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와 함께하는 ‘노자’ 산책 (17) - 도덕경 - “작은 것 잘 보는 것이 밝음이고 부드러움 지키는 것이 강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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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와 함께하는 ‘노자’ 산책 (17) - 도덕경 - “작은 것 잘 보는 것이 밝음이고 부드러움 지키는 것이 강함”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22.09.29 1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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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빛을 이용하여
지혜의 밝음으로 돌아가면
자신에게 재앙이 남지 않는다

1장에서 노자는 이미 무명은 천지의 시작이고, 유명은 만물의 어머니라고 언급한 바 있다. 우리는 이 천지의 시작이 인과적 의미에서의 원인이 아니라 이미 무명과 유명이 공존하고 있음을 앞에서 밝혔다. 그러므로 유명은 무명의 결과물이 아니라 시작부터 함께 부즉불리(不卽不離)로 공동의 존재양식을 띠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천지의 시작은 무라 불러도 유라 불러도 큰 차이가 없는 것이다. 그 어머니를 무(無)라 읽으면 자식은 유(有)가 되고, 그 어머니를 유(有)라고 읽으면 자식은 만물(萬物)이 된다. 이러한 존재 양식은 인과론적 관계가 아니라 근거론적 관계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러기에 그 자식을 알고, 다시 그 어머니를 지키면 죽을 때까지 위태롭지 않게 된다. 
우리의 감각기관은 제한적이다. 문(門)은 주관이 외계와 관계하는 제한된 통로를 의미한다. 이 세계는 반대편 것과의 관계 속에서 부단히 변화한다. 그런데 이러한 세계에 대하여 자신의 의욕이나 자신이 이미 가지고 있는 체계를 가지고 관계하게 되면 왜곡과 제한성을 피할 수 없게 된다. 이때 세계와 관계하는 제한적이고 주관적인 통로를 폐쇄한다는 것은 세계와의 단절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와 관계하는 다른 형식을 말한다. 그것은 작은 것을 보는 것이다. 
견소(見小)에서 견은 목적을 갖고 보는 것이 아니라 보여지는 것을 말한다. 즉 의지가 개입되지 않기에 사물들 사이 구체적으로 보이는 배후나 근저의 존재 형식처럼 쉽게 보여지지 않는 것을 알아챌 수 있게 된다. 이는 모든 감관의 개별적 제한성을 극복하고, 자연계 전체와의 관계 속에서 이해하거나 그 의미를 포착하는 방식이다. 그래서 밖으로 향한 감각기관의 문을 막고, 그 문을 잠그면 몸이 다할 때까지 지치지 않는다. 또한 이렇게 외부가 아니라 자신에게로 주의 집중할 때 인간은 세밀해지고 작은 것을 잘 보게 된다. 그러기에 진정으로 강한 것은 작은 것을 잘 보고, 부드러움을 지키는 것으로 이 부드러움이 자연계가 운행하는 모습이다. 
노자에게 명(明)이나 광(光)은 지(知)와 대비된다. 이 빛은 자신을 드러내면서 상대의 눈을 부시게 만드는 강력한 빛으로 오히려 숨겨야 한다. 습상(習常)은 무(無)의 상도(常道)를 빛과 밝음으로 싸서, 무의 상도가 어두움과 고요의 의미로서만 이해되지 않고 세상을 밝히는 지혜의 빛과 만나, 밝지도 않고 어둡지도 않는 이중부정의 뜻을 함유하여 빛을 감추는 모습을 의미한다. 밝지도 어둡지도 않는 인간의 마음이 소유의 욕심에 빠지지 않고 세상의 균형을 이루어 살게 되면 재앙을 일신에 남기지 않게 된다. 
시작을 아는 것, 근원을 아는 것, 도를 터득하는 것, 이를 위해서는 조용히 욕망의 통로를 막고, 감각과 지각의 문을 닫아 작고 내면적인 것을 꿰뚫어 볼 수 있는 혜안을 가져야 한다. 
한비자 「유로」에는 옛날 은의 주왕(紂王)이 상아 젓가락은 질그릇과 어울리지 않으므로 서옥의 그릇이 필요하다는 말에서 신하 기자(箕子)는 일의 기미를 보고 그 결과를 미리 짐작하여 두려워하였다고 한다. 결국 주왕은 사치를 일삼는 폭군이 되었고 기자는 산속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비움이란 마음속에 있는 참된 자연 지식을 비우는 것이 아니라, 편견과 선입견을 갖지 않기 위한 제반 작업이다. 그리고 비우기 위해서는 쓸데없이 부산하게 일을 벌이거나 욕심부리는 태도에서 벗어나 부드러움을 지킬 줄 아는 차분함이 있어야 한다. 
도덕경에서는 감각기관을 막고, 작은 것을 보기를 권하는 차원에 그치지만, 불교에서의 수행은 이에 대해 아주 구체적인 방법과 체계를 갖추고 있다. 후대에 도가 수련자들은 장생불사를 목적으로 호흡으로 단(丹)을 만들거나, 기(氣)를 쌓는 방법으로 수련을 이어가지만 불교 수행은 지관(止觀) 수행을 통해 감각기관을 닫고 지혜로 세상을 보게 되니, 어쩌면 불교 수행이 이 장에서 말하는 내용과 더 가깝다 하겠다. 
대부분의 인간은 사물을 분석하고 분해하지만, 오히려 사물의 본질을 놓치는 경우가 많다. 이는 분별지 때문이다. 이러한 분별지를 비우고 내려놓을 때 오히려 우리는 전체적인 지식을 얻어 사물의 본모습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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