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댓불 - 뜨락에 내린 햇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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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댓불 - 뜨락에 내린 햇살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22.04.05 0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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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을 떠나 익숙지 않은
공간과 환경에서 오는
낯섦을 익히고 적응하는데
조금이라도 편안하게 한다고 애쓰지만
어찌 내 마음이 할머니 마음일까
이애현(수필가) 수필과비평 2011 수필등단한국문인 2019 시 등단제주문협, 동인 『脈』 , 제주수필문학, 혜향문학회원작품집 : 수필집〈따뜻한 소실점 〉 시집〈묵은 잠, 뒤적이며〉
이애현(수필가) 수필과비평 2011 수필등단한국문인 2019 시 등단제주문협, 동인 『脈』 , 제주수필문학, 혜향문학회원작품집 : 수필집〈따뜻한 소실점 〉 시집〈묵은 잠, 뒤적이며〉

울고 있다. 숨죽여 울지만 그 소리에 힘이 들어선지 이미 반쯤은 굳어버린 목소리에 ‘꺼억’하는 음은 제대로 소리가 못된 채 배어 나와 마음을 짓누르고 있다. 어쩌면 할머니 마음까지도 그렇게 짓누르고 있을 것이다. 할머니의 어깨를 살며시 감싸 안았다. 안긴 채 내 몸에 기대어진 어깨가 간헐적으로 들썩인다.
“할머니 그러니까 다음부턴 이 벨 가운데 빨간 부분을 손가락으로 꾹 누르면 벨소리가 나고, 소리가 들리면 다른 일을 하다가도 직원이 듣고 빨리 오니까 꼭 누르세요. 아셨죠?” 다시 한 번 할머니의 온전한 한쪽 손이 닿기 가장 쉬운 곳에 놓인 비상벨의 쓰임과 용도를 설명해 드렸다. 그러겠노라 고개를 끄덕인다. 
엄마한테 기댄 아이처럼 할머니께선 그리하겠노라 하고, 할머니 앞에서 조곤조곤 안심시켜 드렸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두어 해, 갑자기 쓰러지더니 편마비가 되었단다. 신체의 쓰임 중 절반의 기능은 잃었지만 세월에 익은 인생의 희로애락의 감정들은 그대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이의 그것처럼 삶에 녹아 흐른다. 일상을 느끼고 생각하고, 또 할 수만 있다면 결정하고 있는 것이다. 안타까운 것은 당신의 의지로 어찌해 볼 수 없는 육체의 한계만이 시간을 당기며 흐느적거릴 뿐이다.
편마비가 그러하듯 신체 반쪽의 기능은 상실되어 뭔가 말은 하고 있지만 소리 되어 다른 이에게 전달이 안 된다. 그러다 보니 당신은 당신대로, 듣는 이는 듣는 이대로 소통이 어려워 갑갑했다. 입술 모양을 보고 아쉬운 대로 그 뜻을 읽어 보려 하지만 이미 입술의 절반도 마비되어 읽어내기 어렵다. 
언어적 소통만이 아니다. 음식을 먹을 때도 씹는 동작이 어려워 오물거리는 동안 절반은 흘린다. 때론 감각이 둔하다보니 한쪽 입술 위로 음식물이 묻거나 붙어 있어도 그 느낌을 모른다. 음식을 씹고 삼키는 저작이며, 연하기능도 마찬가지다. 이렇게 반복되는 지극히 일상적인 생활도 유지가 힘들어 장기요양등급을 받고 우리 시설에서 할머니와의 새로운 삶이 시작 되었다. 
집을 떠나 익숙지 않은 공간과 환경에서 오는 낯섦을 익히고 적응하는데 조금이라도 편안하게 한다고 애쓰지만 어찌 내 마음이 할머니 마음일까. 퇴근 무렵 관찰일지도 정리하고 pc 전원을 끄며 마무리 하는데 같은 방을 쓰고 있는 어르신이 역정을 내어 소리에 가 보았다. 할머니께서 필요한 것은 없는지 확인까지 마치고 돌아왔었다. 그 사이 할머니가 앉은 자리에서 그만 소변 실수를 하신 것이다. 
특히 대소변 욕구가 있을 땐 서둘러 준비하느라고 하지만 몸의 한계에 마음만 급할 뿐 종종 이런 실수를 한다. 많이 속상하여 울고 있었다. 그 와중에 같은 방에서 생활하는 다른 할머니가 외려 어쩔 줄 몰라 하는 할머니께 큰 소리로 타박까지 하니 할머니께선 처지인지, 세월인지 훑고 간 그 자리가 서러운 게다. 
비상벨의 쓰임을 한 번 더 주지시켜 드리고 얼른 뒷정리를 한 후, 감싸 안았던 팔을 풀어 주무시도록 했다. 불안해 있을 할머니 마음에 평정을 찾게 하느라 등을 토닥이며 괜찮다는 말까지 덧붙여 보았다. 많은 부분이 상실되어 안타깝지만 그나마 온전한 반대편 한 쪽 귀에 대고 이야기를 하면 소리를 들을 수 있어 뜻이 어색하게나마 전달되어 참 다행이다.
인정하고 싶지 않음이다. 이런 일상에서 일어나는 아주 소소한 문제들을 말이다. 할머니께서는 문제라거나, 소소함이라거나 하는 단어들보다 지금까지 삶을 이어 오면서 확인하지 못한, 아니 확인하고 싶지 않은 자존감에 대한 깊은 상처를 그 일로 확인해 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인정하고 싶지 않음’ 자체를 당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 자신을 더욱 슬프게 하는 것이리라.
다음 날 물리치료를 마치고 나오는 할머니를 보고 온전한 쪽의 팔을 부축하며 할머니께 보행연습을 유도해 보았다. 지난 일로 느낌이 컸음인지 쉽게 따라 나선다. 재활운동으로 걷기 연습을 매일 반복적으로 하도록 유도했다. 
거실 두어 바퀴를 다 돌아 나올 때 쯤, 할머니도 힘들지만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주는 무게가 더 컸음인지 힘들어 상기되어도 얼굴이 밝다. 모처럼 뜨락에 가득 내려앉은 겨울햇살이 할머니의 등 뒤로 길게 내리며 벗해 준다. 마비되었던 한쪽 발을 끌듯이 옮기는 걸음에 내 목소리가 보태졌다. “할머니! 발을 끌지 말고 조금, 조금만 높이 올려 디뎌 보세요.” 어려운 주문인 줄 알면서 한껏 키우는 내 목소리와 할머니의 힘겹게 딛는 무딘 발 위로도 겨울 햇살은 아까처럼 그렇게 쏟아져 내린다. 
다음 날 현관문을 밀며 “안녕하세요?”하고 나누는 아침인사에 어르신들 속 그 할머니의 주름진 얼굴 가득 반가움이 넘쳤다. 어제처럼 오늘도 낯선 하루의 일과가 익숙함으로 익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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