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리산방의 엽서(18) - 여덟 가지 세풍(世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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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리산방의 엽서(18) - 여덟 가지 세풍(世風)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23.06.14 1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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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집인 항산 김승석

마음의 달이 아름다운 오대산 월정사에서 불기 2567년 ‘부처님오신날’을 마중하였습니다. 전나무 이파리를 후려치는 빗방울에 개의치 않고 우의를 입고 전나무 숲길을 걸어서 적광전寂光殿에서 석가세존께 절을 올렸습니다. 
고즈넉한 전나무 숲길에는 묵언 정진하는 수행자들의 발자국 소리, 바람소리와 개울물소리만 있고, 가끔 심심찮게 다람쥐가 나타나 반겨줄 뿐입니다.
속리俗離의 선열禪悅도 잠시, 산문 밖을 나서니 바깥 경계의 바람이 여섯 감관에 부딪쳐 옵니다. 마치 파도치듯이 이로움의 바람을 만나면 탐심을 내고, 어그러짐의 바람을 만나면 근심과 탄식을 하고, 헐뜯음의 바람을 만나면 성내고, 우러름의 바람을 만나면 환희 심을 냅니다. 

부처님께서 <세상의 법 경(A8:5∼6)>에서 “이득과 손실, 명성과 악명, 칭송과 비난, 즐거움과 괴로움이라는 여덟 가지 법[風]이 세상을 돌아가게 하고 세상은 다시 여덟 가지 세상의 법을 돌아가게 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옛 선지식은 이 팔풍을 순풍과 역풍의 두 가지로 나눠 ‘이利·예譽·칭稱·낙樂’은 사순四順이고, ‘쇠衰·훼毁·기譏·고苦’는 사위四違라 했습니다. 사순이든 사위든 다 사람의 마음을 흔드는 바람임이 분명합니다.
이처럼 팔풍에 휘둘리면 마음은 바깥 경계를 따라 흘러갑니다. 한암 스님은 
“차라리 천고에 자취를 감추는 학이 될지언정 삼춘三春에 말 잘하는 앵무새가 되지는 않겠다.라고 하시면서 오대산 상원사에 들어오신 후 입적하실 때까지 27년간 산문을 나오지 않으셨다는데, 우리 범부들은 산문 밖에서 팔풍에 휘둘리지 않은 올바른 마음씨를 낼 수 있을까요.  

이 화두를 품다가 지난 3월 혜향문학회 회원들과 함께 둘러본 대정읍 추사 적거지 탐방 시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추사는 금석고증학의 대가로 알려져 있지만 실은 조선 말기 정치개혁가였습니다. 금수저 출신으로 벼슬길에 나섰다가 당파싸움에 휘말려 쉰다섯의 나이에 제주에서 9년 간(1840∼1848년) 위리안치圍籬安置의 삶을 보내야 했습니다. 
귀양살이에서 세속 팔풍을 어느 사람보다 더 거세게 받은 인물입니다. 그의 고통은 하나둘이 아니었습니다. 풍토는 낯설고 음식은 입에 맞지 않았으며 병치레는 잦았고, 죽은 지 한 달 지나서야 부인 예안이씨의 부음을 듣습니다.
“가장 좋은 요리는 두부와 오이, 생강과 나물(大烹豆腐瓜薑菜), 가장 훌륭한 모임은 부부와 아들딸과 손자(高會夫妻兒女孫)”라는 글은 추사가 70세에 쓴 마지막 예서체 대련 작품입니다.
오래전 충남 예산의 추사 고택의 주련에서 이 글씨를 감상한 적이 있는데,  추사는 숱한 풍상을 겪고 나서 평범한 삶 그 자체가 아름다운 것이지 그것을 떠나 추구될 아름다움은 없다고 말하는 것 같았습니다.

