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시론] 평화의 섬, 제주의 현주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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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시론] 평화의 섬, 제주의 현주소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23.07.06 1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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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인 김승석

대한민국은 제주도를 2005년 1월 27일 세계평화의 섬으로 지정했다. 4·3사건의 아픔을 겪은 제주사람들에겐 특별한 의미가 있다.
제주특별법(약칭)에서 “국가는 세계평화에 기여하고 한반도의 안정과 평화를 정착시키기 위하여 제주자치도를 세계평화의 섬으로 지정할 수 있다.”라고 규정(제235조 제1항)한 것은 분단된 한반도의 평화 협상의 공간으로서 어느 지역보다 유리한 입지적 대표성을 갖추었기 때문일 것이다.

세계평화의 섬 지정을 법제화함으로써 제주도는 사업 시행에 대한 계획안을 외교부장관에게 제출하고, 정부는 예산에 반영하여 평화실천사업을 지원하고 있다. 지정 이후 제주평화연구소 및 제주국제평화센터 건립, 제주평화포럼 개최 등의 다양한 사업을 추진함으로써 ‘세계평화의 섬’의 얼개를 갖췄다고 볼 수 있겠다. 

돌이켜보면, 1991년 노태우 대통령과 고르바쵸프 구소련 대통령의 정상회담, 2004년 노무현 대통령과 고이즈미 일본총리의 정상회담 등을 개최한 경험 외에 세계 평화의 섬 지정 후 제주도를 방문했거나 제주도에서 정상회담을 개최한 세계 정상들의 수가 12개국 20명에 이르고 있다. 
 이는 제주도가 동아시아 외교 중심지로서의 위상을 갖춰 나가고 있다는 징표이기도 하다. 하지만 한반도 평화정착을 위한 남북의 고위급 회담 장터가 아직까지 열리지 아니한 점은 아쉽다.  
 민간부분에서, 도내 언론사가 주최한 평화마라톤 대회, 음악회 등이 있고, 시민 및 종교단체가 주관하는 평화의 숲길 또는 순례 길 함께 걷기 등은 제주의 평화 이미지 홍보에 도움이 되고 있다.

 학자들은 세계평화의 섬은 “모든 위협요소로부터 자유로운 상태인 적극적 의미의 평화를 실천해 나가는 일련의 사고체계와 정책 등을 포괄하는 문화적, 사회적, 정치적 활동체계”라고 정의한다.
 ‘세계평화의 섬, 제주’ 지정 18주년이 되는 올해, 과연 이러한 문화사회적 양태를 필요, 충분하게 갖추고 있는지를 반조해본다. 

 제주는 예로부터 도둑과 거지와 대문이 없는 삼무三無의 고장으로 불려왔다. 이는 공동체의 유대와 협동을 중시해 온 제주의 전통을 일러준다. 
 그런데 제주의 오늘은 인권, 범죄, 안전, 환경문제 등 사회ㆍ문화적 억압이나 폭력으로부터 자유로운 공간이라 자부할 수 없을 법하다.
  4·3평화공원을 조성하고, 또 일제강점기의 암울한 흔적이 남아 있는 알뜨르비행장 부지 일대에 제주평화대공원을 조성하는 사업이 궤도에 진입했다고 하더라도 이는 가마(kiln)에서 옹기를 구워낸 것에 불과하고, 새우젓은 곰삭아야 제 맛이 나듯 거기에 담을 구수한 인심人心은 비어있다.
 지난해 8월 제주국제평화센터에 일명 ‘인사하는 사람’으로 널리 알려진 ‘그리팅맨’의 조각상이 설치됐다. ‘그리팅맨’은 만남·존중·화해·평화의 메시지를 전하는 유영호 작가의 작품이다. 높이 6m에 이르는 거대한 사람이 15도 각도로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인사하는 모습으로 상대를 존중하고 마음을 여는 의미가 담겼다. 
 소통과 평화를 상징하는 ‘그리팅맨’은 세계평화의 섬 제주의 이미지를 확대하는 홍보대사의 역할을 할 것이다. 그런데 제주사람들은 아직도 타인에 대한 친절과 배려의 마음이 부족하다. 

