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안봉려관 신행수기 공모 최우수상 수상 작품 - 가문동 바당의 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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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안봉려관 신행수기 공모 최우수상 수상 작품 - 가문동 바당의 연가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22.08.31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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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국 스님 말씀을 테이프로
듣고 또 듣고 하다가 드디어
테이프가 다 늘어져 던지려 할 때
바로 그 순간 깨달았습니다

저의 어머니께서는 불심이 남달리 돈독한 분이셨습니다. 하귀에서 관음사까지 다니셨습니다. 그때 제가 어릴 때니 7~8살 때부터 어머니를 따라 관음사엘 다녔는데 당시에는 차도 없이 하귀에서 관음사까지 걸어서 갔던 생각이 납니다. 가다가 관덕정 제일 큰 집에 사시는 이방원 거사님 댁, 대행각 보살님이 저의 모녀를 친절히 대해주시고 밥도 여러 번 먹은 기억이 납니다. 
그 당시 관음사에 동원 스님과 상좌이신 법장 스님이 계셔서 그 스님 때문에 다닌 걸로 기억합니다. 그러던 중 동원 스님께서 외도에 있는 ‘수정사’ 절물엘 오신 걸로 압니다. 그때부터 어머니와 저는 가까운 절 수정사에 다니면서 저는 어린 나이에도 불법을 익혔습니다. 천수경, 반야심경 정도는 초등학교 때부터 책을 안 보고도 줄줄 외울 정도였습니다. 그러던 중 동원 스님께서 한라산 석굴암을 창건하신다고 하시고 여러 번 석굴암을 방문하면서 절터를 닦던 중 서과양에 있는 집 한 채를 빌고 백일기도 중에 동원 스님은 젊은 나이에 돌아가시고 상좌이신 법장 스님과 여러 신도들이 석굴암을 창건하셨습니다. 
도중에 법장 스님께서는 일본에 가셨고 저의 어머니와 여러 신도들이 정말 어렵게 비만 피할 정도로 석굴암 사찰을 만드셔서 기도드리러 자주 올라갔습니다. 어머니께서는 한 번 올라가면 몇 달을 안 내려오곤 하셨습니다. 그러시면서 한번은 집에 오셔서 ‘너 때문에 내려왔노라’고 했습니다. 
나를 결혼시키고 어머니는 올라가셔서 절에 살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를 스물한 살 되던 해 결혼시키고 올라가려 했는데 아버님이 갑자기 돌아가시고 저도 애를 낳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일곱 달 정도에 조산되어 낳고 보니 정상적인 아이가 아니었습니다. 당시에는 임신을 하고도 해녀생활을 했습니다. 어머니도 해녀였고, 어머닌 제가 다섯 살 때부터 바당 바위에 질빵으로 볼끈 저를 묶어 놓고 물질을 했습니다. 마땅한 직업이 없던 남편과 결혼하다보니 자연스레 저 역시 물질을 하게 된 것입니다. 철모르게 다른 사람들도 다 그렇게 사는데 하면서 임신을 하고서도 깊은 바다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수압 때문에 숨을 오래 참다보니 그것이 원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때부터 저와 어머니는 아이에게 매달렸습니다. 3대 독자 첫 아들이라고 기뻐할 새도 없었고 낳자마자 어머니께서는 목욕시키고 솜이불을 뜯어 애기를 솜으로 싸며 정성을 들여서 목숨만이라도 부지하게 해달라고 빌었습니다. 
병원시설도 잘 되어 있지 않은 시절이라 그저 아이에게 침을 맞히면서 어머니와 저는 부처님한테만 매달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7개월쯤 되었을 때 아기가 경기 비슷하게 하더니 숨을 못 쉬어서하더니만 그냥 숨도 멈추어 버리는 것입니다. 아이를 기저귀에 싸고 친정아버지와 남편과 둘이서 골채에 넣고 묻으러 가려할 때 어머니께서 마지막으로 아이에게 염불을 해주는데 도중에 힘없는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렸습니다. 
살아난 것입니다. 그 길로 바로 아이를 안고 하귀에서 시내버스를 타고 시내 병원으로 갔습니다. 의사선생님이 보시더니 “이 아이는 살아도 제대로 살지는 못할 거니까 기대하지 말고 목숨만 부지하는 걸로 여겨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때 비로소 휴 안도의 숨을 내쉴 수가 있었습니다. 살아나서 젖이라도 물리는 것만으로도 철없고 분시모른 어린 엄마는 감사할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때부터 저는 어머니에게 불효자가 된 겁니다. 어머니는 석굴암도 못 올라가시고 집에서 부처님을 모시고 독경하시며 동네 어민, 해녀, 주위분들, 자식들을 위해 항상 기도하시고 특히 막내딸 손자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애기가 12개월이 지나가니 조금 앉고 기어다니고 잡고 일어서려고 하고 웃기도 하고 벽에 기대면 서기도 하고 하더니만 한쪽 다리가 힘이 없어지면서 소아마비가 온 겁니다. 또 철부지 엄마는 우울증 증세가 왔습니다. 나중에 두 번째 임신, 이번엔 낳고 보니 딸이었습니다. 
