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댓불 - 스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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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댓불 - 스밈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22.08.24 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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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식구로 온전히 섞이며 살아가야 하는 데야
얼마나 많은 시간과 정성이 필요하랴
기다려야 한다
스민다는 것은 기다림이다
이애현(수필가)  - 수필과비평 2011 수필등단, 한국문인 2019 시 등단, 제주문협, 동인  『脈』 , 제주수필문학, 혜향문학회원, 작품집 : 수필집〈따뜻한 소실점〉, 시집 〈묵은 잠, 뒤적이며〉
이애현(수필가) - 수필과비평 2011 수필등단, 한국문인 2019 시 등단, 제주문협, 동인 『脈』 , 제주수필문학, 혜향문학회원, 작품집 : 수필집〈따뜻한 소실점〉, 시집 〈묵은 잠, 뒤적이며〉

잘 마르지 않는다. 어제, 그제 정도의 바람과 햇볕이면 충분히 말랐으리라 생각했다. 요 며칠 전, 지인으로부터 지공예로 된 쟁반 한 세트를 얻어왔다. 진갈색 바탕에 빨간색 커다란 연꽃 한 송이가 활짝 핀 모양에, 아침 햇빛 한 줄기만 보태면 방그레 웃을 것 같은 봉오리 진 연꽃을 나란하게 위, 아래 배치하여 장식해 놓은 것이다. 
고와서 감탄하는 내 모습을 보며 ‘그 정도는 아무나 만들 수 있다.’며 겸양의 말을 건넸지만, 테두리며 손잡이가 여간 고급스러운 게 아니다. 색감도 색감이려니와 어떻게 한지로 이런 멋진 쟁반을 만들 수 있는지 손매 야물지 못한 이 눈으로는 그저 좋고, 그런 재주가 부러울 따름이다.
잘 쓰던 다른 쟁반은 모두 제쳐두고 예뻐서 자꾸 쓰기 시작했다. 그러다보니 웬걸 행주질이며 뜨거운 물을 붓다 흘리든지 했던 자국인가. 쟁반 바닥 부분이 들떠 있었다. 종이로 만든 물건이라 사용하는 데 이런 맹점이 있구나 싶었다. 마른행주로 눅눅해진 곳을 종이가 일지 않도록 가볍게 톡톡 찍듯이 닦아 말려 볼 생각이었는데 생각처럼 되질 않았다. 
어렸을 때 방바닥에 장판지를 새로 들이는 날이면 어머니께선 며칠이고 마르기를 기다렸다. 그러는 동안 방바닥이 더럽지 않게 우리를 까치발로 다니게 하거나, 빙 돌아서 다니도록 했다. 유기름을 바르고 그것이 마르면 또 덧칠하기를 반복하며 방바닥 장판지를 들이는 데 여간 공들이며 신경을 쓰는 것이 아니었다. 유기름을 덧발라 말리면 장판이 더 질기고 때탐도 덜하다고 들었던 기억이 있다. 유기름이 무엇으로 만든 것인지 그때는 몰랐지만 냄새도 고약했다. 무엇보다 까치발로 다녀야 되는 것을 잊고 그냥 덤벙덤벙 디뎌 방바닥에 얼룩이 지는 바람에 야단을 맞았던 기억만이 새롭다. 
‘맞다, 식용유를 바르면 되겠구나?’ 남들이 모르는 대단한 것이라도 혼자 알아낸 양, 식용유를 바닥에 발라 보았다. 기름이라 윤기가 났다. 뜨지 않고 질기게 만들어 볼 욕심으로 멀쩡한 부분까지 이리저리 돌리며 발랐다. 바른 후, 그것을 이틀이나 통풍이 잘되는 베란다에 엎어 놓았던 것이다. 바람이 잘 드는 곳에서 위치를 바꾸며 수시로 뒤집어 놓기를 반복했다. 다 마르면 한 번 더 덧칠해 볼 참으로 기다렸다. 
설거지를 마치고 이것저것 주섬주섬 정리하였다. 식구가 없어도 집안일이라는 것은 소소하게나마 늘 손길을 요구한다. 식도와 과도를 나란히 꽂아 놓고 잠시 도마에 눈이 갔다. 손잡이가 없어서일까. 늘 도마 앞면이 싱크대 벽을 향해 놓는데 반대로 뒷면이 벽을 향해 있었다. 아주 하찮고 소소한 것이지만 늘 쓰는 사람만 쓴 후, 넣는 자리에 두는 것이라 크게 불편할 것이야 없지만 뭔가 어색했다. ‘이럴 리가 없는데 ….’ 의아했다. 순간 ‘아 – 어제 며느리가 다녀갔지?’ 
새 식구가 오면서 며느린 며느리대로 사소한 것에도 신경 쓰며 놓았을 테지만 도마의 앞면과 뒷면에 차이를 두는 시어미의 하찮은 부엌살림에서의 원칙을 어찌 알까. 무엇보다 소소한 것이라 일러 주지도 않았기에 눈치로 알아차리는 데도 한계가 있지 않은가. 
작년 명절 때였다. 옥돔미역국을 끓이려고 익혀 놓은 생선을 가시 바르도록 내어 줘 한참 후에 끓이려 봤더니 젓가락으로 여태 가시를 바르고 있었다. 두 마리 다듬는 데 한나절이 지났건만 손에 익지 않은 일이라 그러려니 생각하며 건네받고 서둘러 다듬기를 마무리했다. 
겨우 학교 공부 마치고 취직 후 새 식구로 들어 온 사람이 아닌가. 내 새끼도 별반 다르지 않음이란 생각에서 잘했다는 말로 ‘그리 잘하지 못함’을 분위기로 알리며 그러려니 위안 삼았던 적이 있다.
한 사람을 선택함으로써 감당해야 하는 전혀 다른 식구들과의 동화, 익숙지 않음을 익숙함으로의 변화,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었던 새로운 가풍이 건네는 낯섦, 소소하고 하찮은 부엌살림인 도마를 세워 두는 일 하나에도 도마의 어느 쪽을 벽면에 붙여 세워야 하는지를 말없는 말로 터득하라면 내 욕심일 게다. 
지공예로 된 쟁반에 바른 기름이 여러 날 말려도 온전히 스미지 않았다. 스미려면 한참을 더 기다려야 될 것 같다. 그 많은 살림 중 하나에 불과한 이런 사소한 것에도 기다려야 되고 또 기다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물며 내 식구로 온전히 섞이며 살아가야 하는 데야 얼마나 많은 시간과 정, 성이 필요하랴. 기다려야 한다. 스민다는 것은 기다림이다. 전혀 다른 가풍 속에서 하나로 섞이는 자연스러운 동화와 사람과의 융화가 더없이 소중함이다.
스밈, 서둔다고 될 일이 아닌, 시간을 내어 지키며 감싸 안아야 하는 기다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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