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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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23.04.13 1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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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편집인 김승석

 

지인들의 사무실이나 서재를 방문할 때 벽면의 액자나 판각板刻을 살펴볼 때가 있다. 주인이 좋아하는 좌우명이나 교훈 등을 엿볼 수 있어서다.

 

그 중 불도장처럼 뜨겁게 가슴에 낙인찍힌 명구는 해서체로 쓰여 진 一切唯心造이다. ‘일체 모든 것은 오직 마음이 지은 것이다.’라는 뜻을 지닌 다섯 글자는 우리 불자들이 종성鐘聲을 할 때나 천도재를 지낼 때 꼭 합송한다.

약인욕요지 삼세일체불 응관법계성 일체유심조(若人欲了知 三世一切佛 應觀法界性 一切唯心造)”

이 명구는 화엄경의 사구게四句偈이다. 삼계가 오로지 마음이고 만법이 오로지 유심唯心이라는 사상은 초기불교, 대승불교, 선불교에 이르기까지 법계의 백두대간과 같아서 불교를 마음의 종교라 일컫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마음의 이치와 마음씨를 아는 것은 불법의 처음이자 끝이다. 팔만대장경이나 조사의 어록들이 이를 알고 보라고 하나 범부중생들은 잘 모른다.

모든 것(, dhamma)은 마음이 앞서 가고 마음은 가장 중요하고 마음에서 만들어진다.”라는 금구는 법구경의 첫 게송이다. 법들은 마음을 따라 일어나고, 그 마음도 홀로 일어나지 않고 반드시 대상과 짝해서 일어났다가 사라진다는 게 가르침의 요지다.

 

나라 유학길에 해골 물을 마시고 깨달음을 얻었다는 원효 성사는 마음이 일어나므로 갖가지 현상들이 일어난다(心生故 種種法生).”는 오도송을 남겼는데, 일체유심조라는 말과 뜻이 같다.

 

10여 년 전 초기불교의 논장인 아비담마(Abhidhamma)를 공부하면서 마음은 그 대상을 아는 것뿐이고 그 앎도 마음부수의 도움을 받아 찰나적으로 일어나며 실재적인 존재를 가지고 있는 행위자도 도구도 아님을 깨닫고 마음을 절대화하지 않게 됐다.

또한 마음을 무로부터 무언가를 만든다는 조물주에 비유하지 않고, 유식불교에서 말하는 유식무경唯識無境이라고 이해하지 아니 한다.

 

춘풍이 살갗을 스치면 계절의 변화를 안다. 뜰 안에 매화꽃이 피고, 연이어 목련꽃과 벚꽃이 피어나면 기쁨의 미소를 짓고 그들에게 사랑과 평화의 에너지를 보낸다.

그러나 울 밖에서 사람을 만나면 애증의 생각이 오고가고, 또 무언가를 보면 갖고 싶다는 욕망도 생겨난다. 이와 같이 마음은 세상을 만들고 언행을 통해 자기표현을 한다. 이러한 마음의 공능을 화가에 비유하여 화엄경에서 심여공화사心如工畵師라고 표현했다.

재가자의 삶에는 생멸심生滅心이 상속된다. 바깥 대상에 그 마음이 이끌리거나 취착하게 되면 자기 동일시(Identification) 현상이 일어나 괴로울 수밖에 없다.

 

대승경전이나 선불교에서 이야기하는 마음은 형이상학적이다. “마음은 안에도 밖에도 중간에 있지도 않다. 과거심도 현재심도 미래심도 없다. 길지도 짧지도 모나지도 둥글지도 않다. 색깔도 소리도 향기도 맛도 없다. 만져지는 것도 생각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찾으면 얻을 수도 없지만 그렇다고 없다고 할 수도 없다. 모든 세계와 국토를 만드나 그렇다고 있다고 할 수도 없다. 모든 생각, 분별, 말과 글에서 떠나있으나, 그렇다고 이런 마음 작용들과 분리된 별개의 자성을 갖는다고 할 수도 없다.”라고 하면서 이를 진여심眞如心이라고 이름 짓고 있다.

 

마음을 이렇게 묘사하면 마음은 고정된 어떤 하나의 실체인 것으로 오해하기 쉽다. 마음은 내 생각대로 움직이는 게 아니라 조건에 따라 동요한다.

세존께서 세상의 경(S1:70)에서 말씀하시길, “여섯(六處, 六識)으로 세상이 생겨났고 여섯(六境)과 친교를 맺으며 세상은 전개된다.”라고 하셨다.

 

삼라만상이 내 의식 안에 있고, 그 식이 내 안에 똬리를 틀고 주인노릇을 하고 있는데, 젊어서는 이놈을 알려고 애쓰지 않다가 늙은이가 돼서 마음을 댕기 땋아 내리듯이 헤치고 빗질해서 가지고 놀려고 아등바등 애쓰고 있다.

 

마음은 유위법으로 찰나적 존재이다. 찰나적으로 생멸하며 흘러가는 그 마음, 의식의 세계로부터 해탈하기 위한 다이아몬드마저 절단할 수 있을 정도의 지혜(반야)바라밀은 어떻게 닦아야 하는가. 그 해답을 경전에서 찾는다.

여섯 겹의 청정의 경(M112)에서 부처님은 본 것을 본 대로 말하고, 들은 것을 들은 대로 말하고, 감각된 것을 감각되어진 대로 말하고, 인지한 것을 인지된 대로 말하라.”라고 가르치셨다.

이 경에서 지각의 대상을 본 것, 들은 것, 감각된 것, 인식된 것의 네 가지 범주로 분류하고 있다. 여기서 감각된 것(muta)은 냄새, , 접촉된 촉감 자료들을 의미하고, 인식된 것(vinnata)은 성찰, 추상적인 생각, 상상한 것들을 의미한다.

 

세존께서는 지각의 대상들이 내 것’, ‘그리고 자아라는 면에서 인식하거나, 갈애나 자만, 유신견을 만드는 방식으로 인식하면 그 대상은 마음에 머물며 자기 동일시가 일어나고, 그 반면 탐··치로 탐하고 성내고 어리석지 않게 되면 보고 듣고 감지하고 안 것에 묶이거나 집착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다.

 

머무는 바 없는 무주에 의해서 마음을 내어라(應無所住 以生其心).는 금강경의 가르침도 문자만 다를 뿐, 같은 뜻일 게다.

중국의 선종에서는 거울에 비유한다. 거울의 비춤[]은 그 본성이고 대상이 앞에 현존하면 단지 투영할 뿐이다. (, )이 변전하여 반야로 빛날 때 거울처럼 단지 작용만 하는 마음이 일어날 것이다.

 

신라인들이 조성한 미륵반가사유상에 나타난 미륵보살의 마음이 유심唯心이 아닐까 반조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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