똑똑 금강경 - 세 번째 이야기;“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① - “여러 조건과 조건이 만나 가합된 상호의존적 존재이기에 無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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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똑 금강경 - 세 번째 이야기;“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① - “여러 조건과 조건이 만나 가합된 상호의존적 존재이기에 無我”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22.05.31 1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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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아차림은 지켜봄 가운데 생기고
汝今諦聽은 지켜봄 잃지 않은 일
如是엔 苦 空 無常 無我 실상 담겨

지난 회에 이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알아차림(用)은 지켜봄 가운데서 생깁니다. 이 지켜봄이 우리의 체(體)입니다. 여기서 어떤 움직임도 없으면 그 체 또한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움직임이 있음으로 그것을 자각하고 그 자각의 근원인 지켜봄을 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 지켜봄을 본지(本知) 또는 순수한 앎이라 부릅니다. 따라서 일어난 상태에 사로잡히지 않고 지켜봄으로 존재할 때를 체성(體性)을 여의지 않은 때라 부르는 것입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수붓띠의 질문에 부처님께서는 선재선재(善哉善哉)라 하십니다. 이 말을 직역하자면 ‘좋아! 좋아!’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거기에 담겨진 함의는 “어쩌면 그렇게 내 생각을 잘 알고 그렇게 잘 물어보아 주니 참 기특한 제자로고!” 대략 이런 뜻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께선 말씀하십니다. “네가 말한 대로 여래는 모든 보살들을 잘 보호하고 잘 전하여 당부하신다. 너는 이제 자세히 들어라.(汝今諦聽) 마땅히 너를 위하여 말하리라.” 라고.
너는 이제 자세히 들어라! 라는 말씀을 지금 내 삶과 연관 지어서 받아들인다면 지금 이 자리에서 깨어 있음, 즉 지켜봄(體性)을 잃지 않는 일이 될 것입니다. 이 체성을 여의지 않는 상태에서 너를 위하여 말하는 것이 선부촉제보살(善付囑諸菩薩)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때가 되어 발우를 지니시고, 걸식하시고, 공양하시고, 발을 씻으시고, 자리 펴고 앉으신 일련의 모든 행위들이 체성(體性)을 여의지 않은 고로 희유한 일이며 모든 보살들을 잘 감싸서 보호하는 일이며 잘 전하여 당부하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선 말씀하십니다. “선남자 선여인이 위없는 바른 깨달음의 마음을 냈을 때, 마땅히 이와 같이(如是) 그 마음에 머물고 이와 같이 그 마음을 다스려야 한다.” 라고 첫 회 서두에 여시(如是)에 관하여 포괄적으로 뜻을 말씀드렸습니다만, 여기서는 조금 더 학술적 서술에 역점을 두고자 합니다. 그러나 작은 걱정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 방식에는 문장이 건조해지고 현학적으로 흐를 개연성이 농후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생략하고 넘어갈까 망설이기도 했지만, 불교 철학에 근간을 이루고 있는 교의이기 때문에 자칫 흥미를 떨어뜨릴 염려를 안고서라도 설명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여시(如是)에서 여(如)는 진여실상(眞如實相)의 준 말입니다. 그렇다면 진여실상은 무슨 뜻일까요! 그것은 ‘있는 그대로 참답고 실다운 모습’이란 뜻입니다. 이것을 줄여서 ‘있는 그대로’라고 많이 쓰입니다. 하면 그 실상은 어떤 모습일까요! 부처님께서는 일체개고(一切皆苦), 제법무아(諸法無我), 제행무상(諸行無常)의 삼법인(三法印)이 실상이라고 하십니다. 거기에 그 세 요소를 포괄하고 있는 연기공성(緣起空性), 중도실상(中道實相)을 포함하여 말하기도 합니다. 이것을 줄여서 苦, 空, 無常, 無我 라고 부릅니다.

