. 부처님은 모습이 없습니다. 소리도 없습니다. 그래서 보려 해도 볼 수 없고 만지려 해도 만질 수도 없습니다. 이것이 법신(法身)으로서 부처님입니다. 이것을 중국인들은 체(體)라고 명명했습니다. 거기서 모든 현상들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현상들은 고정된 모습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한 찰나도 쉬지 않고 변화합니다. 그것을 흐름이라고 합니다. 그것을 무상(無常)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이것을 중국인들은 용(用)이라고 명명했습니다. 그러나 둘은 따로따로가 아닙니다. 체 속에 용이 있고 용 속에 체가 있습니다. 체를 떠난 용이 없고 용을 떠난 체는 없습니다. 체의 움직임이 용이요 용의 멈춤이 체입니다. 언뜻 생각하기에 이것이 무슨 말장난처럼 느껴지기 쉬우나 이것을 바르게 이해하면 팔만 사천의 부처님 가르침이 하나로 녹아 이 자리에서 드러납니다. 부처님의 말씀을 기록한 모든 경전이 역사적 기록인 동시에 지금 여기서 일어나고 있는 마음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경전 속에 담겨진 수많은 캐릭터들이 지금 여기서 일어나고 있는 마음속의 편린들을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금강경의 무대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그 금강 회상에 모인 대중들 중에는 아라한의 도에 이른 사람도 있을 것이고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때문에 처음에는 부처님과 함께 큰 침묵 속으로 하나 되어 흐르다 시간이 흐르자 흐름이 깨지고 작은 동요가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존자 수붓띠는 이미 아라한이기 때문에 그 동요를 알아차립니다. ‘아라한’이란 ‘완전한 자기 비움’이 가능한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대중 가운데 조그마한 흔들림도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의 지금 삶과 연관 지어서 받아들여야 합니다. 침묵이 있습니다. 그때 침묵을 깨려는 작은 움직임이 있습니다. 그 작은 움직임을 곧 알아차려 다시 침묵 속으로 돌려놓습니다. 이 알아차림이 내 안의 수붓띠인 것입니다. 이렇게 알아차려서 돌려놓은 순간에는 나도 없고 상대도 없습니다. 이것을 무아상(無我相), 무법상(無法相)이라 부릅니다. 이렇게 무아상, 무법상이 되었을 때는 먼 역사 저편의 금강회상이 여기 이 자리에 함께 살아서 하나의 흐름으로 녹아드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의 삶 가운데 수붓띠 존자로 대변되는 알아차림(覺性)이 살아 있을 때 금강경도 비로소 살아 있게 되는 것입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