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지식을 찾아서 - 청화스님 법문 - “진리 그대로의 성품 불성광명(佛性光明)이 진여불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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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지식을 찾아서 - 청화스님 법문 - “진리 그대로의 성품 불성광명(佛性光明)이 진여불성”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22.12.08 0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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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체 공덕 다 갖추고 있는 근본 생명이 광명
우주(宇宙)의 본체(本體)가 바로 진리입니다

참선(參禪)은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가장 쉬운 공부입니다. 그래서 불교(佛敎) 용어로 안락스러운 법문 즉 안락법문(安樂法門)이라고 합니다. 다른 것은 까다롭고 경(經)도 많이 외워야 하지만 참선공부는 경을 많이 외울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참선(參禪)은 어디서 빌려온 것도 아니고 또 다른 것을 보태서 하는 것도 아니고, 다만 우리가 본래(本來) 갖추고 있는, 본래 자기의 생명(生命) 자체인 마음을 깨닫는 것이기 때문에 가장 쉽고 가장 경비(經費)도 안 드는 공부입니다. 
그렇게 가장 쉬운 것이 어려운 한문(漢文) 문화권(文化圈)을 거쳐 오면서 어렵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참선 공부가 어째서 쉬운가? 이는 우리가 원래 갖추고 있는 생명(生命)의 보배를 찾는 것이기 때문에 쉽습니다. 나한테 갖추어져 있는 마음자리, 나한테 갖추어 있는 보배 가운데 최상(最上)의 보배 마니보주(摩尼寶珠), 이것이 바로 마음입니다. 그래서 과거(過去)에 도인(道人)들은 자기 마음 찾는 공부를 비유(譬喩)해서 기우멱우(騎牛覓牛)라 했습니다.
소를 타고서 소를 찾는단 말입니다. 우리 중생(衆生)들은 소가 어디에 있는 지  안 보이니까 지금 소를 타고 있으면서도 소를 찾는 격이란 말입니다. 우리 중생(衆生)과 깨달은 도인(道人)과의 차이는 무엇인가. 깨달은 분들은 모든 현상(現象)의 본모습을 봅니다. 본 성품(本性品)을 봅니다. 그러나 우리 중생들은 본 성품을 못보고 겉의 현상(現象)만 봅니다. 우리는 우선 깨달은 분과 우리 중생과의 이런 차이를 분명히 알아두어야 합니다. 그리고 참선(參禪)이 쉽다는 이유는 어차피 현상적(現象的)인 것은 본 성품으로 돌아가기 때문입니다.
봄이 가면 반드시 여름이 오듯이 우리 중생들은 본래(本來) 성품(性品) 자리로 돌아가야 합니다. 방황(彷徨)하는 나그네가 결국은 고향(故鄕)으로 돌아가듯이 그와 똑같습니다. 우리 중생(衆生)은 기왕이면 잘 먹고, 잘 입고, 많이 쓰고, 많이 놀고 또 높은 감투까지 쓰고 싶어 합니다. 이렇게 현상적으로 거기에 얽매어 살아도 무방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산 사람도 역시 어느 땐가는 죽어서 윤회(輪廻)하다가 결국은 본 성품(本性品) 자리로 돌아가야 합니다. 돌아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어떻게 돌아가야 할 것이며 또 우리가 돌아가야 할 고향(故鄕)은 어디입니까? 우리는 부처님이라고도 하고 여래(如來)라고도 합니다.
여래란 말은 무슨 뜻인가 하면 꼭 진리(眞理) 그대로의 성품(性品)을 보고 여래(如來)라고 합니다. 진리에서 나와서 진리로 가고 -같을 여(如)자, 올 래(來)자- 같을 여(如)자, 그 자(字)는 바로 진여(眞如)라! 진리를 의미하는 것인데, 여래란 말은 진리에서 그대로 조금도 흠축(欠縮)이 없이 왔다는 그런 뜻입니다. 따라서 진리에서 왔으니까 다시 진리로 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리(眞理)를 생각할 때는 진리는 고정불변한 어떤 교리(敎理)가 아닙니다. 진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이데올로기 같은 그런 것도 아닙니다. 진리(眞理)는 모든 생명(生命)을 다 감싸 있는 일체(一切) 존재(存在)의 근본자리입니다. 다시 확실히 말씀드리면 우주(宇宙)의 본체(本體)가 바로 진리입니다. 따라서 진리(眞理)는 과거(過去)도 없고, 현재(現在)도 없고, 미래(未來)도 없고 언제나 그대로 있습니다.
