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리산방의 엽서 - 동백꽃 마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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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리산방의 엽서 - 동백꽃 마중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22.12.29 1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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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아름다운 빛깔 끌어모아서
마그마처럼 솟아올라 피어나는
천만송이의 동백꽃 환희는
제주 섬 전체를 사랑으로
가득 채우고 있습니다

  허공에 진눈깨비 치는 날에도

  동백꽃 붉게 피어 아름답구나

  눈이 오는 저 하늘에 길이 없어도

  길을 내어 돌아오는 새들 있으리니

  살아생전 뜻한 일 못 이루고

  그대 앞길 눈보라 가득하여도

  동백 한 송이는 가슴에 품어 가시라

  다시 올 꽃 한 송이 품어 가시라

 

#1 도종환 시인의 <동백 피는 날>. 동백을 노래한 시편들이 참으로 많지만 그 중에서 이 시가 계묘년 원단에 심금을 울리는 이유는 이렇습니다.

화자는 추운 겨울로 표현된 시련을 견뎌 내 마침내 붉은 꽃을 피우는 동백에게 연민과 아름다움을 느끼면서 꿈과 희망을 잃지 않고 길을 내며 동백꽃처럼 살고자 하는 마음씨를 형상화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2 자연의 빛깔은 참 오묘합니다. 동짓달이 다가오자 귤림추색橘林秋色의 빈자리를 ‘몽올몽올’ 피어나는 동백꽃으로 장엄하기 시작합니다. 

북풍한설 속에서 좌절하지 않고 온 누리의 가장 단아한 모습들 모아 담고  모든 아름다운 빛깔 끌어모아서 마그마처럼 솟아올라 피어나는 천만송이의 동백꽃 환희는 제주 섬 전체를 사랑으로 가득 채우고 있습니다.  

제주에 감귤나무만큼 흔하디흔한 나무를 하나 더 꼽으라면 단연코 동백나무가 아닐까요. 마을 주민이 해풍을 막기 위해 조성한 남원읍 위미리 동백나무 군락(제주도기념물 39호) 등이 있는가 하면 화마를 막기 위해 마을 어귀나 농가 주변에 조림한 곳도 아주 많습니다. 

2012년 개통된 한라산 둘레길 중의 하나인 동백 길(13.5㎞) 일대에도 국내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동백나무 군락지가 형성돼 있습니다. 이는 제주도가 세계적으로 매우 주요한 동백나무의 자생지임을 증명하는 증표입니다.

 

#3 안덕면 상창리 소재 카멜리아 힐은 2008년 개원 후 10년도 안 돼 탐방객 100만 명을 돌파한 핫-플레이스로 가히 동백 백화점이라고 할 수 있는 명소입니다. 약 6만여 평의 경내에 세계 80개국에서 들여온 약 500여 종, 6,000여 그루의 동백나무들로 수해樹海를 이루고 있습니다. 

특히 지금까지 알려진 꽃향기 나는 희귀 동백 8종 가운데 매화동백을 포함해서 6종이 그 자태를 뽐내고 있고, 전 세계에서 연중 가장 일찍 꽃을 피우는 동백, 꽃송이가 가장 큰 동백 등 다양한 종류의 동백들이 어우러져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대경이 달라서 보는 이들은 탄성을 지릅니다.

 

#4 한반도의 서·남해의 연안 지역과 섬들에는 수많은 자생 동백나무숲들이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습니다. 그 수종은 원예용으로 널리 쓰이는 ‘자포니카 동백Camellia japonica’입니다. 

전남 신안 압해도 내 조림된 3㎞ 숲길에는 지난 12월부터 선홍빛 꽃을 피우고 있는 애기동백(Camellia sasanqua, 사잔카 동백) 군락지가 있습니다. 

내 삶터인 아란야 농원에도 애기동백이 지난 11월 말경부터 꽃을 피우고 있고, 그 옆 자포니카 동백은 아직은 때가 아닌 듯 꽃망울을 키우고 있답니다.

 

#5 하얀 눈이 내리면 더욱더 붉게 토해내는 동백 사랑 이야기에 귀 기울여 봅니다. 어느 선승은 ‘이 세상 모든 것이 한 송이 꽃’이라고 찬탄했습니다.

어리석은 이들은 온 세상이 한 송이 동백꽃인 줄을 모르고 남북으로 동서로 지역으로 세대로 나누고, 내 것과 네 것을 분별하고, 당파싸움하면서 세상살이가 화롯불에 떨어진 한 점의 눈꽃임을 알고 보지 못합니다. 

동백나무와 동박새의 공생관계는 우리에게 삶의 지혜를 깨우치게 합니다. 동백꽃의 개화 시기엔 나비나 벌과 같은 곤충이 칩거할 때라서 수분을 위해 꽃의 밑 부분에 진하고 많은 양의 꿀을 저장하고 동박새에게 어서 오라고 손짓합니다. 동박새는 살판났다고 '찌이 찌이' 지저귀며 꿀을 따먹고 추운 겨울을 납니다. 그 대가로 꽃가루의 수분이 이뤄지도록 역할을 분담합니다. 

 

#6 세한삼우歲寒三友의 하나인 설중매는 고결한 기품을 지니고 있어서 예부터 시나 그림의 소재로 많이 쓰여 졌습니다. 하지만 동백의 매력에 비할 바는 아닌 것 같습니다. 한결같은 푸른빛을 띠는 상록의 잎을 사시사철 유지하며 추위 속에 꽃을 피우는 동백의 항심恒心이 없기 때문입니다.

선홍빛 동백꽃은 청아한 화려함과 적막한 고요함을 갖추고 있어서 마치 무상삼매에 든 수행자의 모습과 닮았습니다. 

무더운 여름날 개흙에서 피어나는 연꽃이 고매한 해탈을 상징한다면 추운 겨울철에 피어나는 동백꽃은 고절한 인격을 상징하는 것 같습니다. 두 꽃 모두 길상의 꽃이나 전자는 출리를 지향하고 후자는 유루有漏의 복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7 초겨울에 피는 동백꽃은 꽃잎이 시들어 낱개로 떨어지는 게 아니라 싱싱한 꽃잎을 가진 통꽃으로 떨어집니다. 건조한 겨울철엔 수분이 충분하지 않아 먼저 핀 꽃송이가 개화를 기다리는 다른 꽃송이들에게 생명의 물을 공급하려고 낙화를 한답니다. 새해에는 이런 양보의 미덕이 충만했으면 좋겠습니다.

찬바람이 불면 활짝 피었다가 눈보라에 시들지 않은 채 떨어지는 처연함에 마음이 확 끌립니다. 그 처연한 낙화를 떠올리면 제주4·3사건의 영령들이 연상되면서 애잔한 맘이 그득합니다. 

강요배 화백이 1992년 ‘동백꽃 지다’라는 그림책을 낸 뒤 동백꽃은 4·3사건의 심벌마크가 됐고, 이제 4·3기념 배지 속에 오롯이 새겨져 새롭게 피어나고 있습니다. 4월의 끝자락까지 꽃은 피고지고를 계속할 것입니다.

/ 恒山 居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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