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상자 : 홍 영 숙(창원시 성산구)
우리 중생들을 괴롭히는 그 수많은 고통이 생각이라는 물건이라는 것을 깨달아서 그 것으로부터 벗어나는 길, 우리가 살아 있기에 자꾸 자꾸 일어나더라도 청산이 백운을 바라보 듯 간섭치 않기.
아! 이 집안 소식을 누가 알리요?
효봉 스님의 오도송까지 떠 오르며 30여년의 세월이 한 낮의 꿈처럼 느껴져서 절 문을 나서서 경사진 길을 내려오는 데 어느 새 내 두눈에 눈물이 주루룩……. 천수경 속의 ‘원해여래진실의’는 지금껏 나의 화두였다.
35년 전 처음 종교로서 불교를 택해서 이 절 대웅전에서 법당 들어서자마자 부처님께 삼배를 올리며 “부처님! 저에게는 반듯이 정법만을 가르쳐 주십시오.” 정법이라는 듣도 보도 못한 단어가 나의 머리 속 어디에서 나왔는지 지금 생각해도 신기하기만 하다.
돌이켜보면 내나름 치열하게 살아온 불교신행과 수행의 시간들이었다.
6급 공무원의 직책을 내려 놓고 갑자기 육아의 생활형태로 돌변한 나! 우리 둘째 아들을 업고 열심히 거의 매일 다니던 절이 이 곳이다.
초발심자의 그많은 환희심만큼 정신적 방황과 번뇌의 나날이었다. “저건 아닌데”라는 실망감을 한없이 안겨주는 그 당시의 이 절 주지스님의 법문 등 그 와중에도 많은 길 안내를 귀찮아 하지 않고 해 주신 그 당시의 총무(원주)스님이 계셨다.
수많은 번민과 종교적 흔들림 속에서도 지금 여기까지 부처님의 진실한 제자로써 존재하게 한 나만의 경험이 있었다.
절에 다니기 시작한 지 며칠되지 아니한 어느 날 오후 처음 불교에 동시 입문하기 시작한 도반이랑 우리 둘째 아들을 안고 시내버스 제일 뒷좌석 몇 칸 앞 창가에 앉아서 그 날따라 유난히 많은 어지러운 생각에 피곤했다.
잠깐 아들을 안고 졸았는지 꿈인가 현실인가 버스 맨 뒷좌석에서 나를 향해 다가오시는 분이 있었으니!
그 분의 모습은 이 지상에서는 본적이 없는 길고 하얀 수건같은 것을 두르신 천사같기도 하고 지금껏 한 번도 본 적도 없는 엄청나게 크고 긴 반짝이는 크리스탈로 된 잔에 오렌지색 음료를 오븐 위에 들고 조용히 말씀하시기를 “니가 오늘 고생 많았다. 이걸 마시도록 하여라!” 나는 아이를 안고 벌떡 일어 서면서 “저 앞에 앉은 우리 친구도 마셔야 되는데.”
아 ! 꿈이었다. 두고 두고 몇 달동안 내 머릿속에 남이 있던 그 천사분은 바로 ‘백의관세음보살’님이시다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불교합창단장님 거실에 걸려 있는 그림 속에서였다.
액자 우측 맨 하단에는 ‘백의관세음보살님’이라고 적혀 있었다.
“아! 이 분이 백의관세음보살이시구나!”
눈물이 하염없이 볼을 타고 내렸다. 미미한 중생을 한 명이라로 깨우치게 하시려고 그렇게 자비심으로 모습을 나타내 보이셨구나!
그 지극한 부처님의 자비심을 가슴 깊이 간직하며 참으로 길게 하루도 잊지 않고 지금 이 시점까지 수행 정진하며 부처님께서 베풀어 주신 그 은혜에 보은코자 주위 초발심자가 있으면 나처럼 격하게 번뇌하지 말고 순탄히 신행활동하도록 내나름 많은 에너지를 기쁜 마음으로 투자하고 혹시 우리나라를 방문하는 외국인에게 한국불교를 알리는 시절인연이라도 있게 되면 재능기부라도 하게 될 기회를 기다리며 영어를 잊지않기 위하여 영어학원강사생활도 10년을 넘게 하면서 학원 출근 전 가까운 절에 들러서 하루도 빠짐없이 반드시 108배를 마치고 출근헀고 고등부 영어수업 마치면 밤 11시 넘어야 귀가할 수 있는 피곤한 생횔을 이어갔지만 언젠가 부처님에 대한 보은의 활동을 할 수 있을 꺼라는 환희에 찬 나날들이었다.
이 글을 쓰는 날은 ‘부처님 오신 날’이다.
아! 고마우신 우리 부처님! 속으로 크게 불러 본다.
우리 돌아가신 친정엄마의 내 태몽은 눈이 유난히 반짝이는 ‘세파트 개’였다네요. “쯧쯧, 어쩜 저렇게 태몽처럼 성격도 뭘 너무 못참고….” 우리 엄마의 걱정어린 말씀... 타고난 성격이 급하고 여자의 몸이지만 과격한 면까지 갖춘 부족한 면이 많은 성격의 소유자였다. 나라는 사람은….
이런 부족한 중생을 성숙한 불자로 만들어 묵묵히 기쁘게 이 고해의 바다를 건너케 하시는 자비하신 부처님! 너무 사랑합니다.
더욱 열심히 정진하는 삶을 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