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지식을 찾아서 - 청화스님 법문 - “진여불성은 내 생명의 뿌리인 동시에 우주 모든 존재의 뿌리”
상태바
선지식을 찾아서 - 청화스님 법문 - “진여불성은 내 생명의 뿌리인 동시에 우주 모든 존재의 뿌리”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23.02.01 14:4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나와 남의 모든 존재의 근본 뿌리인
진여불성을 우리가 분명히 안다고 생각할 때
다른 사소한 문제는 다 그 속에 포함시켜
저절로 알게돼
무주당 청화 큰스님
무주당 청화 큰스님

동체대비(同體大悲)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가지 동(同)자, 몸 체(體)자, 큰 대(大)자, 자비로울 사랑 비(悲)자 말입니다. 우리가 남한테 베푸는 것도 나와 남이 본래로 둘이다, 이런 견지에서 베푸는 것과 나와 남이 본래 생명이 하나의 뿌리다, 하나의 몸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베푸는 것과는 이것도 역시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은 나와 남이 둘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베풀 때는 이른바 상(相)이 있는 나라는 상, 너라는 상, 상이 있는 유주상보시(有住相布施)란 말입니다. 상이 있는 보시(布施)인 것이고, 겉에 보이는 것은 허망(虛妄)한 다 무상(無常)한 하나의 그림자와 같은 것이고 근본본체(根本本體), 근본본체가 참다운 실상(實相)이다, 이렇게 생각할 때는 실제로는 한 몸이기 때문에 남한테 베푼다 하더라도 나와 남이라는 상을 떠나서 나하고 뿌리가 같으니까 당연히 베풀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부모님이 자식들한테 뭘 베풀 때는 근본 뿌리가 같다는 것을 확실히 모른다 하더라도 관념(觀念)상 그냥 ‘내 것은 내 것이고 네 것은 네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지 않고서 베풀지 않습니까? 그런데 뿌리가 같다고 생각할 때는 부모가 자식한테 베푼 것보다도 훨씬 더 절실하게 본래 한 몸이기 때문에 남한테 베푸는 것도 바로 내 스스로에게 베푸는 것이나 똑같다. 이렇게 생각하고 베푸는 것은 이것은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라, 상이 없는 보시란 말입니다. 이른바 대상(對象)적으로 구분하지 않는 보시란 말입니다.
우리 중생(衆生)과 성자(聖者)의 차이는 무엇인가 하면은 우리 중생들은 겉만 봅니다. 성자는 근본 본성품(本性品)을 본단 말입니다. 간단명료합니다. 부처님 법은 사실은 제일 쉬운 법이란 말입니다. 성불(成佛)하기가 부처가 되는 법이 제일 쉽다고 저는 역설(力說)하고 제 스스로 느끼고 있습니다. 그렇다, 그래서 제가 지금 부처가 다 된 것은 아닙니다.
우리 불자님들, 부처님 법이 절대로 어렵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제가 그 증거를 또 하나하나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왜 쉬운 것인가? 없는 것을 돈을 많이 주고 사가지고 온다든가 또는 꿔가지고 온다든가 그런 것은 없지 않습니까. 그러나 우리 부처님 법은 없는 것을 새삼스럽게 우리가 구해가지고 오지를 않는단 말입니다. 아, 그럼 부처란 것은 어디가 있는 것인가? 불교(佛敎)란 것은 부처가 되기 위한 공부입니다. 부처가 안 되면은 자기 존재가 무엇인가를 모른단 말입니다. 동시에 우주(宇宙)가 무엇인가를 모릅니다.
지금 세상은 모두가 다 연관돼 있어 놔서 기업(企業)도 국제적(國際的)인 기업 아닙니까? 한 나라의 평화(平和)를 위해서도 한 나라만 가지고 안 됩니다. 국제적인 합의(合議)라든가 국제적인 협조가 서로 있어야 한 나라도 역시 안정(安定)적으로 질서(秩序)를 도모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 거창한 문제가 아니더라도 우리 개인(個人)문제도 그래요. 개인 문제도, 우리 개인이 무엇인가 안다고 생각할 때는 우주의 문제와 같이 연관돼서 알지 않고서는 근본 뿌리를 모릅니다. 왜 그런고 하면은 우리 인간(人間) 존재의 근본(根本) 뿌리나 우주(宇宙)의 근본(根本) 뿌리나 같은 뿌리란 말입니다.
