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등 이야기 - “연등회는 국가의 안위를 위해 행해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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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등 이야기 - “연등회는 국가의 안위를 위해 행해져”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22.12.14 2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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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등회, 고려초기 국가의례로 정립
거란의 침략 당시 지방 행궁에서도 열려

부처님오신날 등을 밝히고 붓다의 뜻을 기리는 축제를 “연등회”라 한다. 이는 현재 부처님오신날 행사가 신라시대에 연원을 둔 연등회를 잇는 전통행사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연등회는 신라시대 발원해 고려시대 확립된 행사다. 이는 고려 태조 왕건의 훈요십조(訓要十條), 6조에서 확인된다. 즉, ‘나의 소원은 연등(燃燈會)과 팔관(八關會)에 있는 바, 연등은 부처를 제사하고, 팔관은 하늘과 5악(岳)·명산·대천·용신(龍神) 등을 봉사하는 것이니, 후세의 간신이 신위(神位)와 의식절차의 가감(加減)을 건의하지 못하게 하라. 나도 마음속에 행여 회일(會日)이 국기(國忌: 황실의 祭日)와 서로 마주치지 않기를 바라고 있으니, 군신이 동락하면서 제사를 경건히 행하라.’는 조항이다. 그러나 연등회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에 대한 기록은 찾을 수 없다. 다만 연등회와 함께 훈요십조에 언급된 팔관회가 태조 원년(918) 시작되었다는 기록이 ≪고려사≫에 보인다는 점에서 연등회도 비슷한 시기 시작되었을 것으로 짐작할 뿐이다.
≪고려사≫에 팔관회의 시작에 대한 기록만 보이고, 연등회의 시작에 대한 언급이 없는 이유는 명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팔관회는 고려의 건국과 함께 시작된 국가의례로 신라의 전통을 이어받은 연등회와 차이점에 주목할 만하다. 즉 팔관회는 새롭게 시행되는 국가의례로 꼭 언급할 필요가 있었지만, 연등회는 신라의 전통을 잇는 연례행사로 이미 자리 잡았기에 언급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 다른 견해는 고려사를 편찬한 조선의 유학자들이 고려의 역사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불교행사인 연등회를 누락했을 가능성이다. 그러나 이는 세종 시기 한글 창제 과정에서 불경을 간행하는 등의 모습을 보면 설득력이 높지 않다.
연등회에 대한 최초 기록은 태조 26년(943) 훈요십조를 언급하며 나타난다. 여기서는 위 내용과 같이 연등회를 중요한 행사로 치르라는 정도에 그친다. 연등회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은 성종 원년(943년) 최승로가 왕에게 올린 “시무28조”를 통해 확인된다. 여기서 최승로는 ‘팔관회와 연등회의 준비에 많은 사람이 동원되어 노역이 심히 번거롭고 비용이 많이 드니 폐지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태조가 격조 있는 진행을 당부한 연등회지만 불과 한세대 만에 폐지 주장까지 등장한 것이다. 하지만 이를 통해 고려건국 초기부터 연등회는 국가행사로 성대하게 치러졌으며, 이를 위해 막대한 예산과 인력이 투입됐음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성종 시기는 연등회의 수난기였다. 성종은 고려의 정치체계를 확립한 왕으로, 건국 초기 통치이념을 중국식의 유교적 통치이념으로 바꾸기 위해 노력한다. 이에 따라 성종 6년(987)에는 국가의 중요행사였던 팔관회를 폐지한다. 이 시기 연등회 폐지에 대한 언급은 없으나 팔관회와 함께 폐지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는 이후 20여 년에 걸친 국가의례로써 연등회의 중단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연등회 폐지는 사회적으로 커다란 반발을 불러온다. 특히 성종 12년(993) 거란의 침입으로 혼란한 시기를 맞으며 민심의 동요로 나타난다. 이때 제기된 “연등회와 팔관회를 재시행해야 한다”는 이지백의 간언은 연등회에 대한 당시 여론을 반영한 것이라 하겠다. 상황에 따라서는 연등회와 팔관회가 개최되지 않아 거란이 침입했다는 여론이 형성되었을 수도 있는 시대였다.
연등회가 국가의례로 행해지지 않던 시기에도 국가의례가 아닌 관등행사는 계속 진행됐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연등회가 공식적으로 복구되기 전인 목종 12년(1009) ‘왕이 궁궐에서 관등했다’는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후 연등회는 현종 원년(1010) 복구를 통해 다시 연례행사가 된다. 심지어는 현종 2년(1011) 거란의 2차 침입으로 피난을 떠난 청주의 행궁에서도 개최된다. 이렇듯 연등회는 단순한 불교행사가 아닌 국가의 안위를 위해 행해지는 국가의례였다. 
이렇듯 고려 초기 연등회는 태조의 유훈과 왕권 강화라는 정치적 선택 속에서 부침을 겪었다. 하지만 이를 바탕으로 생성된 연등회의 유산은 고려사회, 나아가서는 한국사회 전반을 아우르는 등축제의 원형이 된다.

/글·김두희 (불빛나들이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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