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종 선생과 함께 가는 중국불교유적 순례 (64) - 사천성 검각(劍閣) 각원사(覺苑寺) 석씨원류 벽화 (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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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종 선생과 함께 가는 중국불교유적 순례 (64) - 사천성 검각(劍閣) 각원사(覺苑寺) 석씨원류 벽화 (32)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23.08.23 1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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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원사 대웅전 서쪽의 오른쪽에서 두 번째 벽은 석씨원류 벽화가 그려진 14개의 벽 중 11번째 벽이다. 이 벽에는 사 열 오 단에 총 20장면의 불전도가 그려졌는데, 위에서 두 번째 단 맨 오른쪽에는 159번째 장면인 〈최초조상(最初造像)〉이 있다. 이 장면은 최초로 불상을 만든 이야기로 당나라 때 제운반야(提雲般若)가 번역한 경전인 『불설대승조상공덕경(佛說大乘造像功德經)』에 실린 내용을 그린 것이다. 
   
최초의 불상이 만들어지다

언젠가 부처님께서 어머니 마야부인께 설법하기 위하여 삼십삼천(三十三天)에 올라가 석 달 동안 머물었다. 그동안 지상의 중생들은 부처님이 계시지 않아 의지할 곳이 잃어 매우 슬펐다. 특히 우다야나(優陀延, 코삼비국의 왕) 왕은 부처님을 뵙지 못하자 하늘을 우러러보며 상심하다 곧 죽을 것 같은 마음에 죽기 전에 부처님을 뵐 방법을 찾다가 부처님의 형상을 만들어 공양하고 예배하면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다시 생각해보니 부처님의 형상을 조성했을 때 부처님과 같지 않으면 죄가 될까 두려웠다. 그래서 나라 안에 있는 뛰어난 장인들을 불러 그들에게 자신을 위해 부처님의 형상을 조성하면 아주 후한 보수를 주겠다고 했다. 그런데도 장인 중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부처님의 모습은 세간에 비할 사람이 없고 부처님의 상호와 광명, 위덕을 자신들은 감히 만들 수 없다고 하였다. 이에 왕이 간절히 재차 부탁하니 전단목을 준비하면 다음 날부터 일을 시작하겠다고 했다. 
이때 비수갈마천(毘首羯摩天, 공예와 건축을 맡은 천인)이 도리천에서 지상을 내려보다 우다야나왕이 불상을 조성하려는 것을 보고, 자신이 만들면 부처님과 조금은 닮으리라는 생각에 장인으로 변하여 궁으로 가서 자신이 불상을 만들겠다고 청했다. 우다야나 왕은 크게 기뻐하며 창고에서 향나무를 선택하여 몸소 어깨에 메어다가 장인에게 주며 부처님의 모습과 똑같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비수갈마천이 도끼를 들고 나무를 찍으니 그 소리가 삼십삼천에 계신 부처님에게 이르렀고, 부처님께서 미소를 지으시며 우다야나 왕의 공덕을 찬탄하셨다. 빨리 부처님을 뵙고 싶은 왕은 장인에게 계속 재촉했고, 날이 저물기 전에 불상이 완성되었다. 그 모양은 가부좌를 하였는데, 높이가 일곱 자이며, 얼굴과 손발이 모두 붉은 금빛이었다. 우다야나 왕은 불상의 원만한 상호를 보자 모든 업장과 번뇌가 사라짐을 느껴, 기뻐하며 장인에게 상으로 보배들을 주려했으나 장인은 왕과 함께 복을 닦기를 바라며 상을 받지 않았다. 그리고 그날 밤 하늘로 올라갔다. 
시간이 지나 부처님께서 중생들을 교화하기 위해 도리천에서 내려가려 하자 비수갈마천과 천인들이 승가시성에서 도리천까지 보배로 장식된 세 갈래 계단으로 된 길을 만들었다. 부처님께서 하늘에서 처음으로 발을 내려 층계를 밟을 때 범왕은 오른편에서 흰 일산을, 제석천은 왼편에서 흰 불자를 쥐고 섰다. 수많은 천인들이 부처님을 따라 내려올 때 공중에는 감미로운 음악 소리와 꽃비가 내렸고, 부처님의 공덕을 노래하는 소리로 가득 찼다. 
지상에서는 부처님을 맞이하기 위해 왕들과 백성, 사부대중이 승가시성을 겹겹으로 둘러싸고 향기로운 꽃을 뿌리며 내려오시는 부처님을 맞고, 국왕과 대신들은 가지고 온 공양물을 부처님께 바쳤다. 우다야나 왕은 불상과 함께 여러 공양물을 바쳤는데, 상호가 단정하고 장엄한 부처님과 자신이 가지고 온 불상을 비교해 보니 마치 수미산과 작은 언덕을 비교하는 것 같았다. 다만 나계와 육계가 조금 닮아서 그나마 불상임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우다야나 왕이 부처님께서 여쭈었다.
“부처님이시여, 부처님께서는 보리를 구하시어 이렇게 최상의 몸을 얻으셨는데, 제가 조성한 상이 부처님과 닮지 않아 허물이 될까 두렵습니다.”
이에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허물이 되지 않는다. 그대는 이미 무량한 이익을 지었다. 그대는 지금 나의 불법 안에 처음으로 본보기가 되었고, 그 인연으로 모든 중생들로 하여금 큰 믿음과 이익을 얻게 하였다.”
그리고 미륵보살이 불상을 조성하는 공덕에 대해 여쭈자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미륵아, 만약 어떤 사람이 여러 가지 비단에 그림을 그리거나, 금, 은, 동, 철, 납, 주석 등을 녹여 만들거나 전단목이나 옥석에 조각하거나 비단에 수로 불상을 만드는 사람은, 설령 너무 작아서 손가락 크기만 하더라도 그 사람은 온갖 큰 과보를 얻게 될 것이다. 그 공덕은 헤아릴 수 없이 많아 작은 나라의 낮은 종족이나 고독한 집, 빈궁한 집에  태어나지 않으며, 인천 세계 가운데 태어나 원만함이 뭇 사람의 범위를 뛰어넘을 것이다. 병으로 인한 고통도 없을 것이고, 독약이나 무기로 인한 해도 입지 않고, 삼악도에 떨어지지 않고 온갖 죄가 소멸되어 갖가지 복을 얻게 될 것이다.” 