저는 어머니에게 고통도 뒤로하고 “엄마 이번엔 정상입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기여 정말 튼튼하게 잘 태어났져.”
그 뒤 또 연년생으로 딸이 태어났고, 2년 후 아들이 건강하게 태어났는데 갑자기 하루 지나자 애가 숨을 거뒀습니다. 시골에서 삶이 어려워 출산준비랄 것도 없이 갑자기 진통이 와 낳았는데, 가위소독도 못하고 녹슨 걸로 그냥 태를 자르다보니 태어난 지 하루 만에 그렇게 허망하게 파상풍으로 아들을 보냈습니다. 그 후로 제 성격이 완전 변했습니다. 순진하고, 여자는 말 몰라 3년 눈멀어 3년 귀 막아 3년 이렇게 지내다보면 다 살아진다는 말을 가슴에 담고 살려했지만, 남편한테도 언성이 높아지고 어머니 가슴에 머리를 받으면서 왜 나를 낳았냐고 대들면서 어머니 가슴에 못도 박았습니다. 
어머니는 당신 몸 돌보지 않고 막내딸 손자손녀에 신경쓰다보니 몸에 무리가 와 염불도 제대로 못하시고 몸져눕는 날이 많았습니다. 죄 많은 딸은 제 삶이 너무 힘들어 입에 맞는 음식 한번 어머니에게 제대로 못해드렸습니다. 
그런 막내딸이 다시 9년 만에 임신해서 낳은 게 아들, 2년 후 또 낳은 게 막내아들 이렇게 저는 정말 애 낳는 기계처럼 아이를 낳았고, 우리 집 빨랫줄에는 기저귀를 걷으면 또 기저귀가 나풀거렸습니다. 그리고 그런 막내딸 옆에 늘 같이할 것만 같았던 어머니는 제가 막내아들 낳고 6개월 만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마지막으로 어른들이 어머니를 다른 방으로 모시라고 하실 때 제가 어머니를 안고 옮기면서 “엄마 미안해, 엄마 미안해!”하고 울면서 말했습니다. 내 눈물이 어머니 얼굴에 떨어지니 어머니가 순간 눈을 살며시 뜨며 힘없는 말로 “딸, 울지 말고 잘 살라. 용서하며 살라.” 이 말을 남기시고 가셨습니다. 그렇게 가시면서도 못난 막내딸을 걱정하시며 마음 편히 못가셨습니다. 그때 제가 매일 남편하고 다투는 걸 보았기 때문에 마지막 가시면서도 제 걱정을 해주셨던 것 같습니다. 
석굴암에 다니시던 나이 드신 신도님께서 건강상 석굴암을 못 올라가니 포교당으로 절을 창건하자고 해서 지은 절이 광령2리에 있는 법장사이며 스님께서는 일본에서 귀국해서 법장사에 계실 걸로 했는데 갑자기 일본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신도들과 법장 스님 가족들이 협조로 절을 지었고 낙성식 때는 혜국 스님께서 설법해주셨습니다. 그때 하신 혜국 스님 말씀 중에 “나는 20점 밖에 안 된 점수를 가지고 100점짜리 서울대 가는 실력하고 비교하고 착각하고 사느냐”는 말씀은 처음엔 그저 그런 말씀이구나 했는데 테이프가 다 늘어지도록 차에서 듣고 또 듣고 나중엔 고장이 나 버리려는데, 아! 바로 그때 스님 말씀이 나를 두고 하신 설법이셨구나, 진짜 나구나, 나가 20점짜린데 주위에 80점 100점짜리들 보고 그 삶만 생각했었구나 하는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당시 제 속은 까맣게 타들어 갈 대로 타 들어간 상태였습니다. 특히 막내아들이 13살 때 교통사고로 보낸 후 제 삶은 살기가 싫어지고 다른 자식들이고 남편이고 모두 그 사람들의 노예로 살았구나 하고 원망하며 제 자신을 포기할 때쯤이었습니다. 바로 그 때, 혜국 스님 말씀을 1년 동안 차에서 테이프로 듣고 또 듣고 하다가 드디어 테이프가 다 늘어져서 던지려고 할 때, 바로 그 순간 깨달았습니다. 
