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상에세이 - 혐오嫌惡와 염오厭惡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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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에세이 - 혐오嫌惡와 염오厭惡 사이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22.03.29 0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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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현
유현

아란야 과원의 입구에 벚나무 군락이 있다. 삼월 중순에 접어들자 봄의 전령사인 벚꽃이 예년에 비해 이삼일 앞당겨 활짝 피었다. 
이를 시샘하듯 일주일도 안 되어 매화와 수선화의 향기로 가득했던 뜰 안의 언저리에서 하얀 목련이 수천송이 꽃망울을 터드리기 시작했다. 바깥 온도가 수직 상승한데다 때맞춰 봄비가 내렸기 때문이라고 짐작해본다. 
날씨가 따뜻해지기 시작하면 봄을 기다리는 나목들의 꽃눈이 꽃을 틔우지만 온도와 빛의 변화에 따라 오래 머물지 않는다. 추운 겨울에는 다시 나목이 되어 자연의 법칙에 순응하는 것이 초록 생명들이다.
나무는 꽃을 피우기 위하여 뿌리를 통해 땅속의 물과 각종의 유기물들을 줄기와 가지로 빨아올리지만 그 때문에 놀라지도 않고 모욕을 당하지도 않고 넌더리치지도 않는다. 구근 식물인 연꽃은 낮고 습한 진흙에서 피어나지만 그 더러움에 물들지 않고 홀로 청정하다. 
사계四季에 따라 꽃이 피고 지듯이 세상은 끊임없이 변하고 있는데, 우리들은 인식의 오류와 편견의 그물에 걸려 기나긴 고통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거슬러 올라가면 조선 선조 때부터 후기까지 사색당쟁이 그러하고, 네거티브 선거로 얼룩진 20대 대선에서 거대 양당은 혐오와 분노를 거침없이 토해내며 우리사회를 갈라치기하여 국민은 그 피해자가 됐다. 
선거는 끝났지만 아직도 연소되지 못한 혐오와 분노가 마그마처럼 꿈틀대는 중이다. 여기서 멈추지 않고 기름을 끼얹고 ‘혐오와 팬덤(fandom)의 공작 열차’에 탑승한 좌파 성향의 일부 지식인과 종교인까지 있다. 
지난 20년간 5년 주기로 반복된 청산의 정치는 살풀이 굿판으로 국민을 양분하여 혐오의 협곡에 가뒀다. 지난 대선에서 소셜 미디어와 단체 채팅 방의 혐오표현, 일부 친여 매체의 가짜뉴스, 유튜브(YouTube)의 맹독성 말들이 쌓이면서 혐오의 피라미드는 정점에 다다른 것 같아 두렵기만 하다.
우리 곁에 찰거머리처럼 붙여 있는 혐오감의 가까운 원인은 무엇이고, 또 이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은 과연 있기는 한가. 대선과 관련하여 혐오의 역사를 만든 원죄가 오염된 여의도 정치의 어법과 문법에 있다면 이를 성찰하고 극복해가는 것도 결국 주권자인 국민의 몫이 아닌가 싶다.
혐오와 염오는 ‘싫어함’이라는 점에서 뜻이 같다. 그러나 혐오는 병적으로 몹시 싫어하고 미워하는 해로운 심리상태나 기질이고, 염오는 탐욕을 역겨워 함 또는 탐욕으로부터 벗어남이라는 선한 심리상태인 점에서 다르다.
불교심리학에서 염오는 여실지견如實知見을 갖추고 관여하지 않음을 뜻한다. 현상을 변화시키려 하는 의도, 또는 현상을 그대로 수용하겠다는 생각 모두 우리를 세속의 삶 속에 더 깊이 휘말려들게 할 뿐이다. 
각자가 체험하고 있는 것에 관여하지 않을 때 자기 자신을 혐오의 쇠창살 지옥에서 나오게 할 수 있지 않을까. 
혐오의 짙은 그림자를 지우고 염오의 새 빛을 발하기 위해서는 사회 지도층부터 자기 성찰과 참회를 통한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 필요하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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