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빠사나 길라잡이 (55) - 고뜨라부(gotrabhū, 種姓) 지혜
상태바
위빠사나 길라잡이 (55) - 고뜨라부(gotrabhū, 種姓) 지혜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22.08.31 10:4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유현
유현

30대 초반에 팔당호와 두물머리(양수리)를 조망할 수 있는 경기 광주시 남종면 금사리 어느 농가에서 약 2년 정도 고시공부를 한 적이 있습니다. 
가끔 이 강가에 홀로 서서 시험에 합격하지 못한다면 강을 건널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 수구초심首丘初心으로 성산 일출봉과 수마포구를 그리워하곤 했습니다. 
40년의 세월이 흐르고 흘러 망팔望八을 앞둔 지금, 눈감으면 떠오르는 가슴 속의 강은 그 시절의 팔당호도 아니고, 일출봉의 뒤로 펼쳐지는 망망대해도 아니며 모태도 아닌 피안으로 가는 강입니다. 
그 강을 건너는 뗏목을 구하려고 사마타와 위빠사나 수행을 해왔습니다. 오온을 나라고 생각하는 20가지 유신견을 극복하고 사견을 버리고 의심을 건넜으나 아직도 오온에 대한 ‘나는 있다.’라는 자만에 얽매이는 잠재성향들은 불쑥 수면 위로 떠올라 멸절되지 않았습니다.  
옛 부처님과 조사님들은 이미 떠나 버렸고, 해탈의 이정표를 안내하신 선지식들도 한 번 가고 나니 다시 돌아오지 않습니다. 홀로 머물며 깊이 생각하다가 문득 중국 당나라의 시인 최호가 읊조린  〈황학루黃鶴樓〉 의 시구가 떠올랐습니다. 
“날은 저무는데 내 고향 어귀는 어디쯤인가? 강가에 이는 안개가 나를 시름겹게 하는구나. 日暮鄕關何處是 煙波江上使人愁” 
참 고향(real home)을 찾아 이 강을 건너지 아니한다면 나는 정처 없이 떠도는 저 하늘의 흰 구름 신세를 면할 수 없다는 두려움과 절박감에서 다섯 무더기들[五取蘊]의 무너짐을 수관하면서 뗏목에 올라타서 저 강기슭으로 노를 저었습니다.
종성의 마음(gotrabhū-citta)이 일어난 것입니다.  『아비담마』 에서는 첫 번째 성자의 경지(ariya-gotra)인 예류도를 얻기 바로 전 찰나에 범부의 이름을 버리고 성자라는 이름을 얻게 되는 찰나의 마음이라고 부릅니다.
이 찰나의 마음을 종성의 지혜라고 말합니다. 이 지혜는 열반을 인지하는 측면에서는 도와 같지만 도와는 달리 사성제를 덮어버리는 오염원들(kiesa)의 음침함을 내쫓지 못한다는 점에서 도(magga)로 전향하는 역할만 합니다.
다시 말하면 종성이란 강한 위빠사나의 마음으로 예류도를 성취하는 무간연無間緣이 된다는 뜻입니다. 
먼저 견도(見道, dassana-magga)로서 세 가지 족쇄를 풀었다면 예류도를 성취하였다고 말할 수 있으나, 보기만 할 뿐 해야 할 일을 마치지 않는다면 여전히 종성(고뜨라브)일 뿐입니다.  
 『앙굿따라 니까야』의  「공양 받아 마땅함 경」 (A9:10, 10:16)은  『아비담마』 에서 설하는 종성에 대한 경전의 근거가 되는 경입니다. 
 『아비담마』 에 의하면, 도의 마음은 사성제의 각각에 대해서 동시에 네 가지 기능을 수행한다고 말합니다. 그 넷이라 함은 괴로움을 철저히 앎(통달지), 그것의 원인인 갈애를 버리는 것, 그것의 소멸인 열반을 실현하는 것, 성스러운 팔정도를 닦는 것입니다.
예류도, 일래도, 불환도, 아라한도의 네 가지의 도(magga)를 지(知. ňāna)와 견(見, dassana)에 의한 청정이라 말합니다. 이 법들에 대하여, 해야 할 일을 마치지 않았기 때문에 저가 경험한 것까지만 쓰고 침묵함이 마땅합니다.
위빠사나 수행을 통해 정신과 물질의 고유 성질을 보고 이것들이 찰나와 조건을 통해 변한다는 것을 앎으로써 현재의 내 삶은 세상과 다투지 않고 자연을 닮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습지에서 생겨서 피어난 홍련이나 백련처럼 물을 벗어나서 물에 젖지 않으려면 목숨이 끊어질 때까지 명상하는 삶은 지속되어야 합니다.  
저는 주로 동틀 무렵의 고요함 가운데 명상을 시작하고, 다음의 게송을 읊조리며 명상을 마칩니다.
“법(dhamma)을 보았고, 법을 체득했고, 법을 간파했고,
의심을 건넜고, 혼란을 제거했고, 무외無畏를 얻었고, 
부처님의 교법에서 안식을 얻었도다.
바르게 처신하고 누구도 어떤 것도 부러워하지 않는다.
감각적인 즐거움들을 버리고, 
놓아 버리기 어려운 집착을 버렸기에
슬픔도 없고 어떤 바람도 없다.
지나간 일을 한탄하지 않고, 
아직 오지 않은 것을 걱정하지 않는다.
sati-yoniso manasikāra가 지금 여기에 머물고 있다면 
오! 참으로 행복하다.
거센 강물을 건너 피안으로 …”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