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한철 『표해록』 해부 - “망망대해 지남철 하나 의지한 채 항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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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한철 『표해록』 해부 - “망망대해 지남철 하나 의지한 채 항해”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22.10.27 1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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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날도 차츰 맑아지고
시간이 있으며 배도 화살처럼 빨라
하루에 1,000여 리를 가니
유구 땅도 그리 멀지 않았소


장한철 일행이 조천포구를 떠난 지 고작 하루밖에 지나지 않았는데도 십수 년이 지난 것처럼 선원들은 피로에 지쳐 있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푸른 파도일 뿐, 섬도 하나 보이지 않은 망망대해를 지남철 하나 의지한 채 항해를 한다.

지남철을 배 위에 올려놓고 방위를 측정해 보았다.


격세지감을 느끼는 대목이다. 지금 같으면 전자측정기를 사용, 한 치의 오차도 없겠지만 1771년 당시는 선원 29명을 태운 작지 않은 배가 항해하는 데 동서남북을 별자리를 보고, 지남철을 보고 방향을 정했다니…….

“저것이 흑산도일 겁니다.”


선원들 특히 사공은 경험을 중히 여길 수밖에 없는 처지라 정확히 눈에 보이는 섬을 흑산도라 지칭하는 데서 그나마 책을 많이 읽은 선비 장한철에게는 약간 의아심을 품는 말을 한다.

“한라산은 남쪽에 있고 크오. 흑산도는 북쪽에 있고 작소. 이 배가 표류해 서남쪽의 바다에 있소. 그러니 한라산은 보지 못하고 흑산도를 볼 까닭이 있겠소?”

장한철의 말에 여러 사람이 말을 한다.
“우리가 정신이 나가고 마음을 잃어 분별력이 떨어진 모양입니다. 선비께서는 사태를 정확히 파악하여 말씀을 하는 것으로 보아 정신이 멀쩡한가 보오.”

한참을 지나니 갑자기 동북풍이 일고 조금 지나니 북풍이 세게 불어 배가 바람 따라 마치 화살처럼 빨리 나아갔다.

“일찍이 지도를 보니, 대유구와 소유구가 남해 밖에 있었소. 이는 곧 한라산의 정남 쪽이오. 1488년 윤정 월세 교리(조선 시대 때 종 5품 벼슬) 최부는 42명의 일행과 함께 표류하다 멀리서 ‘유구’(오키나와)를 보게 되었지만, 동풍을 만나 정박하지는 못하고 명나라(중국)로 표류해 갔소. 내가 작년(1769년) 가을에 한라산에 올라갔을 때 하늘도 맑고, 파도도 잔잔하여 먼 곳까지 바라볼 수가 있었소. 그때 남쪽 바다 밖에, 맨눈으로는 더 볼 수 없는 먼 곳에, 한 줄기 흰 모래밭이 보였소. 이는 흰 모래밭이 아니고, 흰 바다였소. 이로 보아 유구와 거리는 불과 1,000여 리에 지나지 않소. 지금은 날도 차츰 맑아지고 시간이 있으며 배도 화살처럼 빨라 하루에 1,000여 리를 가니, 유구 땅도 그리 멀지 않았소.”


명나라 태조 주원장이 1372년 국서를 보내 “유구가 바다 멀리 있어 지금껏 모르고 있었으나, 이제 특별히 사신을 파견하니 이에 답하여 조공을 행하라.”라는 데서 유구라는 명칭을 썼다. 『고려사』에 고려가 대마라 부르는 오키나와 근방에 있는 예전 우리나라 영토를 정벌한다는 소식을 듣고 사신을 보내왔다고 기록돼 있다. 당시 고려에서는 멀리서 온 유구 사신을 박대하지 않고 후하게 대접해 주었다. 또한, 왜구에게 피랍된 조선인을 송환해 준 것에 감사 표시도 했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조선과 유구의 관계는 사신을 보내 서로 도우며 유구에 표착한 조선인을 돌봐 주는 등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제주 목사 이기빈은 유구 태자가 표류하던 상선을 습격하여 배에 싣고 있던 재화를 빼앗았다. 이에 광해 5년(1613)에 제주 목사 이기빈은 판관 문희연과 함께 귀양 가게 되었다. 제주도문화재위원회(2010) 『제주도 표도 및 표류 관계 사료 조사』에서 보듯 유구 태자를 죽임에 몰아넣었기에 다음 1771년 1월 5일 자에는 유구와 조선 탐라인들의 사이가 안 좋게 나타나는 경향을 보인다. 
“옛날 유구는 우리나라와 사이좋게 오고 갔소, 그래서 유구 사신 ‘옥지’가 오면 배를 승평관에 정박시키기도 하였소. 승편관은 지금의 전라도 순천부요. 비록 바닷길이 멀리 떨어져 있어 여러 번 외교 사신들이 오고 가지는 못했소. 유구 사신이 오고 간 것은 세 번이오. 유구 사신 이름은 옥지이고 나머지 두 번을 오간 사신 이름은 잊었소.”

장한철의 유식함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고려 말인 1389년 8월 중산왕이 사신 옥지를 파견해 신하를 칭하고 왜구에게 붙잡혀간 피로인과 유황, 소목, 후추 등을 바쳤다. 당시만 해도 유구는 일본 땅이 아니었다.

조선조 중기, 유구국 국왕이 바다에서 표류하여 일본에 사로잡히게 되었는데, 유구 태자가 보물을 배에 가득 싣고 일본으로 국왕을 구하러 가다가 표류하여 탐라에 상륙하게 되었다. 이때 탐라 목사 이기빈은 욕심이 많고 인정이 없는 사람이어서 보물을 가지려는 마음에 유구 태자를 잡아 가두고, 죽이려 하였다. 유구 태자는 탐라 목사 이기빈에게 아버지를 구해야 하는 사정을 이야기하고 석방해 줄 것을 간절히 호소했다. 그러나 제주 목사는 끝내 그 호소를 들어주지 않았다. 이에 유구 태자는 분이 하늘에 치솟았지만 어쩔 수가 없어서, 보물을 바닷속에 다 버리라고 한 뒤에 글을 지어 보낸 뒤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한다. 

장한철 표해록 1770년 12월 26일 자에는 유구에 대한 사적 자료를 충분히 엿볼 수 있는 대단한 사적 자료임에 틀림이 없다.

여인국에 대한 스토리가 리얼하게 펼쳐지는 상황을 이어갈 것이다.


/장영주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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