그러면 지금부터 그 하나하나 의미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무상(無常)에 관하여 이야기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무상에 관한 일반대중의 이해는 아주 비뚤어져 있습니다. 흔히 덧없음, 허무, 염세 정도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여기서 부처님의 생생한 음성을 들어 볼까요! 아함경의 말씀입니다.

 “오, 브라만이여. 그것은 그 주위의 모든 것을 받아들이면서 유유히 한없이 흘러가는 커다란 강물과 같은 것이다. 그 흐름이 멈추면(열반을 말함, 반야심경에서는 深般若波羅蜜이라함) 순간도, 찰나도, 그 다음도 없다. 그러나 그것은 계속 흘러간다. 브라만이여, 인간의 삶이란 큰 강과 같은 것이다.”   

그렇습니다. 무상이란 덧없고 허무하고 염세적인 개념이 아니라, 이처럼 고정되어 있지 않고 순간순간 변화한 흐름으로 나투는 것을 무상이라 부릅니다. 이 세상의 형상을 가진 그 무엇도 고정된 모습으로 존재하는 것은 없습니다. 고정된 모습으로 존재하는 것은 우리의 착각에 기인한 것입니다. 이 세상에 변하지 않는 실체는 없습니다. 조금만 주의 깊게 살펴보면 이 사실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임으로써 우리는 집착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괴로움의 발생 요인 중 하나가 모양과 상태 또는 상황을 고정시켜서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집착이라고 합니다. 찰나라도 고정된 모습과 상태가 없다는 사실을 깊이 자각하게 된다면 그 흐름에 맡겨 동시·전체로서 열려있는 삶, 함께 하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다음은 무아(無我)에 관하여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들은 무엇을 나라고 생각할까요, 유물론자든 유신론자든 정신적 활동과 유기적 조합체인 육체를 합쳐서 나라고 하는 것에 이견이 없을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이것을 명색(名色)이라 부릅니다. 명은 정신활동 영역을 말하고 색은 유기적 조합물을 말하겠지요. 또 불교에서는 정신활동이든 육체이든 독립되고 고정되고 영원한 실체로서의 존재가 아니라 다만 조건과 상호의존(연기공성)에 의하여 존재할 뿐, 독립된 실체, 고정된 실체, 영원한 실체로서의 존재인 나는 없다고 말합니다. 또 이것을 다섯 가지 쌓임(五蘊)으로 세분화하기도 합니다. 그것은 色, 受, 想, 行, 識 다섯입니다.

결국 우리가, 나라고 굳게 믿고 있는 실체는 이 유기적 조합물인 색(色)과 정신활동인 수상행식(受想行識)의 가합(假合)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색온(色蘊)은 무엇을 말 하는지 살펴볼까요. 그것은 물질적 요소인 사대(四大:地水火風)와 거기에서 파생된 지각(知覺)의 요소인 소도색(所導色)이 색온입니다. 어떤 정해진 형태를 지닌 것(고체), 이것을 지대(地大)라고 합니다. 유형성(流形性)을 지닌 형태를 수대(水大)라 합니다. 에너지, 예를 들면 전기, 불, 인력(引力), 자력과 같은 것들을 화대(火大)라고 합니다. 風大는 산소, 수소, 질소 등 공기를 말 하겠지요. 거기에다 다섯 가지 물질적 감각 기관인 눈, 귀, 코, 혀, 몸의 지각(知覺)으로 인식된 모양, 소리, 냄새, 맛, 닿음과 마음의 대상 영역인 관념, 개념, 생각이 소도색입니다. 우리의 육체란 이것들의 조합이라 할 수 있겠지요.

