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탐라역사문화권 정립을 위한 학술대회 탐라의 고려 불교 수용과 전개 양상(3) - ‘고려후기 제주 법화사의 위상과 역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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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탐라역사문화권 정립을 위한 학술대회 탐라의 고려 불교 수용과 전개 양상(3) - ‘고려후기 제주 법화사의 위상과 역할’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23.08.20 1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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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월 5일~7일 제주대학교 박물관에서 개최된 2023년 탐라역사문화권 정립을 위한 학술대회 ‘탐라의 고려불교 수용과 전개 양상’ 본지는 제1329호는 이어서 제1330호에는 ‘고려후기 제주 법화사의 위상과 역할’에 대해 국민대학교 박용진 교수의 주제발표를 요약정리해서 게재한다.

‘고려후기 제주 법화사의 위상과 역할’ 

◆ 주제발표: 박용진 교수(국민대학교 교수) ◆

 

법화사 구화루
법화사 구화루

제주 법화사에 대한 가장 이른 기록은 13세기 중엽 혜일(慧日)이 탐라의 여러 사찰을 유력하면서 법화사를 찾은 시문이다. 혜일은 『동국여지승람』 기준 대정현 법화사, 제주목의 묘련사, 보문사, 서천암, 굴암 등 5개 사찰을 찾아 시를 남겼다.
법화사에 대해 혜일은 ‘법화암’으로 표현하였기 때문에 소규모의 암자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법화사의 중창은 법화사지 발굴에서 출토된 기와의 명문 1269년(원종10, 至元6)부터 1279년(충렬왕 5)의 오랜 기간에 걸쳐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중창의 주체는 법화사를 중심으로 1269년 당시에는 주군현의 비보사사를 관장하는 지방관과 탐라 성주 및 왕자였고, 왕자층을 중심으로 중창이 진행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충렬왕은 『법화경』 숭상과 함께 국운을 일으키기 위해 사찰을 중수하려 하였고, 1284년에는 제국대장공주와 함께 법화신앙에 기반하여 개경에 천태종 묘련사를 창건하였다.
탐라 성주층 및 법화사는 충렬왕의 관심 속에 국가의 전통적 사원 중수 이념 등에 대해 인식하고 공유하며 법화사 중창을 추진하였을 것이다. 
14세기 법화사의 미타삼존불 봉안: 법화사의 미타삼존불은 제주 불교의 원 교류나 수용을 알려주는 것으로 주목되어왔다. 법화사의 미타삼존불의 존재는 조선초기 1406년(태종 6)에 이루어진 명나라의 법화사 미타삼존불이 태종실록에 게재되고 있다.
고려후기 법화사의 기능과 역할을 살펴보면, 고려 전기 법화사의 규모는 발굴 유구에 의거 소규모로 추정되고 있다. 법화사지 출토 청동 등잔의 조성 시기는 발굴 유구의 편년에 의거 10~11세기로 추정하고 있는데, 이는 법화사의 종파성 및 천태종의 종파 분기와도 관련이 있다. 법화사의 기능과 역할에 있어서 법화사는 여말선초에 수정사와 함께 비보사원으로 기능하였고, 조선전기 기록에는 존자암도 ‘비보지소(裨補之所)’라고 하였다. 
법화사의 여말선초 기능 가운데 하나는 원관사원이었다. 유형원이 『동국여지지』의 기록에는 제주읍치, 대정현, 정의현의 세읍이 거리가 떨어져 있지만, 역원이 없다고 하였다. 이 때문에 동서로 다니는 행객들은 모두 대정현 법화사 및 영천관, 월계사, 수정사, 조천관, 김녕소에 머물렀다고 기록하였다. 법화사는 고려시대와 조선초기까지 비보사원이자 원관사원으로 기능하였으며, 17세기까지 유지된 것으로 판단된다. 
법화사의 원관사원의 이념은 현종대 봉선흥경사에서 찾을 수 있다. 또한 법화사는 축리 및 기원사원으로 기능한 것으로 판단된다. 법화사는 원 양식의 기와로 장엄한 전각에 원나라 조성의 미타삼존불을 봉안하였기 때문에 제주 사원 가운데 그 위상은 특별하였을 것이다. 법화사는 비보사원이나 원관사원으로 기능하면서 제주 남부 지역의 대표사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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