진여불성(眞如佛性) 자리는 바로 광명(光明)인 것입니다. 우리는 참선(參禪)을 해서 깨닫고자 합니다마는 우리가 가고자 하는 곳은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이른바 목적(目的)을 뚜렷이 설정을 해야만이 그곳에 도달하려고 보다 더 열심히 노력할 것이고 또한 거기에 걸맞는 수행(修行)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서 자기 목적의식(目的意識)이 희미하면 가고자 하는 열성도 적고 또 공부하는 방법도 거기에 계합(契合)된 걸 맞는 공부를 못합니다.
우리가 가고자 하는 진여불성(眞如佛性) 자리, 여래 자리, 또는 부처님 자리, 이 자리는 그냥 무조건 어디에 인격적(人格的)으로만 있는 것이 아니라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하나의 빛입니다. 
과거에 도인(道人)들이 삼명육통(三明六通)을 하고 신통자재(神通自在)를 하였습니다. 도는 그곳까지는 미처 못 간다하더라도 부처님을 조금 모셨지만 부사의(不思議)한 힘으로 아픈 것이 그냥 나아버리는 원리(原理)가 무엇인가 하면 우리 오염(汚染)된 생명(生命)이 차근차근 정화(淨化)되어서 그러한 광명세계(光名世界)로 가까워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면 자기도 모르는 부사의(不思議)한 힘을 냅니다.
왜 그러는 것인가? 천지우주(天地宇宙)의 근본 생명(生命)인 광명(光明) 자체는 일체(一切) 공덕(功德)을 다 갖추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현상적(現象的)으로 잘나고 못나고 또는 학문적(學問的)으로 지식(知識)이 많고 적음은 마음의 본바탕을 닦아서 가는 생명의 본질인 광명을 향해서 가는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일자무식도 상관이 없고 또 과거에 설사 죄를 지었다 하더라도 별 상관이 없습니다. 
모든 중생(衆生)이 다 불성(佛性)이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쉽게 생각하면 사람이나 동물만 중생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은 부처님의 근본(根本) 도리(道理)에서 볼 때는 유정무정(有情無情), 식(識)이 있는 것이나 의식(意識)이 없는 것이나 또는 유상무상(有像無像), 모양이 있는 것이나 모양이 없는 것이나 모두가 다 중생(衆生)입니다.
따라서 일체중생(一切衆生) 개유불성(皆有佛性), 즉 모든 중생(衆生)이 다 불성(佛性)이 있다는 말은 어떠한 것이나 사바세계(娑婆世界)의 두두물물(頭頭物物), 천지만유(天地萬有)가 모두가 다 불성(佛性)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 불성은 어디에 있는가? 가슴에 있을 것인가, 머리에 가 있을 것인가? 불성(佛性)은 우리 머리 가운데 있는 것도 아니고 가슴 또는 심장에 있는 것도 아니고 우리 몸 전체가 그런 불성의 화신(化身)입니다. 나무 그러면 나무 핵심(核心)인 목심(木心)에 불성(佛性)이 있는 것도 아니고 나무 전체(全體)가 불성이 화신입니다.
불교(佛敎)는 바로 생명(生命)의 종교(宗敎)입니다. 요즈음 생명(生命) 해방(解放) 운동을 부르짖고 있습니다만, 이 역시 생명(生命)이 무엇인가 하는 본질적(本質的)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정말 모두가 다 생명(生命)뿐이라는 것을 알기 위해서는 공부를 해서 불교(佛敎)야말로 견성(見性)을 해서 생명(生命)의 성품(性品)을 딱 체험(體驗)해 버려야 비로소 안단 말입니다. 이렇게 하는 가장 지름길이 참선(參禪)공부입니다. 참선공부는 마음을 열고 하는 공부입니다. 
다시 바꿔서 말하면 선오후수(先悟後修)라, 먼저 선(先)자, 깨달을 오(悟)자, 먼저 이치(理致)나 이해(理解)로 깨닫고 닦아야 참선(參禪) 공부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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