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지식을 찾아서 - 혜국 스님 법문 - “이와 같이 그 마음을 유지하고 ‘이와 같이’ 그 마음을 항복받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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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지식을 찾아서 - 혜국 스님 법문 - “이와 같이 그 마음을 유지하고 ‘이와 같이’ 그 마음을 항복받아라”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23.01.18 1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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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에 안주(安住)할 것이냐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
화두에 안주하면 모든 것이 해결돼
혜국 큰스님(석종사 금봉선원장)
혜국 큰스님(석종사 금봉선원장)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금강경’이나 ‘원각경’ 등의 대승경전을 보면, 대부분 설법을 듣는 대중들 가운데에서 스님이나 보살이나 재가불자 한 분이 나와서 부처님께 질문을 하고 부처님께서는 대답을 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곧 부처님께서는 질문에 맞추어 답을 내려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대승경전에 나오는 공통되는 질문을 무엇이며, 또 그 대답은 어떠한 것인가? 여기에서는 먼저 그 질문을 제시해 놓고, 대답에 대해서는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교리적인 측면과 참선의 세계, 나아가 현대 과학에서 말하는 학설과 비교하여 살펴보고자 합니다. 
대승경전에 공통적으로 나오는 첫 질문은 ‘어디에 안주(安住)할 것이냐?’이며, 그 다음에 나오는 질문이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입니다. 곧 ‘어디에 머물러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핵심 질문으로 삼고 있습니다. 이 문제는 비단 삼천 년 전의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질문이 아닙니다. 오늘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 또한 ’지금 어디에 안주할 것이며, 오늘을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가 절박한 문제이며, 그와 꼭 같은 질문을 오늘 이 자리에서 던질 수 있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어떻게 나 자신을 이겨나가야 하며, 어떻게 나를 항복 받아야 되겠는가?’를 분명히 짚으며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과연 우리는 ‘나’ 자신을 항복 받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아마도 그렇지 못한 경우가 더 많을 것입니다. 내 감정은 계속 쉽게 사는 방법을 찾고, 내 감정대로 처리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나의 인격은 그러한 감정을 어루만지며, 운전 잘하는 운전사처럼 내 몸이라는 자동차를 잘 운전하여 목적지까지 무사히 가고자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세상을 반쪽밖에 볼 수 없고 반쪽밖에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더욱 묘한 것은 이 질문에 대한 부처님의 답입니다. 금강경에서 부처님께서는 ‘응여시주 여시항복기심(應如是住 如是降伏其心)’이라고 설하셨습니다.

“마땅히 이와 같이 안주하고 
이와 같이 그 마음을 항복 받아라”
‘이와 같이’, 또 ‘이와 같이’라고 대답을 하신 것입니다. 너무 간단하고 정확한 답인데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슨 말인지를 모른 채 그냥 넘어갑니다. ‘금강경’을 아침·저녁으로 읽는 분들도 많지만, ‘이와 같이 안주하고 이와 같이 항복 받아라’는 말씀 가운데 어떠한 내용이 들어있는지를 아는 분들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런데 더욱 묘하게도 질문을 한 수보리존자께서 부처님의 ‘이와 같이’라는 말씀에 대해 ‘그러하옵니다(唯然)’ 라고 응답을 합니다. 나아가 수보리존자는 말세 중생들과 ‘이와 같이(如是)’라는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더 자세한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이렇게 하여 ‘금강경’의 본격적인 내용이 설해졌고, 마침내 ‘금강경’의 성립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어디에 안주해야 하며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이를 선적인 차원에서 물으면 ‘여하시조사서래의(如何始祖師西來意)’가 됩니다. “달마조사께서 서쪽에서 오신 뜻이 무엇입니까?” 라는 이 질문은 ‘어디에 머물러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물은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우주의 대도(大道)를 깨치시고 그 도를 가섭존자에게 전했습니다. 가섭존자는 아난존자에게 전하고, 그 다음 계속 내려오면서 제28대 달마대사에게 전해진 그 도를 다른 말로 하면 ‘마땅히 안주할 법이요 그렇게 살아가야 할 법’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 ‘조사서래의’는 ‘어떤 것이 부처님 법의 적적한 대의입니까?’라는 질문으로, ‘어디에 안주해야 하고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를 묻는 질문과 조금도 차이가 없습니다. 이 질문에 대한 선적인 측면에서의 대답이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 : 뜰 앞의 잣나무)’이며, 이 ‘뜰 앞의 잣나무’와 ‘이와 같이’라는 말은 털끝만큼의 차이도 없이 완전히 하나로 돌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꼭 같은 답을 부처님께서는 ‘여시(如是 : 이와 같이)’라고 표현하셨고, 조사 스님들은 ‘정전백수자’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중생들은 도무지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알아듣지 못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말을 통해야만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이 우리의 수준이기 때문에, 우리는 말이 가지고 있는 한계까지만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3차원의 세계를 벗어나 4차원의 세계에 가면 ‘나’와 ‘시간’과 ‘공간’은 뛰어 넘어버립니다. 바로 그 뛰어넘은 4차원의 세계는 말이나 시간이나 공간이 생겨나기 이전의 세계입니다. 그것이 바로 화두입니다. 허공이 있다가 없어졌다가 하는 것이 아니듯이 화두의 세계, 4차원의 세계는 예나 지금이나 변하지를 않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이와 같이 그 마음을 유지하고 이와 같이 그 마음을 항복받아라’고 하셨을 때 이 말을 곧바로 알아들었다면 4차원의 세계, 화두의 세계에 안주하여 모든 것을 해결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못 알아들었기 때문에 경전을 통해 교리적으로 내려온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우리는 ‘이와 같이’를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정립해야 가야 하는가? 살아가는 도중에 불이 확 일어나듯이 갑자기 화가 날 때는 ‘나’ 자신을 어떻게 이겨내야 할지 막막할 때가 많습니다. 화만이 아닙니다. 나에게서 일어나는 무한한 욕망과 실의는 또 어떠합니까? 그러나 이때 이성을 잃고 방황하면 안 됩니다. 몸이라는 자동차는 운전하는 운전수가 핸들을 어느쪽으로 돌리느냐에 따라 방향이 달리합니다. 마음가짐이나 원력에 따라 우리의 모습은 너무나 달라집니다. 다시 말하면, 그 핸들을 부처의 세계·지옥의 세계에 돌리느냐에 따라 ‘나’는 달라집니다.
짜증과 신경질과 화를 내는 마음과 나 자신만을 위하는 마음을 멀리하고, 날마다 날마다 거듭거듭 태어나고 거듭거듭 발심하고 해결해 나가겠다는 마음을 내면서 ‘나’ 자신을 자꾸자꾸 확인해 나가야 합니다. 남이 나를 위해서 무엇을 해 줄 것인가를 바랄 것이 아니라, 내가 남을 위해 무엇을 할까를 찾는 세계로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광명과 어둠이 반반씩 섞여 있는 세계입니다. 운전사인 우리가 우리 몸이라는 자동차의 핸들을 이쪽으로 트느냐 저쪽으로 트느냐는 오직 나의 의지에 달려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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