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대불] 인도성지순례(1) - 금강경 설법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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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불] 인도성지순례(1) - 금강경 설법지에서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23.05.17 1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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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체법무아’ , ‘무주상보시’

인도 성지순례를 나섰다. 코로나19로 미루어 오다 삼 년 만에 경기불교문화원팀 열두 명과 동행하였다. 불교 발생국은 어떤 모습인지 오래전부터 가고 싶었다. 이슬람 세력의 침략으로 불교는 폐허가 된 유적지이다. 인도는 삶이 곧 종교여서 다종교를 인정하는 나라이다. 현재 불교는 1% 정도 남았다 할까. 복원하는 운영위원구성도 힌두세력 비율이 높아 불교 발전에 어려운 점이 많다. 밀림과 흙 속에 파묻혀 있던 불교 유적을 찾으며 복원하는 일은 더뎌지고 있다. 
기원정사 앞에 서니 고모할머니 생각이 났다. 어려서부터 불교를 접한 일도 우연은 아니다. 고모할머니는 스님이었다. 어렵게 생활하던 할머니께서 회색 법복을 입고 우리 집에 드나들었다. 목수였던 아버지는 유복하지 못한 살림에도 절을 지어 시주하였다. 친할머니와 아버지의 사십구 齋를 지내며 부처님을 알게 되었다. 스님은 신도를 정착시키려 보이지 않는 편안함도 있었다. 내가 초년 살림에 어려움을 내뱉으면 인내하라 가르쳤고 기원정사 얘기 해주었다. 참고 견디며 포용하다 보면 구름도 걷히는 이치라 하였다.
기원정사는 금강경을 설한 장소로 경전에 전한다. 부처님이 제세 시 24안거 하며 많이 머문 장소이다. 석가족과 미얀마족, 방글라데시에서 자매결연 맺어 도움을 주고 있다. 아난다는 부처님이 이곳에 머물며 법을 설할 때 어떻게 시봉 했을지 의아하다.
우리도 수행자의 자세가 되어보려고 법단 앞 보리수나무 아래에 앉았다. 순례하는 보름 동안 하루도 빠뜨리지 않고 버스 안에서 예불을 모셨던 법사님은 법복을 입고 좌정하여 예를 올렸다. 녹차 한 잔을 올린 후 집전 목탁으로 두 시간 동안 한글 금강경을 염송하였다. 낮인데도 시원한 바람이 불자 나무 그늘에 앉은 자세로 기도하였다. 목탁 소리에 맞추어 경전을 읽는 소리는 불교음악처럼 들린다. 
부처님이 손수 심은 망고나무가 넓은 정원에 있었다는 말에 새삼 놀라웠다. 세월이 흘렀어도 새가 망고를 먹고 씨를 퍼뜨려 기원정사 안에는 천여 그루가 되었다. 한 그루가 천 그루의 망고 열매 달리는 데는 새가 포교역할을 단단히 하였다. 밀알과 겨자의 역할을 새 한 마리가 톡톡히 했다. 인도에서는 과일 공양으로 망고를 빠뜨리지 않는다. 허례허식을 좇아 귀하지 않아도 정성을 다한 제철 과일이면 된다고 나를 깨우쳤다.
금강경을 설했다는 법단 앞에서다. 남아 있는 유적이라고는 기단부를 붉은 벽돌로 쌓은 공간뿐이다. 기단부 외벽은 허리 높이의 사각형 구조와 가운데 원형으로 붉은 벽돌로 놓여 있다. 수행 공간이었음을 짐작할 뿐이다. 입구의 낮은 5층 탑은 조그맣고 양동이를 엎어 놓은 듯하다. 너무 작은 크기여서 눈물이 났다. 
누군가 탑의 둥근 층층 마다 금종이를 붙였다. 미얀마나 태국 신도들은 순례할 때마다 탑에 개금불사 공양을 잘한다. 금종이를 매끈하게 붙이고 또 붙이니 금탑으로 보였다. 금탑은 햇빛에 반짝이면 두 개의 태양이 되어 천상에 빨리 닿기 위한 기도의 정성 도구로 여기나 보다. 