제가 어머니에게 불효한 거, 남편한테 했던 행동, 언어 모든 것을 되돌아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이제부터라도 어머니께 못해드렸던 거, 주위 어르신들에게 내가 도움을 줄 수 있는 일이면 뭐라도 해서 조금이라도 빚을 갚자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보현’이라는 이름이 정말 마음에 와 닿아서 태고보현봉사단에 입단해서 20년 동안 온 몸과 마음으로 몸 사리지 않고 하고 있습니다. 
시어머니께서 91살 때 고관절을 다치셔서 그것 때문에 수술하는데 마취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중환자실에서 며칠 있다 보니 일반실로 옮긴 후부터 치매기가 있어 3년 동안 집과 병원 생활하시며 가족들도 어머니도 자기가 열 달 동안 품었던 딸과 아들도 못 알아보시는데 유독 저만 이름을 꼭 불러주셨습니다. 제가 조금만 안보여도 “춘열아! 춘열아!” 그러셨습니다. 식구들이 시설에 보내자고 했지만 안 된다고 했습니다. “난 남을 위해 봉사하면서, 내 가족을 다른 사람이 돌보게 못한다”고, “제가 알아서 할 테니 그런 말 하지 말라”고 하고 시어머니를 모셨습니다. 힘들 때는 자식들을 생각했습니다. ‘이분이 아니었으면 아꼬운 내 새끼들 어떻게 태어났을까’ 미웠던 남편도 이런 마음으로 대하다 보니 가정에 평화가 오고 자녀들이 잘되고 성공하고 주위에서 칭찬도 해주셨습니다. 특히 자녀들이 잘 되는 게 전 정말 행복했습니다. 
제 친정어머니께서는 항상 시원한 거만 찾으셨는데 해녀생활하면서 그걸 한 번 못해드린 게 한이 되었습니다. 어머니한테는 못해드렸지만 내 주변 어르신들한테 해드리면 어머니에게 못해드린 걸 보답한다는 마음으로 올해 10년째 바다에 가서 우무를 채취해서 하얗게 바래서 끓이고 시설 10곳 어르신들한테 공양을 올리고, 그분들이 드시고 좋아하는 걸 보면 내년을 기약 안 할 수가 없습니다. 내가 건강한 한 해드리려고 올해도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제 아이들 아빠도 암 판정 받고 3개월에서 6개월밖에 못 산다고 했는데 거의 3년을 살고 올해 1주기를 맞이합니다. 그때 반야사 보살님이 49재 입제하고 7일째 방문했을 때 광명진언을 항상 해드리라고 해서, 49재 때 광명진언 2권을 사경하고 신묘장구대다라니를 사경해서 49재 마지막 날 태워드리려고 영전 앞에 놓아드렸습니다. 49잿날 새벽 3시 반 정도에 꿈에 돌아가실 때 입혀드렸던 고운 한복을 입으신 모습으로 웃으면서 “고맙다, 고마워이!” 하면서 나타나셨습니다. 아, 내 기도가 헛되지 않았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도 저는 항상 광명진언을 자기 전과 일어나서 독송하고 있고 나 자신을 낮추고 내가 노력해서 주위에 분들이 행복하면 저 또한 두 배로 행복하고 이제는 어머니들, 남편, 사랑했던 작은 아들, 잘 보내드리고 꼬여있던 매듭도 풀었고 걸려 있던 가시도 빼냈습니다. 
미련도 없이 후회도 없이 흐트러진 자리를 모았습니다. 엉켜있던 모두를 보냈습니다. 홀가분한 마음으로 떳떳한 마음으로 내일을 위해 어제를 지웠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발원합니다. “관세음보살님! 제게 건강을 주시옵소서. 또한 아픈 손가락 하나가 있습니다. 2급 장애로 살고 있는 큰아들보다 하루만 더 살게 해 주십시오. 건강주시면 내 이웃을 돌아보며 살아가는 불자로 살다가겠습니다. 고맙습니다.”하고 간절하게 기도하고 또 기도합니다.  
저는 지금 나이가 올해 76세이지만 5급 장애를 갖고 있습니다. 한쪽 눈이 실명이고 한쪽 귀가 전혀 안 들리고 그렇지만 살아가는데 지장 없이 살고 있고, 오늘 이후 한쪽 눈마저 실명되고 한쪽 귀마저 안 들리면 그때까지 만이라도 내 힘이 필요한 데가 있으면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 김춘열 불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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