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등 이야기 - “불교 유입 이후 본격적인 등 문화 형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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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등 이야기 - “불교 유입 이후 본격적인 등 문화 형성”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22.11.09 1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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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세기 이전 문화로 확립됐을 것으로 추측
고구려 고분벽화와 삼국사기 통해서 확인

등을 문화로 바라보는 것은 단순히 조명으로 바라보는 것과는 결이 다르다. 조명은 단순히 어둠을 물리치는 데 그치지만, 문화로서 등은 사상과 의식을 바탕으로 한다. 이런 관점에서 등 문화는 인류가 종교와 미의식에 눈을 뜬 신석기 이후 형성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원시적인 등 문화가 아닌 본격적인 등 문화의 형성은 고등종교인 불교의 유입 이후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고구려 고분벽화
고구려 고분벽화

한국 등 문화를 확인할 수 있는 가장 이른 시기 흔적은 357년 축조된 고구려 고분인 안악3호분의 벽화를 통해서다. 안악3호분 주실 대행렬도에 보이는 등롱을 들고 가는 듯한 모습의 인물이 그것이다. 이들은 무덤 주인의 수레 앞에서 불을 밝히는 듯한 모습으로 좌우 3명씩 모두 6명으로 구성돼 있다. 이들이 들고 있는 등은 청사초롱과 유사한 형태이며, 손잡이를 이용해 어깨에 걸친 모습이다. 이는 조선 시대 어가행렬에서 보이는 등롱수(燈籠手)와 유사하다.
어가행렬의 등롱수는 빛을 밝히는 역할보다 왕의 행렬을 알리고 나쁜 기운을 막는 벽사의 역할이 목적인 수행원이다. 즉 실용성보다 의례를 위해 배치되는 인원이다. 이를 통해 이미 천년도 훨씬 전부터 등이 의례의 중요한 도구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외에도 408년 축조된 덕흥리 고분과 5세기에 축조된 수산리 고분의 벽화에도 등으로 추측되는 형태가 확인된다. 아쉽게도 이들 고분벽화는 보존상태가 좋지 않아 여러 논란이 있다. 이 중 하나가 벽화에 보이는 것이 “깃발이냐, 등이냐”에 대한 것이다. 하지만 현장에서 벽화를 직접 확인한 북한학자의 견해가 대체적으로 등이라고 하는 것으로 보아 등이라는 견해에 무게가 실린다. 이 가운데 북한학자 김호섭의 의견은 논란을 잠재우기 충분하다. 그는 “고구려 사람들이 즐겨 춘 춤 가운데는 등롱을 손에 쥐고 추는 춤도 있었다고 보아진다. 그것은 덕흥리 고구려 벽화무덤 서벽과 천장의 벽화에 등롱 같은 것을 손에 쥐고 날아가는 선인과 옥녀를 그린 것을 가지고 말할 수 있다. 이 벽화의 선인과 옥녀가 쥐고 있는 것을 깃발로 보는 견해도 있으나 그 형태상으로나 풍속상으로 보아 등롱이라고 인정하게 된다. 이것은 고구려 사람들이 등롱을 쥐고 춤추는 ‘등불놀이’를 진행하였음을 잘 보여준다.”고 밝히고 있다. 
위의 내용은 정확한 근거가 없으면 밝히기 힘든 내용이며 이런 전통이 현대에도 존재한다는 점에서 설득력이 높다. 현대에도 남아있는 등을 들고 춤을 추는 모습은 동해안별신굿 등의 무속에서 여전히 실행된다. 이들은 등노래굿, 등굿, 등놀이 등으로 불리며 굿의 중요한 과정으로 여겨진다. 제주 무속에도 등의 사용은 확인되며 주로 망자를 인도하는 역할로 사용된다.
남한에는 백제의 대표적인 고분인 무령왕릉에서 등의 형태를 확인할 수 있다. 무령왕릉의 등은 종지 모양이며 벽면의 정면에 1개와 좌우에 각 2개씩 모두 5개가 배치되어 있다. 이들은 타다 남은 심지와 함께 그을린 자국이 발견되어 실제 의식에 사용되었던 물건임을 확인할 수 있다.
문헌 기록은   《삼국사기》 에서 최초로 확인된다. 경문왕 6년(886년) 기록으로 “경문왕이 1월 15일 황룡사에서 등을 구경하고 그 자리에서 백관들을 위하여 잔치를 베풀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진성왕 4년(890년)에 같은 내용이 다시 간략히 보인다. 그러나 같은 문헌에 진흥왕 33년(572년) “전사(戰死)한 사졸(士卒)들을 위하여 (서울) 바깥의 사찰(外寺)에서 팔관연회(八觀筵會)를 개최하여 7일 만에 마쳤다.”는 문헌을 근거로 삼국시대 등문화를 상정하기도 한다. 이는   《증보문헌비고》 에서 유추한 것으로 내용은 다음과 같다.
“매년 중동(仲冬)에 승도(僧徒)들을 궁궐 뜰에 모이게 한 후, 윤등(輪燈)을 한곳에 두고 사방에 향등(香燈)을 밝혔다.” 하지만  《증보문헌비고》 가 20세기 발행된 서적임을 감안하면 추측의 타당성 여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또한   《삼국유사》 에는 등공양의 공덕에 대한 언급도 있어 불교의 유입으로 한국의 등문화가 확실히 자리 잡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글·김두희 (불빛나들이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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