추사의 학예일치의 경지를 보여주는 것이 저 유명한 <세한도歲寒圖>입니다.  제주의 유배 생활에서 심신이 만신창이가 된 추사에게 변치 않는 마음을 보여준 ‘이상적’은 역관의 신분임에도 추운 겨울 홀로 빛나는 송백松柏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추사는 1844년 ‘세상의 풍조는 오직 권세와 이익만을 따르는데, 오히려 이와 달리 바다 밖 초췌하게 말라버린 사람에게 오기를 마치 세상 사람들이 권세와 이익을 좇듯 한다.’라고 발문跋文을 달아 ‘세한도’를 그리고 보은의 뜻을 담아 제자 이상적에게 주었습니다.  

추사는 사대부였지만 불교에도 조예가 깊었으며, 초의선사와는 ‘명선茗禪’을 주고받는 지기였고, 고창 선운사의 백파 스님과 선교 일치의 논쟁을 벌이면서 간화선 위주의 수행 풍토에 일침을 놓기도 했습니다. 특히 만년에 봉은사에 기거하며 발우공양하며 참회·정진하였고, 임종 사흘을 앞두고 쓴 봉은사 ‘板殿’ 현판에는 추사의 마지막 불심이 담겨 있습니다.
추사가 <세한도>에서 자신의 실존적 처지와 심경을 간결하면서도 꼿꼿한 필치로 시현했다면, <불이선란도不二禪蘭圖>에서는 어떤 경지에 이르렀기에 “20년 동안 난을 치지 않아도 진여본성의 참모습이 드러났네.”고 자찬하였을까?
<불이선란도>에는 마치 난초를 에워싸듯, 한 개의 시와 세 개의 발문이 붙어 있습니다. 이 서화의 상단에는 칠언절구의 시가 있는데, 우리말 풀이하면 이렇습니다. 
 “난을 안 친지 이십 년, 붓을 들지 못했는데(不作蘭花二十年) / 우연히 쳐낸 난초 진여 본성의 경지를 도달했네(偶然寫出性中天). / 의식의 문을 닫고 그 이치를 찾아보니(閉門覓覓尋尋處) / 이게 바로 유마거사 불이선이라는 걸 깨달았네(此是維摩不二禪).”
이 시에서, ‘폐문’이란 눈·귀·코·혀·몸·의(意, mano)의 여섯 가지 감각기능이 멈춘 삼매에 들었다는 말입니다. 바깥 경계로부터 얽혀드는 팔풍의 번뇌가 사라져서 진여 ·실상의 지혜로 난이 쳐졌다는 것인데, 추사는 이 심지心地를 유마거사의 불이법문에 비유한 것 같습니다. 
추사가 제주 유배의 롤 모델로 삼은 중국 송나라 때 대문장가인 소동파(1037∼1101년)의 경우는 어떠한가? 그는 급진적인 개혁을 추진하던 ‘왕안석’과 정치적 대립을 하면서 4년간 황주에서 유배생활, 혜주에서 3년, 하이난 섬에서 7년의 귀양살이를 하여 14년의 유배 경험을 시로 읊으신 분이십니다. 
그가 황주에 머물 때 불인佛印 선사와 교류를 하였는데, 어느 날 좌선 중에 다음과 같은 오언절구의 시를 써서 선사에게 보냈습니다.
“부처님께 머리 조아리니 가느다란 광명이 온 세상을 비추네. 여덟 가지 바람이 불어도 움직이지 않고 단정하게 자금색 연화대 위에 앉아있네.(稽首天中天 毫光照大千 八風吹不動 端坐紫金蓮)”
동파의 글을 읽고 나서 선사는 간단하게 “헛소리”라고 써서 인편에 돌려보냈습니다. 동파는 섭섭한 마음에서 선사를 찾아가 따졌습니다. 선사는 “팔풍취부동이라 하더니 헛소리 한마디에 강을 건너오셨구려.”라며 웃었습니다. 
10여 년의 귀양살이를 했다는 점에서 추사와 동파는 닮았으나, 추사는 팔풍에 흔들리지 않았고, 동파는 수심修心없이 앵무새처럼 ‘팔풍취부동’을 입으로 지껄인 것이 아닐까요.  
<법구경>에는 다음과 같은 명구가 있습니다. “단단한 바위가 바람에 흔들리지 않듯이 이와 같이 지혜로운 사람들은 칭찬과 비난에 흔들리지 않는다.”(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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