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빠사나 길라잡이 (38) - 여실지견(如實知見) 5
상태바
위빠사나 길라잡이 (38) - 여실지견(如實知見) 5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22.04.26 13:3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유현
유현

불교는 유일신이나 창조주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신神은 인간이나 중생이나 축생 등과 마찬가지로 개념적 존재에 불과하다고 봅니다.
중생이니 인간이니 하는 개념적 존재를 뭉뚱그려 인식할 경우에는 그것의 무상無常·고苦·무아無我를 통찰할 수 없습니다. 어리석음(무명)으로부터 탈출하려면 개념적 존재(paňňatti)를 온蘊·처處·계界 등의 법(dhamma)들로 해체해서 보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저 역시 어리석은 범부였을 때 일상에서 팔다리를 구부리고 펴는 동작을 반복할 때마다 ‘내가 구부리고 편다.’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학인이 되고 나서 나’ 또는 ‘자아’라는 인식을 버리고 무더기[蘊]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팔다리를 구부리거나 펴거나 움직일 때 먼저 구부리려는 의도가 있고, 그 다음에 풍대風大라는 바람의 작용에 의해 굴신屈伸의 모양이 나타납니다.
이 구부리려는 의도 안에는 네 가지 정신적 무더기가 있습니다. 구부리려고 하는 마음은 식온識蘊인데, 세 가지의 느낌이 마음과 함께 일어납니다. 좋아하면서 구부리면 즐거운 느낌, 싫어하거나 화를 내면서 구부리면 괴로운 느낌,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으면서 구부리면 무덤덤한 느낌이 일어납니다. 이것이 수온受蘊입니다. 다음에 구부림을 인식하는 상온想蘊이 있고, ‘구부려! 펴!’ 라고 마음을 쓰는 것은 행온行蘊입니다. 
요컨대, 몸[色蘊]의 구부림과 구부리겠다는 정신은 다섯 가지 집착의 무더기인 오취온五取蘊이 서로서로 의지하여 다함께 일어난 것일 뿐이고, 내가 또는 나의 자아가 구부린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오취온을 짐이라 말합니다. 이것들은 서게 하고, 가도록 하고, 앉게 하고, 누워서 쉬게 하고, 목욕하게 하고, 장식하고, 먹이고, 영양을 보급하게 하는 등을 통해서 유지되는데 그래서 짐이 됩니다. 갈애가 그 짐을 지게 합니다. 
「와지라 경」(S5:10)에서 아라한과를 증득한 와지라 비구니는 정신과 물질을 떠나 중생이라는 것은 따로 없다고 이렇게 시詩로 읊으셨습니다. 
“마치 부품들을 조립한 것이 있을 때 ‘마차‘라는 명칭이 있는 것처럼 무더기[蘊]들이 있을 때 중생이라는 인습적 표현이 있을 뿐이로다.”라고.
저는 이 시 구절이 좋아서 정신과 물질의 식별을 시작하면서 소리 안 나게 읊조리면서 반조를 하고 있습니다. 명상 수행이 깊어지면 와지라 비구니와 같은 법안法眼이 생길 것이라고 기대하면서. 
  부처님께서 「세상 경」(S1:70)에서 “여섯에서 세상은 생겨났고 여섯 때문에 친교를 맺느니라. / 여섯을 취착하여 세상은 전개되며 여섯에 세상은 시달리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앞의 ‘여섯’이란 눈·귀·코·혀·몸·마노[意]의 여섯 가지 안의 감각장소를, 뒤의 ‘여섯’이란 형색·소리·냄새·맛·촉감· 법의 여섯 가지 밖의 감각장소를 말합니다. 이것들은 압축하면 정신·물질[名色], 두 가지뿐입니다. 
안과 밖의 여섯 가지의 접촉을 통해 찰나적으로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만지고 알아차리는 여섯 가지의 마음[六識]이 일어납니다. 6근根-6경境-6식識을 18가지 요소[界]라 말하는데, 세존께서 영혼이라는 산냐[壽者想]을 부수기 위해 요소의 가르침을 설하셨습니다.
지계 수행은 여섯 가지의 감각기능[六根]의 단속에 방점이 있습니다. 학인은 눈으로 형색을 봄에, 귀로 소리를 들음에, 코로 냄새를 맡음에, 혀로 맛을 봄에, 몸으로 감촉을 느낌에, 마노[意]로 법을 지각함에 그 표상[全體相]을 취하지 않으며 또 그 세세한 부분상[細相]을 취하지 않아야 합니다.
만약 감각기능이 제어되지 있지 않으면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의 나쁘고 해로운 법들이 그 자신에게 물들듯이 흘러들어 오기 때문입니다. 
출가사문들은 학습계목을 받아 지녀 그것과 더불어 생활을 합니다. 하지만 재가의 삶이란 번잡하고 때가 낀 길이어서 방일하면 다섯 가지의 장애[五蓋]에 오염될 위험에 놓이게 됩니다.   
통찰지를 무력하게 만드는 다섯 장애가 때때로 일어나면 저는 「바히야 경」(Ud1:10)에서 부처님이 바히야(Bāhiya)에게 들려주신 법문을 반조합니다.
“볼 때는 단지 봄만 있다. / 들을 때는 단지 들음만 있다. / 느끼는 것에는 그저 느끼는 것만 있다. / 알 때는 단지 앎만이 있다. / 다른 것은 없다.”
오문 인식과정에서 받아들이는 마음, 조사하는 마음, 결정하는 마음의 세 가지 마음은 과보로 나타나거나 작용하는 마음일 뿐입니다. 이 세 가지의 마음에 뒤따라 일어나는 속행의 마음은 탐·진·치와 관련된 선 또는 불선의 업을 짓는 마음입니다. 
수행자가 속행의 마음에서 선 또는 불선의 업을 짓지 않으려면 볼 때는 봄만 있는 그런 마음이 되도록 노력해야 하는데, 이것이 감각기능의 단속입니다.
“아심여명경 조진불염진 我心如明鏡 照塵不染塵”은 성파 종정 스님의 오도송입니다. 내 마음은 맑은 거울과 같아서, 티끌이 비치긴 비치되 티끌에 물들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세상은 세 가지의 법[蘊·處·界]을 통해서 펼쳐지고 여기가 윤회의 시공간이며 사바세계의 현장입니다. 비칠 뿐 물들지 않는 단지 작용만하는 마음의 경지를 터득해야 여래의 흔적, 여래의 발자국을 찾아 나설 수가 있을 것입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