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4·3에 희생된 스님의 후손입니다. 세 번 째 이야기 제주 불교 4·3 피해 증언마당 - 광순스님의 '관음사'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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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4·3에 희생된 스님의 후손입니다. 세 번 째 이야기 제주 불교 4·3 피해 증언마당 - 광순스님의 '관음사' 편
  • 김익수 주필·대기자
  • 승인 2023.09.14 19:3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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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3일 제주특별자치도의회 대회의실에서 열려

(사)탐라성보문화원과 제주특별자치도의회4․3특별위원회가 공동 주최, ‘저는 4․3피해 스님의 후손입니다’라는 주제로 제주불교 4․3피해 증언마당이 지난 13일 제주특별자치도의회 대회의실에서 열렸다. 
도내 기관단체장과 도 관계관, 도의회 길상회 의원, 사찰 신행단체장과 불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제주불교 4․3피해 증언마당에서 (사)탐라성보문화원 이사장 구암 성천 스님은 인사말에서 “제주4․3증언마당이 ‘진실, 화해, 상생’을 지향하는 제주4․3의 가치를 국제적으로 제주4․3 기록물에 대한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를 추진하고 있는 상황에 불교계를 대변하는 역할을 다해주기를 바란다”고 전했다.
사)탐라성보문화원 김진희 기획국장이 진행한 제주불교 4․3피해 증언마당을 제주불교신문의 지면을 통해 2회로 나뉘어 만나게 된다. 
첫 번째로 전 명법사 주지 광순 스님의 증언마당 ‘관음사 편’을 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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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순 스님의 ‘관음사 편’

 

광순 스님(전. 명법사 주지)
광순 스님(전. 명법사 주지)

“취조하는 소리, 비명 지르는 소리 등 지옥 같았어요. 가마니로 둘둘 말아 시체가 내쳐지는 모습도 봤어요. 여름이었는데, 시체 썩는 냄새까지 그런 지옥은 없었지요.”

한라산 650미터 기슭에 자리한 대한불교조계종 제23교구 본사 관음사는 제주불교의 중심이다. 관음사는 지난 1909년 안봉려관 스님에 의해 중창됐다. 스님은 해월굴에서 3년 동안 관음기도를 드리며, 법당과 요사를 완공하기에 이른다. 
뒤이어 통영 용화사 등에서 불상과 탱화를 모셔와 여법한 사찰의 모습을 갖추게 된다. 절의 외형을 갖추는 불사가 일단락되자 제주 중심지인 중앙로에 시내, 포교당인 대각사를 세워 제주도민과 함께 호흡하는 적극적인 포교활동에 나선다. 
오랜 시간 맥이 끊겼던 제주의 불교가 관음사를 중심으로 살아나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관음사에도 4․3 광풍이 불어 닥친다. 당시 관음사의 위치가 전략적 요충지였기에 토벌대와 입산 무장대가 관음사 지역을 중심으로 상호 간 첨예하게 대치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관음사는 전각이 전소된다. 이 같은 참혹한 기억을 아직도 뇌리 속에 지워지지 않는 분이 바로 4․3당시 열세 살 나이에 관음사에 기거했던 전 명법사 주지 광순 스님이다.
“제가 구좌읍 김녕리 출신이에요. 제가 독자였는데, 1945년 해방되면서 마을에 콜레라가 돌면서 이를 피해 아버지를 따라 관음사로 올라갔던 겁니다. 당시 오이화 스님이 관음사 주지 스님이었어요. 
그리고 종선 스님의 할머니인 대지월 보살님, 김석윤 스님의 아들이었던 김성수 스님이 총무였고, 그 밑에 동행이었던 덕수 스님(제주시 오라동 월정사서 기거하다 총살당함)도 저랑 같이 교육도 받았어요.”
그러나 4․3이 발발하면서 경찰과 군인 20여 명이 올라와 관음사에 불을 지른다. 스님은 1949년 양력으로 2월 경인 추운 겨울날이었는데, 천둥치고 벼락이 쳤다고 기억했다. 스님은 관음사 전각이 모두 전소되면서 어쩔 수 없이 아버지와 함께 중앙로의 관음사 포교당으로 내려오게 된다. 하지만, 그 당시 기억은 생생했다.
“이세진 스님은 무장대의 간부였어요. 권총을 무장했을 정도니까요. 무장대 간부급도 관음사에 거주했는데, 군복을 입은 군인도 섞여 있었습니다. 당시 무장대 사령관이었던 이덕구의 얼굴도 직접 봤는데, 얼굴엔 곰보자국이 있었죠. 무장대 10여 명이 관음사에서 밥도 해먹었지만 우리에게는 피해를 주지는 않았어요.”
당시 학승으로 널리 알려졌던 이세진 스님에 대한 기억은 더욱 또렸했다. 당시 토벌대가 항복을 권유하는 삐라를 비행기에서 뿌렸는데, 그리고 나서 이세진 스님이 귀순했을거라 기억했다. 
스님은 하산한 후 토벌대에 포로로 잡혀 주정공장의 수용소에 감금되었다. “포교당에 있으면서 주정공장에 이세진 스님이 잡혀 있다하여 관음사 신도들과 함께 스님을 면회하러 갔었어요. 취조하는 소리, 비명지른 소리 등 지옥 같았어요. 가마니로 둘둘 말아 시체가 내쳐지는 모습도 봤어요. 여름이었는데 시체 썪는 냄새까지 그런 지옥이 없었지요. 
스님은 주정공장에서 고문을 받다가 풀련난다. 당시는 양민증이 있어야 타 지방으로 갈 수 있었지만, 스님은 제주시 외도 수정사지에 기거하다가 1949년 7월9일 사복경찰에 잡혀나가 수장되었다.
관음사가 전소되자 군인들은 병력과 민간인들을 동원하여 폐허가 된 관음사 경내에 주둔지를 구축했다. 숙영지와 초소 등 27곳의 방어유적과 돌담으로 제1, 제2 방어선을 겹겹이 구축했다. 1955년까지도 관음사 터는 경찰유격대의 전초선 신선대 사령부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제주불교 4․3피해 증언마당 다음 주 제2편은 한국불교태고종 정방사 주지 혜일 스님의 제주불교의 원로인 이일선 스님과 고인봉 스님에 대한 4․3피해 증언마당이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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