한역 경전에 전하는 부처님께서 어머니인 마야부인에게 설법하기 위해 삼십삼천(도리천의 인도어를 음역한 말을 다시 의역하여 만들어진 단어, 제석천이 다스린다)에 올라갔을 때, 부처님을 그리워한 우다야나 왕과 코살라국의 프라세나지트(파사익) 왕이 각각 전단목과 금으로 된 불상을 만들었다는 이야기는 상당히 널리 유행되었던 것 같다. 우다야나 왕이 만들었다는 우전왕상이라 불리는 불상 양식이 중국과 일본에서 한때 유행했을 정도이다. 위 이야기가 실린 『불설대승조상공덕경』은 당나라 때 번역되었는데, 제목에 ‘대승’이란 말이 있는 것으로 보아 초기 경전이라기보다는 대승불교가 일어난 이후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학계에서는 부처님 생전에 불상을 만들었다는 이야기는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기원전에 만들어진 불상으로 추정되는 유물이 없고, 엄격한 수행자인 부처님이 자신의 상을 만들어 예불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불상이 만들어졌다고 추정되는 기원후 1세기까지 인도에서는 불탑이나 사원에 부처님의 모습을 장식할 때 부처님의 모습 대신 부처님을 상징하는 보리수, 금강좌, 발자국, 법륜 등으로 대체하였다. ‘법등명자등명’처럼 부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자신의 열반 후 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과 불법을 의지처로 삼으라고 하셨다. 그런 분이 자신의 형상을 만들어 신처럼 모시고 의지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을 것이다. 부처님 사후 화장하고 나온 사리를 안치한 불탑이 숭배되었는데, 그것은 부처님을 기리고 추모하는 대상이지 그 자체가 숭배 대상은 아니었다. 게다가 당시 인도에서는 다른 종교에서도 상을 만드는 전통이 존재하지 않았다. 이런 사실을 종합하여 불상은 아무리 빨라도 기원후 1세기경 간다라 지역에서 만들어졌다고 본다. 세월이 흘러 부처님을 직접 보고 예배하고싶다는 열망이 생기게 되었고, 마침내 불상이 만들어진 것이다. 
사진 1은 콜카타 인도박물관에 있는 바르후트 불탑에 장식되었던 〈도리천에서 내려오는 부처님〉을 표현한 조각이다. 세 갈래의 계단 맨 위와 아래의 중앙에 발자국이 하나씩 표현되었다. 발자국이 부처님 형상을 대신하였다. 왼쪽의 보리수와 빈 대좌도 부처님을 상징한다. 사진 2는 각원사 벽화 〈최초조상〉이고, 사진 3은 석씨원류 판화이다. 왼쪽 아래 모퉁이에 서 있는 사람이 장인으로 변한 비수갈마천이고, 그 옆에 서 있는 희미한 형상이 최초로 만들어진 불상이며, 아래 중앙에 부처님을 향해 무릎을 꿇고 예배드리는 이가 우다야나 왕이다. 

(사진 1) 콜카타 인도박물관에 있는 도리천에서 내려오는 부처님을 표현한 조각
(사진 1) 콜카타 인도박물관에 있는 도리천에서 내려오는 부처님을 표현한 조각
(사진 2) 각원사 대웅전 11번째 벽의 최초조상 장면
(사진 2) 각원사 대웅전 11번째 벽의 최초조상 장면
(사진 3) 석씨원류의 최초조상 판화
(사진 3) 석씨원류의 최초조상 판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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