 우리는 지난 10여 년 동안 강정해군기지 갈등으로 인해 마을공동체가 파괴되고 평화가 깨진 쓰라린 경험을 갖고 있다. 최근에는 성산 제2공항 건설문제로
도민 여론이 반쪽으로 나눠져 대립하고 있다.
  평화 운동자들이 중재에 나섰지만 오히려 내심으로는 분노와 증오로 가득 차있어 화해와 조정이 성사되지 못했다. 서로 간에 소통이 없다면 몰이해와 적의가 생긴다. 

 시인과 작가로서도 유명한 틱낙한(1926~2022) 스님은 세 차례 한국을 방문했다. 방한 기간 중 스님이 가장 힘주어 말한 것도 평화 메시지. 당시 국제적 이슈였던 이라크 공격 반대와 한반도 화해 방법 등 줄곧 평화를 말했다. 스님이 프랑스의 플럼빌리지에 강조한 ‘걷기 명상’도 개인과 세상의 평화를 이루려는 하나의 방편일 뿐이었다.
  스님은 미국에 머물 때 베트남전쟁 종식을 위한 비폭력 평화운동을 전개하며, 참여불교(Engaged Buddhism)란 말을 만들어냈다. 불자들은 산사에서 명상만 하고 있을 것이 아니라, 현실 속에서 비폭력 평화의 세상을 이루기 위해 참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스님이 말하는 참여는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종교를 끌어들이는 역사적 종교 위선자들과는 확연히 다르다. 스님은 우리가 지금 적대하고 있을지라도, 적이 바로 나임을 깨닫도록 이끌어야 한다면서 “부디 나를 내 참 이름들로 불러다오”라는 시 한 편을 지었다. 

나는 작은 배로 조국을 떠나
피난길에 올랐다가 해적에게 겁탈당하고
푸른 바다에 몸을 던진
열두 살 소녀다.
그리고 나는 바로 그 해적이다.
볼 줄도 모르고 사랑할 줄도 모르는
굳어진 가슴의 해적이다.
나는 막강한 권력을 움켜잡은
공산당 정치국 요원이다.
그리고 나는 강제수용소에서
천천히 죽어가며, 인민을 위하여
‘피의 대가’를 치르는 바로 그 사람이다
내 기쁨은 봄날처럼 따뜻하여
대지를 꽃망울로 덮는다.
내 아픔은 눈물의 강이 되어
넓은 바다를 가득 채운다.
부디 나를 내 참 이름으로 불러다오.
그리하여, 자리에서 일어나
내 가슴의 문을
자비의 문을
활짝 열 수 있게 해다오.

 이 시는 인간의 끝없는 대립과 갈등과 다툼과 살육이 어디로부터 비롯되며, 어디에서 답을 찾아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는 것 같다.
 불교명상은 사회 밖으로 나가거나 사회로부터 도망치는 게 아니고 사회로 돌아가기 위하여 준비하는 것이다. 보살의 눈으로, 깨친 사람의 눈으로, 좀 더 깊이 들여다보면 세상은 화엄경에서 말하는 거대한 그물코와 같다.

 제주사람들 스스로 평화롭지 않고서는 평화를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스스로 웃지 않으면서 남들을 웃게 도와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우리 불자들의 명상수행은 평화운동을 잘하기 위한 수단과 방편이기도 하다.
여실지견의 안목으로 평화운동에 주입할 수 있다면 그래서 앙심과 증오를 줄일 수 있다면 참으로 경이로운 일이 생길 것이다. 
 불교명상 중에서 자애명상은 동체대비를 실현하게 한다. 사기 치거나 폭력이 난무하는 범죄 없는 세상, 전쟁이 없는 세상, 인간과 자연 간의 마찰과 부조화로 파괴되는 환경과 생태 오염까지 모두 동체대비의 대상이다.

 평화는 유리로 만든 꽃병과 같이 쉽게 깨어질 수 있다. 어느 때보다 오늘의 한반도 상황은 불안정하다. 윤석열 정부는 동맹 및 파트너 국가들과의 유대 강화는 물론, 중국·러시아와도 소통하고 적과의 동침도 불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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