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빠사나 길라잡이 (39) - 여실지견(如實知見)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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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빠사나 길라잡이 (39) - 여실지견(如實知見) 6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22.05.03 1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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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현
유현

법들은 마음이 일어나는 바로 그 현장에서 함께 일어납니다. 마음의 일어남이라는 현장을 떠나서 법들을 존재할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여기서 정신과 물질의 법들은 서로 의지하여 일어납니다. 토대이고 문이고 대상이 되는 물질에 의지하여 정신이 일어날 때 정신과 물질은 서로 섞이지 않습니다. 정신에 물질이 공하고 물질이 정신에 공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막대기와 북을 의지하여 소리가 있듯이 물질을 의지하여 정신이 일어납니다. 이와 관련하여 부처님께서 읊으신 게송을 되새겨 봅니다. 
“정신·물질은 쌍둥이, 둘은 서로서로 의지한다. 하나가 무너지면 둘 다 무너지나니 서로 조건 지워졌기 때문이다.”      
초기불전연구원의 상임 지도법사인 각묵 스님은 정신·물질의 일어남과 사라짐을 오페라에 비유하여 멋지게 설명합니다.
“오페라의 음악은 독창과 합창, 관현악단으로 구성되고 또 발레단도 여기에 포함된다. 여기서 음악은 정신, 즉 마음과 심소법에, 발레는 물질에 비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독창이나 합창단은 89가지 마음에, 관현악단은 52가지 심소법에, 발레단은 28가지 물질에 비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오페라는 음악을 중심으로 한 종합 무대 예술입니다. 오페라 공연은 관객들로 하여금 색다른 문화 체험의 기회를 갖게 하고 다양한 정서, 즉 기쁨이나 슬픔, 또는 즐겁거나 괴로운 느낌을 일으키게 합니다. 
마음은 아무런 조건 없이 만법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대상을 아는 것으로 그치고 그 후에 어떻게 반응하거나 무엇을 꾸미지 않습니다. 아는 마음이 일어나서 괴로워하거나 즐거워하는 것은 수受라는 느낌이 하는 것입니다. 
탐착[貪]은 즐거운 느낌에서 비롯되며, 싫어함이나 성냄[嗔]은 불쾌한 느낌에 연결되고, 어리석음[痴]은 즐겁지도 않고 불쾌하지도 않은 느낌에서 생깁니다. 
느낌은 항상 ‘지금·여기’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내 몸과 마음에 있고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오욕五慾의 즐김은 인간의 본성이라서 그 자신이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만지고, 생각하는 것들에 대하여 집착하고 반응함으로써 그러한 욕망을 밖으로 드러냅니다.
마음이 말과 행동을 통해 밖으로 나가면 좋거나 싫거나 반응을 하게 되어 번뇌를 일으켜 매순간 형상·소리·냄새·맛·촉감 등에 끌려가 느낌의 노예로 살게 됩니다. 
누구나 자신의 감각적 쾌락을 충족시키려고 더 좋은 느낌을 추구하듯이 저 역시 알짝지근한 취기에 내 몸을 맡기고 우울과 불안의 느낌을 회피할 때가 있었습니다. 흡연과 알코올 중독, 도박, 물욕과 명예욕과 권력욕 등은 모두 느낌을 조건으로 한 갈애에서 생긴 집착이 그 뿌리입니다. 느낌이 갈애를 낳기 때문에 느낌을 얻기 위해 업을 짓습니다.
느낌이 일어날 때 그 순간을 포착하여 느낌으로 알아차리지 못하면 연기가 회전하여 갈애를 일으키고 집착하여 불선의 업을 짓게 된다고 부처님께서 늘 강조하셨습니다.  
느낌은 찾아온 손님입니다. 그것들은 인연법에 의해 나타날 만해서 나타난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찾아온 손님을 내치거나 방치해서는 안 되고 ‘그냥 찾아왔네!’라고 알아차리는 ‘느낌 명상’을 해야만 감각적 욕망의 번뇌를 소멸시킬 수 있습니다. 
느낌은 조건발생적인 것이므로 무상하고, 괴로움이며, 나의 것이 아닙니다.
느낌의 이러한 본성을 알고 볼 수 있는 능력이나 힘이 생겼을 때 앎과 봄[知見]이라는 위빠사나 지혜가 드러납니다.  
초기경전에서는 12가지 감각장소는 예외 없이 연기적 존재이고 조건발생이고 무아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모든 형성된 요소는 과거에도 미래에도 요소의 고유성질이 없고, 영원함[常], 깨끗함[淨], 즐거움[樂], 자신[我]이 공한 것으로, 조건에 의지하여 존재할 뿐이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전승된 가르침을 스스로 확신하기 위해서는 경전을 읽거나 독송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사마타와 위빠사나 명상을 실행해야 합니다.
명상 수행을 통해 온蘊, 처處, 계界 등의 여러 가지 방법으로 정신·물질을 구분하기 때문에 중생이라는 인식[衆生想]을 극복한 뒤 미혹이 없는 경지가 확립되어 정신·물질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지혜의 눈이 열립니다. 
 『청정도론』에서는 이 경지를 견청정見淸淨이라 부릅니다. 견見의 한자 풀이는 ‘볼 견’, ‘생각 견’입니다. 「금강경」은 버리고 극복해야 할 대표적인 인식[saňňā, 想] 또는 견해[ditthi, 相]로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을 들고 있는데, 이 네 가지 상은 전도되고 왜곡된 인식 또는 견해입니다. 
 「금강경」의 제17품 ‘구경무아분究竟無我分’에서 이 네 가지 상을 갖고 있으면 보살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깨달음의 마음을 내기 위해서는 산냐(saňňā, 想)를 세우지 말라는 뜻입니다. 
설령 그런 것이 마음에 있다 하더라도 그것에 연연하지도 말고 내세우지도 말고 집착하지도 말고 여의고 뛰어넘어야 합니다. 이 네 가지 상이 산산조각이 날 때 유신견有身見은 사라지고 궁극적 실재(paramattha)를 깨닫는 통찰지가 열리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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