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보리분법-깨달음으로 이끄는 수행의 로드맵 - 어떻게 다섯 가지 장애를 극복할 것인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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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보리분법-깨달음으로 이끄는 수행의 로드맵 - 어떻게 다섯 가지 장애를 극복할 것인가(1)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23.08.23 1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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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지는 5월 초부터 대략 20여 회에 걸쳐 진용스님께서 (사)21세기불교포럼에서 월 1회 정기적으로 ‘37보리분법’이라는 주제로 법문하신 내용을 연재하려고 합니다.

먼저 수행 중에 일어나는 다섯 가지 장애는 사띠(sati)의 대상이라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부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그 결과가 나타납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sanditthiko(산딧티꼬) 눈앞에 결과가 나온다.”, “akāliko(아깔리꼬) 시기를 묻지 않는다.”라는 금언은 곧 결과가 나오는 것뿐만이 아니라, 어떤 시대라 하더라도 실천하면 깨달음이라고 하는 결과가 나온다는 보편적인 가르침의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다른 종교는 수행하면 “사후, 천국에 들어간다.”라고 말하나, 불교는 “지금·여기서 깨달음에 이른다.”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수행하는 사람들은 많지만 깨달음이라고 하는 결과를 내는 사람들은 적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대답은 간단합니다. 해탈하고 싶다는 마음이 진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해탈에 이르고 싶다는 진지한 의욕은 그렇게 간단하게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해탈에 이르고 싶다는 진지한 의욕은 현명한 자의 특권입니다. 부처님께서 “지혜에 의해 집착을 버려 해탈에 이른다.”라고 명확하게 말씀하셨으므로 지혜와 해탈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지혜를 완성하면 깨달음에 이르지만, 지혜가 곧 깨달음은 아닙니다. 지혜에는 2종류가 있습니다. 위빳사나 수행으로 현상을 관찰하면 ‘있는 그대로’의 진리를 발견합니다. 그것이 지혜입니다. 또한 불교를 잘 배워 숙고하고, 자신의 인생에 대조하고, 또 타인의 삶에도 대조해서 부처님이 말한 것은 진리임이 틀림없다고 이해하는 것도 지혜입니다. 불법을 이해한 현명한 자가 교학의 튼튼한 바탕 위해 실천해 보자고 생각하면서 수행을 하면 머지않아 좋은 결과를 낳게 됩니다. 

현재 수행하는 사람들이 부처님 당시나 먼 옛날 수행자들과 다른 점은 ‘불법은 진리.’라는 이해의 폭과 깊이에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불자들은 삼보에 대한 믿음과 불법이 진리인 것은 당연하다고 받아들이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진보가 없습니다. 불법을 배우고, 이해하고, 체득하여 해탈에 이르고 싶다는 진정한 의욕을 일으키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참선을 방해하는 다섯 가지의 장애가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섯 가지 장애는 수행하려면 제일 먼저 나타나서 수행자의 수행을 방해하는 장애(덮개)입니다. 
그러나 수행자는 이 다섯 장애를 싫어하거나 없애려 하지 말고 사띠의 대상으로서의 담마(법)로 받아들여 알아차려야 합니다. 이들도 원인·결과라는 조건에 의해 생멸하는 무상한 성품을 지닌 것이지, 나의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수행자가 기억하고 마음에 새겨야 할 다섯 가지의 장애라 함은, ① 감각적 욕망(kamacchnda), ② 악의(Vyāpāda), ③ 해태와 혼침(Thīna-midha), ④ 들뜸과 후회(Uddhacca-kukkucca), ⑤ 의심(Vicikicchā)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오욕락을 갖고 있습니다. 다섯 가지 감각의 대상, 그 어느 것에 대한 것이든 거기에 지혜롭지 못한 주의를 자주 기울이는 것은 아직 생겨나지 않은 감각 욕망을 생기도록 조장하며, 생겨난 감각 욕망을 늘리고 드세게 만드는 자양분이므로 수행자는 감각 욕망을 키우지 않도록 자제해야 합니다.
악의는 성내고 남에게 화를 내는 것입니다. 수행자의 마음이 악의에 차 짓눌려 있을 때 그는 자신의 행복도, 남의 행복도 올바로 이해하고 보지 못합니다.  
해태는 마음의 힘이 둔하여 약해지는 것, 행동하고 싶지 않거나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상태, 혼침은 선하품과 기지개, 식곤증, 까라짐, 졸림 등을 뜻합니다.
들뜸은 마음이 산만하고, 초조해하고 있고, 열이 오르고 있고, 집중력이 없어 혼란스럽고 흥분해 있는 상태를 뜻하고, 후회는 자신이 한 것을 생각해서 ‘아! 왜 저런 일을 했을까? 해선 안 되는 것을 해 버렸네! 나는 나쁜 사람이다!’ 등을 생각하며 마음을 어둡게 하는 것을 뜻합니다.
의심은 Yes/No가 확실치 않은 상태를 뜻합니다. 들어오는 정보를 확실히 이해할 수 없는 상태입니다. 불교에서 의심은 매우 무서운 병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또한 정보나 데이터를 조사하려고도 하지 않고, 머리로부터 생각하여 부정하는 일도 의심입니다. 또한 이해함이 없이 통째로 받아들이는 일도 의심입니다. 의심이 있는 사람은 정신적으로 불안정하기 때문에 지혜는 자라지 않습니다.
‘번뇌는 인간에게 원래 갖춰져 있는 것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라도 욕구가 있고, 분노가 있고, 혼란스러운 마음이 있다. 이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의심에 굴복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의심은 간단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수행을 실천해도 머리는 망상·사고로 가득합니다. 왜 한없이 망상이 맴도는 것일까요? 결론이 없기 때문입니다. 확실치 않기 때문입니다. 망상은 답이 나오면, 결론에 이르면, 종료하는 것입니다. 
수행할 때에도 ‘이러는 것이 좋은 것인지? 다른 방법은 없는가? 자신에게 하기 쉽게 이렇게 하면 좋지 않을까? 자아가 없다고 말해도 자의식은 있겠지! 자의식은 자아는 아닌 것인가?’ 등을 생각합니다. 마음이 보이는, 들리는, 느끼는 등으로 알아차려서 멈추지 않는 한, 수행은 진보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전 재산도 버릴 수 있고, 가족도 버릴 수 있고, 사치도 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개념에 대한 집착은 버릴 수 없습니다. 매우 어렵습니다. 이것이 의심이라고 하는 마음의 누름돌입니다.

이와 같은 다섯 가지 장애는 실참 수행에서 마음이 좀 고요해지면 망상, 통증, 졸림, 싫증, 의심 등으로 그 모습을 드러냅니다. 부처님께서는 이런 부류의 해로운 마음부수들을 사띠의 대상으로서 관찰할 가치가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수행자는 이것들을 수관(隨觀)함으로써 법의 성품을 알고 봅니다.
이 다섯 가지 장애를 그냥 장애라고 생각하면 수행을 할 수가 없고, 이들이 사띠의 대상이라고 여겨 수관해야만 수행이 됩니다. 이런 장애들을 탐·진·치로 반응하지 않고 그것을 대상으로 받아들이고 수용하여 사띠할 때 수행은 발전합니다. 수행의 기초는 이 다섯 가지 장애를 사띠로 이겨내는 작업에서 다져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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