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등 이야기 - “고려시대 사찰연등회와 궁중연등회로 이원화되어 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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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등 이야기 - “고려시대 사찰연등회와 궁중연등회로 이원화되어 진행”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23.02.08 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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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연등회가 붓다를 기리는 의식을 강조했다면
궁중연등회는 왕이 등을 보는 관등 중심으로 이뤄져
일본 교토 지은원 소장 관경십육관변상도
일본 교토 지은원 소장 관경십육관변상도

고려 중엽은 문벌귀족의 발호와 무신들의 득세로 평민들에게는 혼란의 시대였다. 하지만 이런 혼란의 시기에도 연등회는 지속적으로 개최된다. 어쩌면 이런 혼란의 시기였기에 단순한 유희가 아닌 연등회에 더욱 열광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고려 중엽 연등회는 단순히 붓다를 기리는 행사가 아니었다. 이는 연등회를 국가행사로 장려한 고려왕실의 다분히 의도적인 정책에 기인한다. 고려시대 왕은 가장 완벽한 인간의 표상이었으며, 이런 관념은 당시 가장 위대한 인간으로 추앙되던 붓다와 왕을 일치시키는 시도로 이어졌다. 이는 개성 현릉에서 발굴된 태조 왕건상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으며, 붓다를 기리는 행사인 연등회가 왕을 위한 행사로 변형되는 결과를 초래한다.
고려 시대 연등회는 크게 사찰연등회와 궁중연등회로 나눌 수 있다. 이들은 등을 밝히고 헌화, 헌향 등 육법공양의 요소를 활용하는 불교적인 행사라는 공통점이 있다. 차이라면 그 대상이 붓다를 상징하는 불상이 중심이 되느냐, 불상의 자리를 왕이 대신하느냐는 것이다. 즉 궁중연등회는 신하들이 왕에게 절하며 가무악회를 바치고, 차 · 술 · 꽃 · 약 · 과일 등을 바치며 만수무강을 빌면, 왕도 신하들에게 복을 빌어주는 형식이다. 이런 형식은 자연스럽게 왕을 즐겁게 하는 공연의 발달로 이어졌으며 채붕(彩棚)을 설치해 왕이 공연을 보다 원활하게 관람할 수 있도록 노력했다. 채붕은 산처럼 높다고 하여 산붕(山棚)이라고도 하는데, 나무로 단을 만들고 오색비단을 늘어뜨려 장식한 무대를 일컫는다.
연등(然燈)도 사찰연등회가 붓다를 기리는 의식을 강조했다면, 궁중연등회는 왕이 등을 보며 즐기는 관등(觀燈) 중심으로 이뤄졌다. 사찰연등회가 불단 앞에서 붓다를 대상으로 분향 · 다례 · 배례 등의 의식을 행하고 연등과 가무를 공양하는 형식이라면, 궁중연등회는 등을 왕의 앞에 진열하고 왕에게 배례 · 다례 등을 행해서 마치 왕이 등 공양을 받는 듯한 모습을 연출했다. 여기에 왕이 보다 화려하고 장엄한 관등을 즐길 수 있도록 등산(燈山)이나 등수(燈樹)와 같은 인공적인 구조물을 배치했다. 등산은 등과 각종 장식물로 만든 산을 말하며, 등수는 갖가지 장식과 등불로 장식한 등의 나무이다. 일본 서복사나 지온인에 소장돼 있는 고려시대 불화인 “관경십육관변상도(觀經十六觀變相圖)에 등수의 모습이 잘 표현되어 있다. 쉽게 말하면 현대의 크리스마스 트리를 생각하면 된다. 
궁중연등회는 단순히 궁이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진행된 것은 아니다. 왕이 사찰연등회의 참석을 위해 이동하는 공간에서도 궁중연등회를 개최한 것이다. 고려 중엽 사찰연등회의 중심은 대각국사 의천이 기거했던 개성의 흥왕사였다. 흥왕사는 개성의 궁궐인 만월대에서 직선거리로 20여리 떨어진 곳에 위치했다. 왕이 궁에서 흥왕사까지 대규모 인원과 함께 연등회에 참가하러 가려면 대략 한나절 정도의 시간은 소요됐을 것이다. 이때 왕이 행차하는 길을 오색비단으로 장식하고 등간을 세워 왕이 이동 중에도 관등할 수 있도록 배치했으며, 왕의 가마를 따르는 공연단도 함께했다.
아쉽게도 이런 형식의 연등회는 조선왕조가 건국되며 숭유억불 정책으로 소멸된다. 만약 이런 형식의 연등회가 지속되었다면, 연등회는 보다 역동적이고 풍성한 요소가 가미된 축제가 됐을 것이다.
초파일 연등회가 처음으로 시작된 것도 고려 중엽이다. 당시 연등회는 이월보름과 정월보름에 진행되는 것이 상례였다. 기록으로는 이월보름의 연등회가 압도적으로 많이 보이며 정월연등회인 상원연등회는 고려중엽에 집중적으로 나타난다. 그러다 환관이었던 백선연에 의해 초파일 연등회가 처음으로 개최된다.  《고려사》 의 “백선연이 왕의 나이에 맞추어 동불상 40존, 관음 40존을 그려 붙이고 별원에서 점등(點燈)했다”는 내용이 그것이다. 당시 왕은 1127년 생인 의종으로 40세가 되는 해는 1166년이 된다. 초파일 연등회가  《고려사》 에 보이는 것은 수회에 그치지만, 이때 시작된 초파일 연등회가 이후 연등회의 주류로 자리 잡으며 현재에 이르고 있다.

/글·김두희 (불빛나들이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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