이것을 확실히 알면 저것도 확실히 알게 되고 저것을 또 확실히 알면 이것도 알게 되는 말입니다. 근데 그것이 같은 뿌리기 때문에 내 생명(生命)이 무엇인가? 내가 무엇인가? 이걸 안다고 생각할 때는 그때는 천지우주(天地宇宙)의 본질(本質)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또 모르고서는 내 존재(存在)를 모른단 말입니다. 그러는데 다행히도 쉬운 것이 무엇인가 하면은 내 생명의 뿌리나 우주 생명의 뿌리나 아까 제가 몇 번 되풀이해서 말씀을 드린 바와 같이 “진여불성(眞如佛性), 진여불성 이것이 내 생명의 뿌리인 동시에 우주 모든 존재의 뿌리 입니다.”
그러기에 그 뿌리를 알아버리면 그때는 일반적인 흔히 우리가 말하는 홍로일점설(紅爐一點雪)이라, 뜨거운 화로에 다가 눈을 한주먹 넣으면 그냥 녹아 버립니다. 그것이 이른바 홍로일점설이라, 숯불이 번져서 이글이글하게 타고 있는데다가 눈 넣어 보면 금방 녹지 않습니까? 그와 마찬가지로 나와 남의 모든 존재의 근본 뿌리인 진여불성(眞如佛性)을 우리가 분명히 안다고 생각할 때는 다른 사소한 문제는 다 그 속에 포함시켜 저절로 알게 된단 말입니다.
그러나 진여불성은 알기는 어렵지 않겠는가? 이렇게 생각도 하십니다만 이것도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진여불성이 밖에 가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자리, 우리 마음이 바로 진여불성입니다. 불성을 안 가진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 마음의 본심이 바로 부처 불(佛)자, 마음 심(心)자 불심(佛心)이고, 부처 불(佛)자, 성품 성(性)자 바로 불성(佛性)이란 말입니다. 그러기에 그 마음, 그 마음을 안 가진 사람이 없는데 그렇더라도 마음을 깨달아야 불심으로 온전히 되지 않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깨닫지 않더라도 불심은 조금도 훼손 안 되고 석가모니(釋迦牟尼)마음 불심이나 우리 마음 불심이나 예수님 불심이나 공자님 불심이나 다 똑같단 말입니다.
우리는 그 신앙(信仰)이라 하는 믿음에 대해서 소홀히 생각합니다. 뭐 학문(學文)을 많이 배우고 무슨 체계를 세우고 이렇게 해야 훌륭하다고 보고 말입니다. 그냥 우리 마음으로 단박에 학문이나 문자를 조금도 거기에 개입을 시키지 않더라도 우리 마음으로 간절히 믿는 갈앙심(渴仰心), 간절히 그리워하는 흠모심(欽慕心)으로 해서 단박에 우리 마음을 깨달아 버리는 그런 공부를 보통은 또 소홀히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 마음이 보통 부사의(不思議)한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우리 마음 이것이 바로 불심이기 때문에 불심이란 것은 그냥 보통 그렁저렁한 이것 생각하고 저것 생각하고 뭘 좀 기억하다 말고 그런 정도가 아니란 말입니다.
불심(佛心)이란 것은 석가모니 마음 같은 그런 마음 또는 예수님 마음 같은 그런 마음 또는 공자님 마음 같은 그런 마음이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천재적(天才的)인 그런 재주도 우리 불심에는 다 포함돼 있습니다. 또는 우리가 보살행(菩薩行), 보살행 하지 않습니까. 어느 때나 어느 순간도 주저 없이 모든 중생을 위해서 내 몸뚱이 온전히 바치겠다 하는 그런 자비심(慈悲心)도 불심 가운데는 다 충만(充滿)해 있습니다. 그 외에 만능(萬能)의 자리란 말입니다. 만능의 자리, 어느 것도 불심 가운데는 다 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는 조금도 변동이 없습니다. 변동이 있다는 것은 다시 태어나고 또는 다시 변화가 되고 없어지고 그래야 변동이 있는 것 아닙니까? 불심 이것은 불생불멸(不生不滅)이라. 낳지 않고 죽지 않고 생멸(生滅)이 없단 말입니다. 죽고 살고 없어지고 하는 법이 아닙니다. 과거(過去)나 현재(現在)나 미래(未來)나 불심(佛心)은 똑같습니다. 과거에 우리가 잘못 살아서 금생(今生)에 지옥(地獄) 들어가서 지옥고(地獄苦)를 받는다 하더라도 불심은 조금도 오염(汚染)도 안 되고 또는 덜도 안 되고 더도 안 된단 말입니다.
분명히 있다는 불심이 어째서 덜도 안 되고 더도 안 될 것인가? 있기는 있지만 그것은 물질(物質)이 아니란 말입니다. 명부득상부득(名不得相不得)이라, 이름도 없고 또는 상도 없단 말입니다. 이름도 없고 상도 없는 것이 불심입니다. 또 그것이 모든 존재의 근본 뿌리입니다. 어떠한 것도 불심으로 안 된 것이 없습니다. 

/정리 임관표 기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