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댓불 - ‘4·3 길을 걷다’ 에 걷지 못한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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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댓불 - ‘4·3 길을 걷다’ 에 걷지 못한 곳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22.04.12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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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택(수필가 / 혜향문학회 회장 / 前 제주소묵회 회장)
김정택(수필가 / 혜향문학회 회장 / 前 제주소묵회 회장)

비극적인 역사 현장을 찾는 분들이 적지 않다. 그런 여행에서 슬픈 역사를 숙연하게 느끼고 배움의 수단으로서 파악하고자 하는 작업을 다크 투어리즘이라고 한다. 다크 투어와 연계된 제주지역의 대표적인 곳이 제주4‧3 ‘유적지’이다. 관계당국에서 파악한 유적지가 2005년에 204곳이었다가 요새는 802곳으로 늘었다고 한다. 그 현장을 직접 찾을 수 있는 길 안내소와 봉사자들이 곳곳에 있어 큰 도움이 되고 있다. 제주지역 4·3 유적지를 소개한 ‘4·3 길을 걷다’ 지도(제주4·3 70주년기념사업위원회 발행)에는 제주도 지도에 150곳을 표시했고, 그 가운데 43곳은 사진과 곁들여 그 개요를  소개하고 있다. 또한 제주도가 만든 ‘4·3길’의 위치와 ‘QR코드’를 활용해 4·3유적지에 대한 추가적인 내용을 확인할 수 있도록 했다. 
가령, 관음사와 그 뒷산 아미산 일대는 무장대의 식량확보와 은신처, 주민들의 피난처로도 활용되었고 그 초소와 참호와 숙영지의 자취가 남아있는 4·3 복합유적이다. 도량을 홀로 수호하시다가 산화하신 오이화 스님의 영혼이 깃든 곳이다. 2020년도부터 국가등록 문화재 등록을 추진하고 있다고 하나, 현장에서는 토벌대가 아무 이유 없이 사찰을 점령했다는 데에 초점을 두어 토벌대의 주둔소가 되었다가 토벌대에 의해서 불태워졌던 곳으로만 소개하고 있다.  
문제는 다크 투어를 활성화해야 하는 이유가 왜곡되고 있다는 점이다. 역사의 교육현장으로 4·3유적지와 4‧3길 8곳을 체계적으로 발굴, 정비 개발하여 바른 역사를 전파하고, 적극 활용하여 미래 세대에 전승하려는 취지는 좋다. 여기에 관광객들이 극적인 감동을 느낄 수 있도록 스토리텔링하여 관광자원으로 활용한다는 것이다. 지역주민 주도로 관리하려는 계획 아래 4·3 코스를 기획하는 단계부터 부각하고 필수 코스로 인정받도록 안내판을 세우고 해설사 배치하는 관계 당국의 지원계획도 바람직하다.
그 소외된 곳에 제주4·3사건의 시발이었던 12곳 지서들이 있다. 5·10 총선거 반대 등을 명분으로 삼은 무장봉기라며,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는 치밀한 작전계획 아래 1948년 4월 3일 미명, 공공기관인 지서 12개소를 습격했다. 경찰관과 그 가족, 보조자들을 무참히 살해하고, 5·10 선거관련 업무 종사자들과 우익 청년단체 임원들에게 테러를 감행했다. 남로당의 제주도인민유격대투쟁보고서에 의하면 이날 새벽 2~4시 사이에 무장대 350명이 도내 14곳 지서 가운데 12곳 지서(외도·구엄·애월·한림·대정·남원·성산·세화·함덕·조천·삼양·화북)를 급습했다. 우익의 인피(사망 27, 부상 8, 포로 5명)와 물피(지서소각 및 파괴, 일반가옥 소각, 무기노획)는 극심했다. 이 사태는 대한민국의 국기(國基)에 배치되는 사건이었지만, 그들에게는 승전이었고, 매우 성공적이며 고무적인 작전으로 평가되었다. 남로당 중앙위원회는 제주의 반란을 격려했고, 남로당 제주위원회는 투쟁에 전념할 것을 회답한다.
이를 바탕으로 무장대는 두 달 사이에 조직적으로 안덕·저지 지서와 우익단체 인사와 그 가족을 거듭 테러했다. 치안상황은 긴박했다. 그들의 게릴라식 활동은 그 규모와 상관없이 민생을 혼란에 빠뜨렸고, 전신주 절단, 교량 폭파, 도로 차단 따위로 공공업무 수행을 방해했다. 당시 중산간 주민들을 지배한 것은 경찰이 아니고 무장대였다.
경관들은 이렇게 버려졌다. 초기의 경관들이 치안과 공권을 지키려고 고초를 겪었고 목숨까지 바친 최초의 지서들임에도 불구하고 무슨 이유인지 4‧3유적지에서 제외되었다. 아무런 표지가 없다. 파괴된 지서 터를 알리고 희생 경관들을 추모하는 일은 일차적으로 그들을 배출한 경찰기관의 소명이다. 그러나 오늘날 경찰에서도 시류에 밀렸는지 아는 듯 모르는 듯 아무 말이 없다. 어느 때는 지서 터를 사유지라 하고, 어느 때는 패전(敗戰)한 곳에 왜 표석을 세우냐 하고, 어느 때는 시기상조라 하고 있으니 그저 한심할 뿐이다.
상생과 화해는커녕 불신과 대립이 더해지고 있다. 당시의 경관들을 가해자로 정의하려는 자들에게서 올바른 4·3기념사업은 기대하기 어렵다. 진상을 규명하려는 노력보다 이념적·정치적 해결을 노리는 까닭에 정직하게 되돌아 볼 수가 없다. 바야흐로 이른바 ‘4·3정신’을 내건 4·3단체는 완장을 끼고 깃발을 들고 의세(倚勢)하고 있고, 그들의 의견만 무비판적으로 수용되고 있다. 보수 우익세력은 묵언 중이다.
4·3특별법의 체제는 자기 역사를 부정(否定)하게 만들었다. 관계자들은 역사에 대해 바른 태도를 취해주기 바란다. 역사는 흘러간 것이 아니라 흘러온 것이다. 사회와 개인의 삶 속에 생생히 살아있어도 바른 기록이 없으면 역사가 되지 못한다. 4·3의 진실한 희생처요 유적지인 지서 터에도 돌아보도록 하자. 유적지 표석도 세워 머물 곳이 없어 구천을 떠돌아다니고 있는 공권력을 그 자리에 불러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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