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리산방의 엽서(19) -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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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리산방의 엽서(19) -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23.06.28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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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집인 항산 김승석

시절인연에 의하여 여름 꽃이 피고 있습니다. 고풍스런 아란마을의 돌담길을 걷다보면 주황색 능소화로 도배한 것 같은 담벼락을 만납니다. 누구나 그러하듯 꽃들을 보면 마음이 맑아집니다. 
능소화피는 모습이 마치 하늘로 솟아오르는 것처럼 아름다워서 묘목을 구해다 출리산방의 주변 계단과 벽에 심었습니다. 여러 해가 지나자 담장이덩굴을 대신할 만큼 자라서 울안에서 꽃구경을 즐깁니다. 그런데 이곳은 해발 200미터의 고지대라서 시간이 좀 늦게 흐르는지 아직 꽃망울만 맺혀 있습니다. 

요즘 들어 시간이 참 빠르게 간다고 많이 느낍니다. 늙을수록 오래 기억에 남을만한 사건들의 발생 건수가 감소하고, 새로운 정보량도 줄어들면서 자연의 시간과 달리 일흔 다섯의 생체시계는 천천히 가는 것으로 인식해서 그런가봅니다.
물리학자 볼츠만(Ludwig Boltzmann)은 엔트로피(Entropy) 법칙을 유추하여 ‘시간의 흐름은 한 방향이며 되돌릴 수 없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태어나면 반드시 죽어야 한다는 생자필멸生者必滅의 인과법칙에 따라 개개인이 살아온 삶의 공간은 다르지만 다 함께 죽음을 향해 걷고 있습니다.

인간의 수명은 기껏 길어 봤자 백년인데, 여든이나 아흔이 되어 이 몸뚱이는 서까래처럼 굽고, 꼬부랑하게 되고, 지팡이에 의지하고 덜덜 떨면서 걷고, 병들고 젊음은 가버리고, 이가 부서지고, 백발이 되고, 주름살이 늘고, 사지에 검버섯이 무성할 것입니다.
살아서 죽을 때까지의 움직임이 곧 자기의 시간이고, 이 몸이 점유했던 가족과 집과 일터는 자기의 공간입니다. 누구나 자기의 공간을 더 크게 차지하고, 자기의 시간을 더 길게 갖기를 원하지만 생사生死의 시공에 걸려 자기의 힘으로 아무 것도 못합니다.

불교경전에 자주 나오는 욕계의 삼십삼천(제석천)의 수명은 인간 년으로 환산하면 36백만이 되고, 색계의 수명은 겁(劫, kappa)으로 표시하고 있어서 시간대가 무한한 것 같지만, ‘나’를 구성하고 있는 정신과 물질, 즉 오온五蘊은 찰나(刹那, khapa)적 존재일 뿐입니다. 
75분의 1초에 불과한 찰나를 통해서 자기의 몸과 마음을 통찰하는 것은 부처님들의 영역이고 학인들의 영역은 아닐지라도 찰나와 상속(흐름)을 통해 인간 100년을 산다는 것은 참으로 무상(無常, aniccā)한 것입니다.  

죽음의 길을 걷고 있는 나의 시간을 재보며 조급증에 시달리는 이 마음은 어떤 공간을 만들고 있는지, 멈춤과 통찰[止觀]을 통해 반조해 봅니다. 이를 일컬어 회광반조回光返照라고 합니다. 
욕망으로 인해 시간과 공간이 생겨났습니다. 욕망은 잡다한 생각들을 불러일으키며 그것에 의미와 가치를 부여해 생각의 늪에서, 생각의 광야에서, 생각의 결박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합니다. 
생각은 자신의 것이 아니라 그 대상과 연관되어 일어나고 사라지는 조건 지어진 법임을, 또한 자아(ego)라고 여겼던 것도 남이나 사물과 관계를 맺는 방식이나 고정관념에 불과하다는 것을 만각晩覺하였으니 자탄한들 어찌하겠습니까?

애초에 자아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실상 경험적 자기라고 불리는 에고는 순간적으로 들어오는 감각들의 일시적 모임이며 다음순간 소멸하는 찰나적 존재일 뿐입니다. 금강경에서 말하는 네 가지의 상相, 즉 아상我相·인상人相·중생상衆生相·수자상壽者相(아트만, atman)을 낳게 하는 원흉이 에고에 터 잡은 생사의 관념에 쇄기를 박고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입니다. 생각을 계속 이어갈 연료는 바로 욕망이요, 그 욕망이 없다면 생각은 연기의 역관逆觀에 따라 자연히 사그라질 것입니다.   
욕망은 사건이며, 그 사건은 인간과 사회, 자연을 포함한 그물망을 갖고 있습니다. 욕망에 의해 인식된 인간 존재는 이념이나 철학사상 등과 깊이 결합되면서 영원한 배타적 가치를 주장하기 때문에 우리로 하여금 전투적 방어에 돌입하게 만들고, 그것이 침해당하게 되면 성내고, 투쟁하고, 심지어 전쟁까지 불사하는 끔직한 사건을 일으켜 왔습니다.
부처님은 욕망의 그물인 시공간을 걷어내고 그 위기가 초래하는 분노의 시공간을 초월해서 지금·여기에 ‘찰나 생 · 찰나 멸’하는 법들을 통찰하여 자신의 탐욕을 빛바래게 하고, 탐욕을 버리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부처님은 “이 세상은 시각의 바다와 형상의 바다가 욕망의 그물에 묶여 있는 것과 같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욕망을 줄여나가고 나눔과 배려를 실천하는 길이야말로 욕망의 그물을 끊어버리는 첩경이 아닐까요.

가끔 스스로와 대화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이럴 때 산방에 나 홀로 머물며 가족, 그리고 지난날 나와 더불어 호흡을 같이 했던 사람들을 대할 때는 산山 전체를 바라보는 것과 같이 하고, 자신에겐 아집我執과 법집法執을 알갱이로 쪼개서 여실지견해야 하겠다고 거듭 거듭 다짐해 봅니다.
상대성이론에 따르면 시공간은 상대적이어서 물체가 빠르게 움직일수록, 그리고 중력이 강할수록 시공간의 흐름은 달라진다고 합니다. 명상의 에너지가 강해진다면 욕망의 고래가 빠져나갈 수 있을 정도로 그물코가 성길 것입니다.

소금은 짜기 때문에 썩지 않는 것이 본성이요, 바람은 그 어디에도 걸림이 없는 것이 본성입니다. 전생에 ‘베나레스 왕’이었던 연각불이 ‘언젠가 나도 갈애나 사견이나 무명의 그물에 걸리지 않고 갈 것이다.’라고 숙고하면서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라는 시를 읊조렸습니다. 이처럼 오욕의 즐김을 포기하고, 사성제의 진리에 대한 눈 밝은 수행자가 되면 자기중심적인 관념을 버리고 공空의 눈으로 우주 공간을 대할 수 있을 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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