부처님이 기원정사에서 오랫동안 수행했던 이유는 무엇이었는지 의아하다. ‘유영굴’에서 나와 마하보디 대탑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은 뒤 기원정사에서 오래 지내셨으니 말이다. 길상초를 깔고 앉아 명상에 들었을 때 코브라 독룡이 부처님 목과 몸을 감싸 안을 때는 얼마나 싸늘했을까. 새벽이 되자 따뜻했던 기운에서 독룡은 몸을 풀고 사라졌다. 대탑 연못 안에는 부처상의 광배 위에 독룡이 일산(日傘)으로 자리 잡아 비를 막으며 보호하고 있다. 어려움이 닥칠 때도 겁에 질리지 말고 차분하라는 가르침으로 다가왔다.
앙굴리말라 집터와 수자타 장자 집터가 가까이에 있다. 앙굴리말라는 살인마였다. 그는 어리석은 탓으로 남의 꿰임에 빠졌다. 포악하여 남의 손가락을 잘라 염주를 만들어 다녔는데 반성하여 평생 재가 신도가 되었다. 사람을 헤치지 않겠다고 서약한 후 기숙사 생활했다고 안내원은 말했다. 부처님의 일거수일투족 속에서 제도 되었다.
수자타 장자는 부자였다. 고아에게 밥을 주는 사람이었다. 부처님 설법을 들으려고 수자타 장자가 24안거 동안 시봉(侍奉) 했다. 아들 결혼문제로 왕사성에 들렸다가 부처님을 만나 인연이 되고 기원정사를 지어 공양 올렸다. 불자들은 부처님이 중생 제도 한 앙굴리말라와 수자타장자의 집터가 남아 있어 순례하고 있다. 금강경에서 가르치는 모두가 방하착(放下著)에 이르게 한다. 경전에는 공한 지혜를 근본 삼아 ‘일체법무아’의 이치를 요지로 했다. ‘무주상보시’를 하며 집착도 번뇌도 내려놓으라 한다. 
보리수나무 왼편에 부처님이 마시고 발을 씻었다는 우물이 있다. 이 우물은 2500년이 넘도록 마르지 않아 커다란 우물통 안에는 얼굴이 비칠 정도이다. 속을 들여다보니 돌이 빈틈없이 빽빽하게 반짝거린다. 허리 높이의 우물통 위에는 나뭇잎도 빠지지 않게 철망으로 된 덮개를 덮었다. 지킴이의 검은 눈동자 안에 내가 들어앉은 선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세족 우물을 확인하려고 관리인에게 루피를 건네자 세숫대야에 깨끗한 물을 펌프질 해주었다. 아마도 부처님은 앙굴리말라와 수자타 장자의 발도 씻어주며 품어 안았으리라. 인도인은 기후 때문에 맨발로 걸었던 습관도 있지만, 문스톤이라 하여 연꽃 문양의 입구에 올라서려면 발을 씻었다. 공양을 올리기에 앞서서 발을 씻는다는 최고의 예였다. 기운이 서린 우물이었다.
기원정사의 철문을 경계로 사비성과 나뉘었다. 철문 앞에는 불가촉천민의 노약자와 어린아이를 안은 젊은 여인, 열 살 미만의 어린이들이 손을 내밀고 앉아 있다. 한국순례단은 이들을 불쌍히 여기고 작은 달러나 루피를 주었다. 인도 정부의 손길이 닿지 않아 불편하게 여겼던 내 마음은 곧 후회하게 되었다. 
인도사람은 순례자를 행복하게 하려고 손을 내민다는 소리에 새삼 놀랐다. 그들은 바로 내 보시 그릇이었다. ‘나에게 복을 짓게 하려고 그들은 감사의 인사도 하지 않는다.’라는 어느 작가의 글을 읽고 깨달았다. 
나의 행복 찾기는 순례하며 보시 그릇에 담겨준 마음이었다. 티 없이 맑게 웃고 있는 검은 눈동자의 어린이와 노약자의 얼굴이 떠오른다. 마음이 충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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