다음은 정신영역인 수온(受蘊)은 무엇일까요. 여기에는 물질적, 정신적 기관이 외부 세계와 접촉하여 얻어지고 경험되는 유쾌함, 불쾌함, 유쾌하지도 불쾌하지도 않은 느낌 등의 감각(감정)등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느끼게 되는 것에는 여섯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그 하나는 눈을 통하여 모양을 보고, 그 둘은 귀를 통하여 소리를 듣고, 그 셋은 코를 통하여 냄새를 맡고, 그 넷은 혀를 통하여 맛보고, 그 다섯은 몸을 통하여 몸에 닿은 감촉을 느끼고, 그 여섯은 의식을 통하여 다섯 가지 감각기관(眼,耳,鼻,舌,身)을 통한 저장된 기억과 관념, 생각 등과 접촉함으로써 일어나는 유쾌함, 불쾌함, 유쾌하지도 불쾌하지도 않은 느낌과 같은 모든 물질적 정신적 감각이 여기에 해당됩니다. 

다음 상온(想蘊)은 무엇일까요. 상온은 인식(認識)입니다. 이 인식도 수온인 감각과 마찬가지로 여섯 가지 감각 기관이 외부 세계와 접촉하여 발생합니다. 물질적이든 정신적이든 대상을 인식하는 것이 상온입니다.

다음 행온(行蘊)은 무엇일까요. 이것은 의도적 행위를 말합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kamma 즉 업(業)으로 알려져 있는 것은 바로 이것으로부터 발생합니다. 불자님들이 즐겨 하시는 대비주를 독송하실 때 그 행위에 앞서, 대비주를 독송하고자 하는 의도가 일어납니다. 일어난 생각을 의업(意業)이라 하며 입으로 독송하는 행위를 구업(口業)이라 하며 몸에 붙어버린, 이것을(문학적 용어로 肉化라고 함) 身業이라 하여 身, 口, 意, 三業이라 합니다. 
우리는 흔히 ‘업이 두텁다. 또는 무겁다.’ 라 하여 업을 부정적 개념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은데요, 업은 의도를 지닌 모든 행위를 말합니다. 선한 행위는 선업이요 악한 행위는 악업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삼업을 청정히 한다고 하지 삼업을 없앤다고 하지 않습니다. 고로 지성으로 염송하신 대비주 또는 다라니 등등은 삼업을 청정하게 하는 행위이지 삼업을 없애는 행위가 아닌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식온(識薀)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식은 여섯 가지 기관(안, 이, 비, 설, 신, 의)중 하나를 근거로 그것에 상응하여 나타난 여섯 가지의 외적 현상(모양, 소리, 냄새, 맛, 닿음, 관념)중 하나를 대상으로 하는 반작용입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하얀 색깔의 화병이 있습니다. 눈이라는 기관을 통하여 식이라는 기관이 인지(認知)합니다. 이것을 안식(眼識)이라 하며 다른 감각 기관도 마찬가지겠지요. 여기서 우리가 잘 알고 넘어 가야할 사항은 식온(識薀)은 대상을 인지하는 것이지 인식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하얀 색깔의 화병을 식온이 인지하면 상온(想蘊)이 하얀색이라고 인식합니다. 거기에서 수온(受蘊)이 유쾌해 하거나 불쾌해 하거나 유쾌하지도 불쾌하지도 않은 감정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따라서 식온은 대상을 여섯 가지 기관 중 하나를 통하여 깨닫는 것일 뿐 대상을 인식하는 것이 아닙니다.

위와 같이 나(我相)라고 불리는 것은, 따로 독립되고 고정된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조건과 조건이 만나서 가합(假合)된 상호의존적 존재로서, 나라고 불릴만한 실체가 없다는 것이 무아(無我)의 논리입니다. 여기서 의문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 정신 작용이 우리의 영혼 아니냐. 그 놈이 죽어서 천국도 가고 지옥도 가고(유신론자의 논리) 윤회도 하는 것 아니냐.(힌두교 또는 불교를 오해하고 있는 자들의 논리) 라고. 의문은 묻어 두십시오. 뒷장에 가서 설명하기로 하겠습니다. *무아론과 윤회에 관하여

 /우득 스님 (와우정사 주지·한라정토회 지도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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