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겨진 역사, “을묘왜변 제주대첩” [1] - 서론 - 제주의 파적(破賊)은 상을 시행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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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겨진 역사, “을묘왜변 제주대첩” [1] - 서론 - 제주의 파적(破賊)은 상을 시행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23.05.05 1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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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명종은 제주목사 김수문에게 교서를 내렸다.

“(상략) 지금 경의 치계(馳啟)내용을 보고 지난달 27일의 승전(勝戰)상황을 자세히 알게 되니, 나의 근심이 크게 감해졌다. (중략) 적은 숫자로 많은 수를 공격하여 이와 같은 큰 승첩을 거둘 수 있었겠는가. 김직손 등 4인이 돌격한 공로도 역시 작은 것이 아니나, 이는 경이 몸소 사졸에 앞서 칼날을 무릅쓰고 돌진하여 그들의 용맹을 고무시킨 소치가 아니겠는가. (중략) 사신은 논한다. 영암의 수성(守城)과 제주의 파적(破賊)은 상을 시행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하략).”

이 기사는 명종실록 1555(명종 10) 77일 기사이다. 명종이 627일의 제주의 승전 상황 보고를 받고는 그간의 근심을 덜게 되었다는 내용과 일당백으로 싸운 제주관민의 용맹함을 치하하며, 영암의 성을 지킨 것과 제주에서 적을 무찌른 것에 대해 상을 시행하고자 하는 내용이 들어 있다.

그렇다면 그간 영암과 제주에는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명종 1555628일 김수문 목사에 의해 다급한 장계가 하나 중앙에 올라왔다.

이달 21일에 왜선 40여 척이 보길도에서 바로 제주 앞바다로 와 1리 가량의 거리에 닻을 내리고 정박해 있습니다

천미포왜변 1년 뒤인 1555(명종 10) 5월 을묘년에 왜구는 70여 척의 배에 나누어 타고 전라남도 남해안 일대를 침략하여 왜변을 일으켰다. 이 왜변은 조선 건국 이래 최대 규모의 왜구침입이었다. 왜구들은 해남군 달량포로 침입하여 진도, 강진, 장흥, 영암 등을 침탈하면서 곳곳에 피해를 입혔다. 조정에서는 호조판서 이준경을 도순찰사로 임명하고, 김경석과 남치근을 방어사로 임명하여 왜구 토벌의 임무를 맡겼다. 이준경은 전주부윤 이윤경 등과 함께 영암성에 머무르면서 적을 격퇴시켰다.

퇴각하던 왜구들은 바로 제주로 내려와 제주 앞 바다 1리 가량 거리에 닻을 내리고 정박하였다. 왜구들은 정박 후 6일 뒤인 1555627일 화북포로 상륙하였고 거로, 사라봉 일대를 걸쳐 제주성 인근까지 이르렀다. 왜구들은 제주성 동성의 관문인 동문과 산지천을 사이에 두고 남수각(현재 오현교 아래) 동쪽의 높은 언덕에 진을 쳤다. 이 언덕에서는 제주성을 내려다볼 수 있었다. 3일간 대접전이 벌어졌다.

이때 제주목사 김수문은 70여명의 날쌘 군사(驍勇軍)을 선발하여 공격을 감행하였고, 뒤 이어서 김직손, 김성조, 이희준, 문시봉 등 4인이 치마돌격(馳馬突擊, 말을 타고 달려)하여 전직의 왜구를 무너뜨렸다. 이때 정병 김몽근이 화살을 쏘아 적장을 쓰러뜨렸다. 제주 군민은 승기를 잡고 추격하여 다수의 왜구를 처단하고 사로잡아 대첩을 거두었다.

명종실록 1555(명종 10) 76일 기사에는 제주목사 김수문이 3일간의 접전에 대해 올린 장계가 기록되어 있다.

“627. 무려 1천여 인의 왜적이 뭍으로 올라와 진을 쳤습니다. 신이 날랜 군사 70인을 뽑아 거느리고 진 앞으로 돌격하여 30보의 거리까지 들어갔습니다. 화살에 맞은 왜인이 매우 많았는데도 퇴병하지 않으므로 정로위 김직손, 갑사 김성조, 이희준, 보인 문시봉 등 4인이 말을 달려 돌격하자 적군은 드디어 무너져 흩어졌습니다. 홍모투구(紅毛頭具)를 쓴 한 왜장이 자신의 활 솜씨만 믿고 홀로 물러가지 않으므로 정병 김몽근이 그의 등을 쏘아 명중시키자 곧 쓰러졌습니다. 이에 아군이 승세를 타고 추격하였으므로 참획이 매우 많았습니다.”

이 을묘왜변은 결과적으로 조건 건국 후 임진왜란 이전, 최대 규모의 왜구가 남해를 시작으로 침입하였지만 적을 완전히 무찌르고 왜변을 완결지은 곳은 제주로, 제주의 승첩으로 귀결되었다. 명종실록에는 을묘왜변 당시 제주에서의 승리를 대첩이라고 표현할 만큼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

사실 을묘왜변 제주대첩은 제주지역 공동체를 지킴과 동시에 한반도 및 동아시아 평화질서에 미친 영향이 크다. 만일 당시 제주성이 함락되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그럼에도 그간 을묘왜변 제주대첩 당시 전황과 전과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조명 받지 못하여 왔다. 특히 당시 적은 수로도 일당백하였던 제주사람들의 기개와 일체심은 어떤 맥락에서 가능하였는지 놀라울 정도이다.

명종실록 1555(명종 10) 810일 기사에는 제주선로사(齊州宣勞使) 윤의중이 임금에게 부임 인사를 올리자 (중략) 또 제주목사 김수문에게 전하라고 명하면서 이르기를 “(중략) 오직 경()은 청렴신중하고 신망이 두터워 해외의 관직에 제수되었고 사졸들과 한마음이 되어 방비에 힘썼음은 물론 힘을 다하여 조치함으로써 적병을 물리쳤으니 그 공이 매우 크다(하략)라고 하였다.”

명종 또한 당시 을묘왜변에 임하였던 제주공동체의 기개와 일체심에 대해 큰 업적으로 인정할 정도였다. 1981년 김병하 교수는 을묘왜변고라는 글을 통하여 을묘왜변 제주대첩의 재조명과 역사문화자원화에 대한 제안을 한 바 있지만 연구와 역사문화자원화는 확대되지 못하였다.

제주의 역사를 이야기할 때, 수난사 이야기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그러나 제주의 숨겨진 역사, ‘을묘왜변 제주대첩에는 제주 사람들의 기백과 공동체를 중히 여기는 마음들이 여기저기서 발견된다. 승리의 역사 경험은 공동체의 자긍심과 행위에 큰 영향을 미친다. 따라서 을묘왜변 제주대첩에 대한 조명과 기념은 제주공동체의 자긍심과 정체성을 구축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으로 본다.

2021년부터 을묘왜변 제주대첩에 대한 제주 공동체의 관심이 확대되고 있지만, 여전히 모르는 제주사람들이 더 많다. 2025년이 되면 을묘왜변 제주대첩 470주년이 되는 해이다. 모두가 모여 제주대첩의 승전을 기념하는 자리가 마련되면 좋지 않을까 한다.

제이각 을묘왜변 제주대첩 벽화
제이각 을묘왜변 제주대첩 벽화

 

 

을묘왜변 제주대첩 기념비
을묘왜변 제주대첩 기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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